제217화
나는 멈칫했다.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어둑한 색의 눈동자. 초점 없는 시선이었다.
버석버석 마른 입술이 무어라 뻐끔거렸다.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 들렸던 머리는 다시 툭 떨어졌다.
나와 레바이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죽은 겁니까?”
“죽긴 누가 죽어. 죽을래?”
레바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어느 틈에 안경을 사수한 건지.
안경알에 금이 가긴 했지만 보쌈되어 가는 중에 잘도 끼고 있었구나 싶었다.
“가주님께서 너무 심각하셔서 말입니다.”
“그럼 이런 상태인 놈을 두고 흥분을 안 하겠어?”
“저자가 누군데 그러십니까?”
순간 말문이 막혔다.
‘아.’
……얘 기억 없었지?
‘뭐야, 순간 너무 3회차처럼 말을 하길래 나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대답했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심쩍은 눈으로 레바이를 보았다.
“의학 및 약학 지식도 있는 제가 보기엔 당장 급사할 것 같진 않습니다. 혹등고래는 워낙 튼튼한 놈들 아닙니까.”
마치 남 얘기라는 듯, 아. 남 얘기 맞지?
하지만 묘하게도 저 태도가 마치 오래 알고 지내 편해진 지인을 함부로 대하는 태도와 비슷해 기분이 요상해졌다.
저 시키, 계속 아리송하게 구네.
“어쨌든 이동하자.”
요새는 무너졌다. 당장 리니어스를 회수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이동을 결정하고 다시 하우저를 둘러메려 하는데, 멀리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야! 가주님!”
물줄기가 휙 솟아오르더니 두 사람이 뛰어내렸다.
둘째놈과 용 공작이었다.
“뭐야. 말했던 시간보다 더 빠르게 요새가 무너지던데? 너 뭐 했어? 아니, 잠깐만…… 어깨에 진 놈은 또 뭐냐? 설마…….”
“아아.”
나는 상황을 짧게 설명했다.
둘째는 나처럼 한눈에 하우저를 알아본 듯했다.
하기야, 이놈도 인상으로는 쉽게 잊을 수 있는 놈이 아니었지.
“허어, 저 새낀 왜 여기 있다냐? 나 참…….”
아틀란은 투덜거리려다 말고 레바이와 용 공작이 있음을 깨달았는지 나름 신경 쓴답시고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옛 동료가 처참한 몰골로 내게 안겨 있으니 심경이 복잡한 모양이었다.
‘거친 주제에 속정은 많아 가지곤.’
나는 잠시나마 작게 웃고는 다시 얼굴을 굳혔다.
“야, 그보다 그놈은 내가 들게.”
“아니, 됐어. 돌아가기나 하자.”
“아니, 가주님 넌 무슨 너보다도 큰 놈을 몸에 이겠다고……!”
“새삼스럽게.”
전쟁통엔 사람이 없어서 대포를 직접 지고 간 적도 있구만. 뭘 놀래?
물론 그때야 물의 힘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지만.
아틀란은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쉽게 포기했다.
아틀란과 대화하는 사이에 레바이가 응급 처치를 해 두었다.
“아, 고맙다.”
“별말씀을요.”
그리고 요새에서 탈출할 때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쌀가마처럼 지고 갈 수 없으니 업었는데.
등이 갑작스럽게 가벼워졌다.
“무슨 짓이야?”
돌아보면 놀랍게도 용 공작이 하우저를 들고 있었다.
일단 아틀란 놈인 줄 알고 찌푸리다 말고 한 번 놀라고.
‘허어, 신체 능력 보게?’
용은 용이란 건지. 저 거구를 가볍게 들어 올린 힘에 놀라 속으로 혀를 찼다.
“생각해 보니 당신을 굳이 대피시키지 않아도 문제없었겠어. 그보다 걘 좀 줄래?”
“…….”
“용 공작?”
“…….”
“용 공작님?”
내가 눈썹을 들어 올리며 부르자 그제야 남자의 입이 살짝 열렸다.
“내게 들겠다.”
“당신이 왜?”
왜 자꾸 조개처럼 입을 꽉 다무는 거지? 어처구니가 없네.
이런 내 마음이 얼굴에 드러났는지, 용 공작의 입이 열렸다.
“이 일행에서 전투를 할 줄 아는 건 너와 다른 범고래다.”
“그런데?”
“네가 들면 네 손이 묶이니…… 이쪽이 효율적이다.”
자신의 말이 합리적이란 소리였다.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긴 했다.
나는 기절한 하우저를 보다가 천천히 내민 손을 다시 가져왔다.
“그래, 그럼 잘 부탁할게.”
“……중요한 인간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하우저를 보고 있자니 아틀란처럼 나도 복잡한 심경이긴 했다.
거기 잡혀 있던 건 상어와 다투다가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긴 한데.
설마하니 정말 만약에 상어놈들에게 협조한 건 없겠지?
‘지금은 3회차가 아니니까.’
이놈도 내가 아는 그놈이 아닐 것이다. 사람은 정말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쉽게 변하기도 한다.
나는 이걸 너무나 잘 안다.
“모르겠다. 정말 중요한 사람이 될지.”
