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4화
황무지.
바다 근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다. 하지만 이 근처의 땅은 척박하다 못해 바닷바람마저 거센 곳이었기에.
이렇게밖에 부를 수 없는 공간이기도 했다.
‘몇 번이고 왔던 곳이지만.’
나는 메마른 땅을 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상어놈들의 근거지를 모두 척결한 뒤엔 여기 사는 이들을 아콰시아델 영지로 이주시킬 생각이었다.
3회차에서도 했던 일이기에 한 번 더 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지금까지 하지 못한 건, 바로 이주시켰다간 그사이에 섞여 들어온 상어놈들이 영지 내에서 난동을 부릴 것을 알기 때문이고.
‘잘됐지 뭐.’
힘겹게 살아가는 이들을 위해서라도 빠르게 처리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아게노르는 대체 왜 가주씩이나 돼서 홀로 돌아다니는 걸 고집하냐고들 하는데.
사실 이곳을 돌아다녀 보면 이쪽이 훨씬 편하다.
게릴라전을 펼치는 놈들 상대로 군대를 끌고 다녀 봐야, 내가 지킬 놈들만 늘어날 뿐.
‘게다가 물의 힘을 쓰지 못하는 지금은 다수를 지키는 덴 물리적 한계가 있으니 말이지.’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이번에 갈 근거지에서 부디 그 리니어스를 가지고 있다던 대장 놈을 족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야, 가주님.”
고개를 돌리면, 삐딱하게 선 아틀란이 보였다. 나처럼 편안한 여행복 차림이었다.
“저기 저, 허약하기 짝이 없는 돌고래놈을 데려가는 것도 다 이해하겠는데 말이야…….”
“누가 허약합니까?”
아틀란은 레바이의 불평을 무시하며 말했다.
“대체 저놈은 왜 데려온 거냐?”
우리 쪽 사람은 총 셋.
나와 둘째놈, 그리고 레바이였다.
이렇게 될 예정이었지만…… 내 옆에는 마찬가지로 여행복 차림을 한 용 공작이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럼 텅 빈 집에 두고 가?”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틀란은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용 공작 주변을 맴맴 돌았다.
“이놈, 정말로 기억 잃은 거 맞아? 그냥 잃은 척하는 것 아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할 시간에 지도나 더 보든가.”
그러나 나는 내 말에도 지그시 쳐다보는 둘째놈 시선에 못 이겨 들고 있던 지도를 내렸다.
“이놈…… 몇 가지만 빼면 전과 똑같은 것 같단 말이지.”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못 들은 척하려다 고개를 들고 심드렁하게 말했다.
“내가 긴 시간 동안 에키온의 존재를 외부에 드러내지 않은 건,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중 가장 컸던 건. 에키온 스스로 보호할 능력이 없어서였어.”
제아무리 주변에 강력한 호위를 둔다고 해도, 틈은 생기기 마련이었다.
에키온은 성장하면 다를 거라고 그랬고, 내 생각도 비슷했다.
“지금은 성장한 데다가 불안정하긴 하지만 힘도 쓸 줄 알아.”
사실 불안정해서 떼어 놓기 어려운 거지만.
“무엇보다 나랑 떨어지면 안 된다잖아.”
현재 에키온의 몸을 차지한 초대 용의 조각이 틈만 나면 남자에게 용의 도시로 가자고 속삭인다나.
“내가 옆에 있어야 유령 같은 목소리가 안 들린다는데 어쩌겠어.”
“…….”
“맹세까지 했잖아.”
도대체 뭐가 불만이냐는 말에 아틀란이 그제야 슬쩍 물러났다.
인정했다기보다는 내가 슬슬 주먹을 들 것 같아 피하는 것에 가까울 터다.
“당신도, 오래 걷는 거 괜찮은 거 맞아? 조금이라도 몸이 이상하면 말하고.”
끄덕.
남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잠시 머뭇거리더니 물었다.
“계속 나를 그렇게 부를 건가?”
“뭐가.”
나는 시치미를 뚝 뗐다.
그사이 나직한 목소리가 우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제 다시 브리핑을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오냐.”
아틀란이 이를 부득 갈며 물의 힘을 일으켰고, 둥실 떠오른 물이 거대한 지도를 잡고 허공에 띄웠다.
“저희가 갈 도시는 여기서 삼 일쯤 떨어진 이곳입니다. 다들 이름이야 잘 아시겠지만 말입니다.”
레바이가 지도 곳곳을 짚으며 지름길과 우리가 앞으로 잠시 쉬어 갈 공간을 하나씩 짚었다.
레바이의 브리핑이 끝난 뒤 우린 다시 짐을 이고 출발했다.
그렇게 약 하루가 흘렀을 즈음.
중간에 들를 마을이 어디인가 살펴보고 있던 중 둘째놈이 나를 불렀다.
“사람이 쓰러져 있다고?”
“어.”
함께 가 보니, 과연 웬 거적때기 같은 것이 쓰러져 있었다.
지저분한 먼지로 가득했는데, 이 황무지에서 꽤 오래 돌아다닌 티가 났다.
“빈민 아니야?”
“황무지에 정착한 유목민일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 유목민이란 게 있냐? 그냥 상어들 피해서 도망가는 인간들이겠지.”
각자 한마디씩 하는 동안, 쓰러져 있던 이가 움찔 움직였다.
그러더니 눈을 스르륵 떴다.
그 찰나 나는 멈칫했다.
‘황금색 눈?’
