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6화
범고래를 증오하는 상어 일파들은 자신들만의 요새를 꾸며 게릴라로 움직이는 동시에, 한 가지 수단을 강구했다.
모든 요새에 자폭장치를 심어 두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범고래가 군단을 꾸려 도시를 침입하면 아군이 있건 없건 요새를 그대로 터트려 동귀어진을 서슴지 않았다.
그네들의 전통이었지만 결코 다른 종이, 특히나 범고래들이 알 리가 없는 사실이었다.
……모두가 맹세로 굳게 비밀을 유지하는 사항이었으니까.
게다가 아직까지 한 번도 자폭장치를 이용한 요새가 없었기에 더더욱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다.
“뭐야, 왜 놀라는 눈이지?”
“그, 그걸 어떻게…….”
“아. 수가 있지.”
칼립소가 눈짓하자 아틀란이 가모라를 멱살 채로 들어 올렸다.
“안내해.”
살벌한 투기 앞에서 가모라는 덜덜 떨며 한 번 더 굴복한 채 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안내한 순간 죽을지도 모르는 공간으로.
‘어떡하지? 어떡하지?’
그쪽으로 가면…… 자신은 반드시 죽는다.
머리에서 새빨간 경고등이 울렸다. 나는 죽으면 안 돼. 죽어선 안 돼.
죽고 싶지 않은 마음은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당연하겠지만. 묘한 기분이었다.
마치 이 생존본능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지금은 이 기묘한 상태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필요해.’
가모라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이들이 어찌나 조용히 움직이는지.
이 밤을 틈타 너무나도 쉽게 보초를 쓰러트리며 은밀하게 움직였다.
하다못해 무력이 강해 보이지 않는 저 돌고래마저도!
마침내 가모라가 자폭장치 근처에 다다랐을 무렵.
가모라는 눈을 질끈 감으며 한곳을 가리켰다.
“저, 저곳입니다……!”
“그래?”
가모라는 마지막 갈림길에서 자폭장치가 없는 방향을 가리켰다.
칼립소는 의심 없이 믿는 듯했고, 그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
퍼억!
“그동안 고생 많았다.”
가모라가 고통에 신음하며 눈을 떴을 때, 그는 바닥에 누워 있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선명하고도 차가운 눈동자가 보였다.
“여기 속한 것만으로 넌 무수히 많은 수인을 죽였겠지?”
자비 없는 시선.
“그, 그건…… 읍!”
“자자, 소리 내지 말고. 물어 뭐하겠어.”
사실이었다. 이 요새에 속한 이들 중에서 죄 없는 이를 죽여 보지 않은 자는 포로와, 지하에 잡혀 온 그놈밖에 없을 터.
“이 도시와 함께 가라앉으라고.”
칼립소는 작게 흥얼거리며 그를 끌고서 자폭장치로 향했다.
마치 이곳에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그렇다면 대체 왜 안내를 시켰단 말인가?
칼립소는 기묘하게 생긴 자폭장치를 보면서도 당황 한번 하지 않은 채, 옆에 있던 레바이에게 지시했다.
방법마저도 소름 끼치게 정확했다.
“자, 이제 쇼타임이다.”
쾅!
자폭장치가 움직인 동시에, 이 거대한 요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요새가 무너지기까진 단 15분. 이곳에서 피해야 했다.
“작전은 알지?”
“저는 얌전히 붙어 있겠습니다.”
“나만 고생이지, 나만.”
칼립소가 여름 파도처럼 생긋, 시원하게 웃었다.
“다신 땅에서 기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려.”
칼립소가 이렇게 말하는 동시에 가모라는 머리에서 느껴지는 거대한 충격과 함께 자신의 의식이 꺼지는 걸 느꼈다.
아, 안 돼. 안 돼…….
자신의 ‘주군’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어라.
‘주군’? 그게 누구지?
가모라가 눈을 감았다. 완전한 기절이었다.
* * *
쿠르릉.
땅이 진동했지만 우리 중 누구도 당황하지 않았다.
“각자 다들 역할은 기억하겠지?”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용 공작을 향했다.
“당신도, 잠깐은 견뎌 봐.”
이번 작전에 용 공작을 데리고 다닐 수는 없어서 아틀란에게 잠시 맡길 예정이었다.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뒤에 아틀란도 뒤이어 활개를 칠 터.
남자는 어쩐지 침울한 표정을 지었지만 거부하지는 않았다.
그게 짠하게 느껴져 움찔했다가 이내 남자의 손을 잡았다.
“당신 기억, 꼭 돌려줄 테니까. 울지 말고. 다시 봐.”
“……다시 보면, 그땐 이름을 불러도 되나?”
“뭐……. 그래.”
우리는 서로 다음 지점을 기약한 뒤 흩어졌다.
‘자, 대부분은 빠져나가지 못한 채로 쓰러질 테고.’
일부러 자폭장치 가동 시에 적도 아군도 쉽게 빠져나가지 못하게끔 미로같이 만든 곳이었다.
나는 아무런 어려움 없이 이곳을 슥슥 지나갔지만.
‘대장을 찾아야 한다. 그놈이 갖고 있을 리니어스를 찾아야 해.’
나는 움직이다 말고 멈칫했다.
모종의 이유로 나를 따라나선 레바이 또한 숨을 살짝 몰아쉬며 멈춰 섰다.
“뭐야, 지하실에서 사람이 대거 나오네?”
기묘했다.
‘지하실이면 보통 포로를 가둬 두는 곳이었지?’
“레바이, 일단 저곳부터 가자.”
“네? 꼭대기가 아니고요?”
“뭔가 기분이 이상해.”
왜일까, 저길 꼭 가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포로는 풀어 줘야 하니까 들르려고도 했지만.