“그럼 내가 데리고 있어도 상관없겠군.”
“그래, 알겠어. 부상자니까 주의해 줘.”
“……그러지.”
나는 걸음을 옮기던 것도 잊고 멈춰 섰다.
남자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기억을 잃은 뒤로 버석한 사막과 같은 표정을 유지한 채 시선만 움직이는 사람이었다.
새하얀 설산에 핀 붉은 꽃처럼 입술이 약간의 곡선을 그린 것뿐인데, 시선이 그대로 꾹 잡아채인 기분이었다.
입을 달싹였다.
그러나 내 입에서 나오려던 말은 끝내 소리가 되지 못하고 다시 목으로 넘어갔다.
‘왜 기뻐하는 거야?’
고개를 돌리면 둘째와 레바이가 이쪽을 보고 있었다.
“뭐야. 뭘 봐?”
“아니다. 뭐.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뭘?”
“에휴. 갈 길이 멀다 멀어.”
“……뭐라는 거야. 레바이, 저놈 왜 저래?”
“글쎄요.”
레바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가주님께서 저자를 안고 가는 건 별로라고 생각했던 차라. 잘된 일이라 생각합니다.”
“왜, 내가 전투를 못 하게 되니까? 너도 걱정이 많구나.”
“……예에, 그렇게 생각하십시오.”
어쨌거나 일행과 다시 합류했겠다, 목적도 일부지만 달성했겠다.
“출발하자.”
더는 지체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우리의 출발은 다시 유보되고야 말았는데.
눈앞에 등장한 웬 사내 때문이었다.
“저거, 우리가 끌고 다니던 그놈 아니냐?”
“빨판상어?”
퍼석한 흙을 뒤집어쓴 남자가 우리 앞에서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뭐지? 살아남을 수가 없을 텐데?’
저 거대한 붕괴 속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남은 걸까.
눈을 가늘게 좁혔다.
‘빨판상어에게 생존에 유리한 특기가 있다고 들은 적 없어.’
아무래도 하우저를 용 공작에게 맡긴 건 잘한 일인 모양이었다.
영 낌새가 좋지 않으니 말이다.
“하아, 하아, 사, 살려 주십, 커헉, 주십시오…….”
빨판상어 수인, 가모라는 우리를 향해 애타게 손을 뻗었다.
엉망인 몰골이었다.
팔이 하나 날아갔으며 다리도 너덜너덜하기 그지없었다.
머리카락은 다 타 버린 건지 듬성듬성했다.
붕괴하면서 폭발이 함께 일어났는데, 거기 휘말린 게 분명했다.
“너 어떻게 살아남았지?”
“안 들, 안 들려서. 조, 조금만 가까이서…….”
이게 웬 수작일까.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도 앞으로 걸어갔다.
“가주님!”
“괜찮아. 넌 백업 준비나 해.”
아틀란과 레바이에게 대기 명을 내리고는 놈의 앞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보니 더욱 처참한 몰골이었다.
‘이상한데. 이건…….’
살아 있는 게 신기한 몰골이었다.
그래, 움직이는 시체란 말이 딱이었다. 숨을 쉬는 것 자체가, 나아가 걸어온 게 불가능한 몰골이었다.
부러진 다리로 여기까지 절대 걸어올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일을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다.
가모라가 기다렸다는 듯 배시시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인간의 입꼬리가 위치할 수 없는 곳까지 활짝.
“하, 하하. 하하하.”
“어떻게 살아 있지?”
“하하, 하하하. 나, 왜, 살아 있?”
“바다의 맹세에 따라 거짓말은 하지 못할 테지.”
“아, 거짓말. 하면 안 되지. 음 안 되지.”
히죽이죽, 미친 사람처럼 웃던 가모라의 동공이 나를 향했다.
나는 이런 눈을 본 적 있다.
단, 이번 생이 아니라 앞선 다른 회차에서.
“몰랐구나? 나, 나한테 아니, 내가 모시는 분? 나는, 바다의 맹세 안 지켜도 되는데애.”
헤죽헤죽, 혀를 날름거리며 웃던 가모라의 목이 툭 옆으로 기울어졌다.
놈이 기울인 것이 아니었다.
이미 목이 부러진 채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내가, 내가 누구였더라? 아. 아아. 아! 아아악!”
가모라가 손을 뻗었지만 그 손은 내게 닿지 못했다. 왼팔도 사실은 부러진 상태였으니까.
곧 차분해진 가모라의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아니, 차분해진 것이 아니라 서늘하고 광기에 찬 시선이었다.
“안녕, 칼립소?”
가모라의 피부가 가시 인형의 것처럼 갈라지며 툭툭 부서진다.
팔다리도 성치 않건만 오직 입술만이 인형의 것처럼 우아하게 움직였다.
“음, 오랜만이야. 아주 오랜만.”
나는 이 목소리를, 아니다. 이 말투를 알고 있다.
“내가 준비한 파티, 너무 쉽게 끝나 버렸잖아.”
가모라의 입술이 그윽한 미소를 그렸다.
“아쉽게.”
어찌 모를까.
1회차, 내가 살아남아 보겠다고 그리도 열심히 유혹하던.
이 세계의 남자주인공.
황태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