그러나 다시 눈을 깜빡이면, 황금색은커녕 평범한 녹색 눈동자였다.
왜 기분 나쁠 만큼 선명한 황금색을 본 기분이 들까.
성인이 된 내 감각은 이미 완성 단계이고, 웬만해선 착각을 하지 않을 텐데.
하지만 막 눈을 뜬 인간에게선 이상하리만치 불길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누, 누구십니까……?”
나는 흘끗 둘째놈을 응시하고는 픽 웃었다.
“이야, 둘째야. 너나 내 머리카락을 보고 이렇게 묻는 놈은 오랜만이다. 안 그래?”
“뭐…….”
제아무리 황무지에 사는 약한 수인이라도, 범고래들의 특징은 한눈에 알아본다.
우린 유달리 눈에 띄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정신을 차리는 데 잠시 시간이 필요했는지, 쓰러져 있던 남자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버, 버, 범…….”
그러나 일어나려는 남자를 콱 밟은 사람이 있었다. 의외로 레바이였다.
“주인님, 이놈 그놈들입니다.”
레바이가 제 목을 톡톡 두드렸다. 나는 살짝 찌푸렸다.
“너 호칭이 왜 그러냐?”
“그럼 뭐라고 부릅니까.”
가주라고도 못 하고 이름도 밝히기 꺼림칙하다 이건데. 그래도 주인님은 좀…….
“아, 취향이십니까?”
“왜, 취향이라면 평생 불러 주게?”
“…….”
나는 씩 웃고는 레바이 발에 밟힌 놈을 보았다.
우리 연약한(?) 책사님 발에 밟혀 덜덜 떠는 남자 목 옆으로 과연.
문신같이 세 줄이 보였다.
모든 상어 수인들의 특징이었다.
“상어 새끼가 혼자 돌아다니는 꼴을 다 보네?”
“죽여?”
“자, 자, 잠깐만요!”
나는 손을 들어 둘째놈을 제지했다. 그러고는 용 공작을 향해 잠시 물러나라 신호한 뒤 다시 상어 수인을 향해 섰다.
“죽기 전에 유언은?”
“자, 잠깐, 잠깐. 드릴 마,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그래. 네 잘못을 들어 주는 시간 3분 정도는 줄 수 있어.”
이곳을 돌아다니는 상어는 백 퍼센트 약한 수인을 괴롭힌 일파들이다.
“저, 저는 자수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음?”
“저, 정말입니다.”
상어 수인의 말인즉 이러했다.
자신의 근거지에서 정말이지 끔찍한 일을 목격했고, 더는 참을 수 없어서 도망가다가 붙잡혀 흠씬 두들겨 맞고 버려진 거라고.
확실히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였다.
‘왜일까, 영 신뢰가 안 가는데?’
“바, 바다의 맹세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어 수인이 이렇게 말하자 마찬가지로 험악해졌던 둘째놈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그만큼 수중 동물 수인들에겐 절대적인 맹세였다.
그 누구도 맹세를 어겨 목숨을 허망하게 잃고 싶진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상어 수인은 맹세를 끝낸 뒤 사정을 읊기 시작했다.
“사, 상어들이 미쳤습니다. 아니, 제가 속한 일파 모두가 미친 겁니다……!”
“뭔데 그래? 본론만 말해, 본론만.”
“상어들이…… 육지 동물 수인들과 손을 잡았습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린 서로를 응시했다.
‘허어?’
지난 회차에 이런 일이 있는가 하면……. 없었다.
워낙 바꿔 버린 것이 많았기에 이것 또한 바뀐 미래인지는 모르겠지만.
모르고 진입하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확실히 쓸모 있는 정보긴 한데…….’
왜 찝찝할까. 바다의 맹세까지 했으니, 믿어야 할 텐데 말이다.
내가 눈짓하자 레바이가 발을 들어 올렸다.
둘째놈이 눈치 빠르게 상어 수인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히이익……!”
“그래, 네 말이 사실이라면 말이야. 너, 안내할 수 있겠지?”
“네, 네?”
“하라고, 안내.”
네 거주지로 말이야.
내 말에 상어 수인은 사색이 됐지만, 끝내 거절하진 못했다.
죽는 것보다야 이게 더 나을 거라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아틀란에게 상어 수인을 잠시 맡겨 둔 뒤 돌아서서 걸어가는데.
내 곁으로 조용히 남자가 다가왔다. 고개를 들었다가 잠시 멈칫했다.
기묘한 갈망이 어린 눈동자.
용 공작은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귓가에 속삭였다.
“……믿지 마라.”
상어 수인이 수상하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그건 내가 가장 느끼고 있는 바였다.
“알아. 하지만 맹세로 목숨을 담보로 걸었으니까. 일단 지켜볼 거야.”
“아니, 그것마저 믿지 말란 소리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수중 동물 수인들에게 바다의 맹세는 절대적이다.
하지만 용 공작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는 듯, 잠시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찌푸렸다.
이런 용 공작을 보고 있으려니 생각나는 바가 있었다.
상어 수인이 눈을 뜰 때 보았던 ‘금색 눈동자’.
“혹시…… 당신도 봤어? 저 남자가 눈을 뜰 때. 금색 눈동자였던 거.”
금색에도 종류가 있다.
그리고 내가 보았던 기분 나쁠 정도로 진하고 탁한 금색, 그리고 약간의 주황 기가 도는 금색은 여태껏 단 한 종의 이들밖에 보지 못했다.
바로, 사자.
황실 놈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