“조사에 따르면 저놈들이 따로 잡아 둔 포로는 없을 텐데요?”
“그래도. 가야 할 것 같아.”
뭔가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보통은 이런 감을 놓치지 않는 게 중요했다.
인간들이 모두 빠져나간 뒤라 지하실은 텅 비어 있었다.
천장에서 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5분 내로는 여기서 일을 끝내야 해.’
나는 차분하게 계산하며 지하실을 살피다가 멈칫했다.
“가주님?”
남아 있으랬더니 기어이 쫓아온 레바이 또한 함께 멈칫했다.
닫혀 있는 감옥 속, 일렁거리는 불꽃이 마치 파도처럼 느껴졌다.
나는 숨을 삼켰다.
안쪽에는 단 한 명의 포로가 있을 뿐이었다.
찰나의 침묵 사이, 입을 연 건 레바이였다.
“혹등……고래?”
어떻게 저 피투성이가 된 모습에서 혹등고래임을 알아본 걸까.
이를 물어볼 새는 없었다.
나 또한 똑같이 느꼈으니까.
혹등고래 수인이다.
그리고……. 세월이 얼마나 흐른들, 이런 식으로 처참하게 변했다 한들 어떻게 널 알아보지 못할 수가 있을까.
나는 레바이가, 아끼던 다른 수하가. 저 자리에 있었더라도 알아봤을 것이다.
“……하우저.”
그리고 똑같이 분노했겠지.
‘진정해. 진정하자.’
황무지를 누비며 약한 수인을 도왔다던 혹등고래 수인.
그건 역시 하우저였던 것이다.
하지만 어째서?
왜 상어들에게 붙잡혀 여기 있단 말인가?
피투성이가 된 모습은 심상치 않았다. 아니, 숨을 쉬는 게 다행일 정도였다.
‘살아 있어. 그럼 된 거야.’
숨만 쉬고 있다면, 분명 웨일이 살릴 수 있다.
우린 이제 무력하게 죽지 않아도 돼. 그러니까…….
눈앞의 시야가 잠시 현재인지 3회차의 전쟁 한복판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괜찮았다.
더 중요한 게 눈앞에 있으니까.
나는 어깨가 미약하게 움직이는 것을 똑똑히 확인한 뒤 힘을 주어 창살을 구부렸다.
“가주님! 기둥이 무너집니다!”
“알고 있어!”
“저는 이걸로 문을 지지해 놓고 있겠습니다.”
“조금만 버텨! 난 쟬 데려갈 테니까.”
레바이는 왜 내가 대뜸 저 혹등고래를 데려가는지 묻지 않았다.
나는 창살 사이로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만든 뒤 손날로 아무렇지 않게 철사를 끊었다.
‘에키온이 있었다면, 물의 힘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시간제한이 있는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아쉬웠다. 기억을 잃은 뒤로는 어렵게 되었으니까.
‘역시 하우저…… 네놈 맞구나.’
나는 족쇄를 찬 하우저를 쌀가마 이듯이 어깨에 둘러멨다.
미안하지만 불편해도 참아라, 수하놈아.
‘넌 눈 뜨면 뒤지게 맞을 줄 알아라.’
평범하게 살라고 찾지도 않았더니, 이따위로 죽어 가고 있어?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계단을 올랐다.
“가주님, 이쪽!”
나는 잠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분명 이 요새의 대장은 꼭대기에서 내려오고 있을 터인데…….
이 요새는 뛰어내릴 수 없게 만들어 두어, 자폭 뒤엔 누가 됐든 계단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입 안을 잘근 깨물었다.
포기는 빨랐다.
‘리니어스는 포기한다.’
그 무엇도 사람의 목숨만큼 가치는 없다.
게다가 내 수하들의 목숨이라면 더더욱.
“출구로 나가!”
“……네. 이쪽입니다!”
레바이는 내 선택을 알아차린 건지 나보다도 복잡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쩌겠어. 물의 힘이 아깝긴 하지만. 요새가 무너진 뒤에 쓰레기라도 뒤져 보지 뭐!
의도치 않게 하우저를 구출한 데다가 중간중간 달려드는 상어놈들을 마주한 탓에 우리는 정말 아슬아슬하게 요새를 벗어났다.
무너지는 여파가 미치지 않는 곳까지, 꽤 멀리.
“하아, 하아. 다신, 달리기시키지, 윽, 마십…….”
“까고 있네. 내가 둘이나 이고 달렸거든?”
“연약한 돌고래에게 이런 걸 시키지 마셨어야지요!”
“웃기고 있다? 지하실 앞에서 기다리랬더니 따라온 게 누군데!”
“허억, 제가 없었으면 지하실에 나란히 갇혀서 미이라가 되셨을 겁니다!”
레바이는 숨을 거칠게 내쉬면서도 따박따박 말대꾸를 해 왔다.
나도 간만에 정신이 지친지라 앉아서 멀거니 앞을 보았다.
분명 거대했던 요새가 한번에 무너지고 있었다.
‘허어.’
저거 거대한 쓰레기 더미가 되겠는데. 저기서 리니어스를 찾을 수 있나?
“둘째는 잘 나갔겠지?”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물의 힘도 있으신 것을.”
“하긴.”
나는 한숨을 쉬며 하늘을 보았다. 그러고는 얼른 고개를 홱 돌렸다.
“쉬었으면 일어나. 당장 돌아간다.”
“네?”
“살려야지, 쟤.”
색색 미약한 숨을 내쉬는 하우저를 복잡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수하야, 제발 너도 악당이 되었다는 엔딩만 아니면 좋겠는데.’
그 순간 하우저의 눈꺼풀이 가늘게 진동하더니. 천천히 눈이 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