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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213화 (213/275)

제213화

벨루스는 서릿발 같은 낯에 고민을 틔우더니 이내 다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용 공작의 기억상실을 알고서 줄곧 냉정하던데.”

“이성적이지 못할 이유가 있어?”

내게는 익숙한 일이다. 죽고 나서 눈을 뜨면 모두가 날 기억하지 못했는걸.

“……이성적인 것과 냉정한 건 달라.”

나는 첫째 오빠의 눈에 서린 조그마한 것을 깨달았다.

“주제넘은 소리일지도 모르겠어. 가주님.”

“…….”

“왜 그리 화가 난 거야?”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

벨루스와의 대화를 위해 내 방과 붙어 있는 옆방으로 잠깐 온 상황이었고.

자연히 방에는 나와 첫째 오빠 둘밖에 없단 소리였다.

숨소리만 들리는 방은 고요하기만 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난 매우 멀쩡한데.”

“아니라면 좋겠지만. 애석하게도 우린 너무 오랜 시간을 봤지.”

“…….”

나는 팔짱을 꼈다. 한번 해 보라는 듯이.

“내 여동생.”

수하로서가 아니라 내 핏줄로서 한마디 하겠다는 소리기도 했다.

“너는 진정 화를 낼 땐 찌푸리는 대신 표정이 더욱 없어지거나 웃어. 속은 철저하게 냉정해지지.”

“그러지 않는 범고래도 있나?”

“넌 좀 지나친 편이지. 그래서 가끔 스스로도 네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알아차리지 못했잖아? 지난 생, 그 혹등고래가 죽었던 날처럼.”

“…….”

한마디에 연상 효과처럼 기억 하나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기억을 곰곰이 반추해 보다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얌전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나 참 두 번의 생을 함께한다는 건 이런 게 불편하네.”

“나만 알아차린 건 아니야. 아틀란이 온다는 걸 내가 말렸으니까.”

“아, 그건 잘했어.”

아틀란은 분명 벨루스처럼 차분하게 알려 주는 게 아니라 더 투박한 말을 했을 것이고.

한 대 얻어맞았을 게 분명했다.

“지금은 힘 조절이 어려울지도 모르거든.”

나는 인정하는 것 하나는 빨랐다. 어찌 보면 군주에게 필요한 덕목이기도 했다.

내가 잘못된 건 빠르게 인정해야지.

“네 말이 맞아. 난 지금 화가 정말 많이 났어.”

“그놈이 기억을 잃은 게 그토록?”

“그래. 그렇네.”

참으로 놀랍게도 말이지.

나는 잠시 창문을 보았다.

“벨루스. 저기 밤하늘 보여? 내가 갔던 시간의 틈은 저 밤하늘에서 별조차 없는 암흑의 공간이었어.”

“…….”

“나는 장장 3년간 조그마한 모닥불 같은 걸 피워 두고 에키온과 그 시간을 보냈어.”

때론 평화롭고 소소하고 행복하기도 했지만 때론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날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 앨 원망한 적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이 말이야. 거기 있으면서 용에 대해서 알게 된 것들이 꽤 많았지.”

뭐. 중요한 건 이게 아니고.

“에키온이 성장하면, 그 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

“…….”

“그걸 지금 바로 하지 못하게 된 게 화가 많이 나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지금은 방도가 없는걸. 그러니 해결해야지. 저 애가 다시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나는…… 네가 용 공작에게 보내는 드넓은 인정을 가끔은 이해할 수가 없어.”

“왜, 우릴 죽였으니까? 그게 폭주로 인한 것이었다 해도?”

“…….”

“에이, 그렇게 따지면 난 지난 생에서 내가 힘들 때 외면했던 세 오빠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빠를 원망해야 돼. 벨루스.”

“…….”

“우리 범고래들이 평화롭게 시작하지 못한 건, 다 이런 인정과 용서가 없었기 때문 아니겠어.”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야기가 길어졌지만. 고마워. 덕분에 머리가 깨끗해지네.”

벨루스는 할 말이 많아 보였지만, 입을 꾹 다무는 쪽을 택했다.

대신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 방을 비웠다.

텅 빈 방에 가만히 서 있다가 나는 내 방으로 다시 넘어갔다.

마치 나만 기다리고 있었다는 양 남자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아니, 문을 여는 순간부터 이곳을 보고 있었으니.

“저기, 내가 옆방에 있는 동안에도 줄곧 문만 보고 있던 거야?”

“……그래.”

그렇군. 나는 성큼 걸어가 남자의 옆에 털썩 앉았다.

편안한 소파 위에서 몸이 느긋하게 늘어졌다.

“뭐 하러 그랬어. 어차피 다시 이 방으로 돌아올 건데.”

“정말로 돌아오나?”

“응?”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랬다.”

묘한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렸다.

“내 얘긴 아니고 지금 내게 지식을 주는 ‘용’의 이야기다. 용들은 늘 반려보다 오래 살아. 인생의 반은 기다림 속에서 살아간다는데.”

나는 가만히 이야기를 들었다.

나열하자면 용들은 수명이 길다 보니 반려로 삼은 이들이 죽고 나면 그리움 속에서 오래도록 죽음만을 기다리며 산다나.

“그냥 네가 사라지고 난 뒤 어쩐지 무언가 텅 빈 것 같은 기분이 들던데……. 그게 조금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건 외로움이라고 하는 거야.”

나는 차분하게 알려 주었다.

“사실 에키온이 성장하면 더는 눈치 보지 말고 성에서 자유롭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도 좋다고 하려 했는데 말이지……. 그 말을 할 시간이 요원해졌네.”

“…….”

“좀 냉정하게 굴어서 미안해. 화풀이였어. 그 애는 좀 내게 의미가 큰 아이거든. 못 본다고 생각하니 힘들었나 봐, 나도.”

날이 밝으면 나는 지체하지 않고 나머지 상어 근거지를 부수러 나갈 것이다.

턱을 괸 채 싱긋 웃었다. 이번엔 분노 없이, 평온한 미소였다.

“또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봐.”

남자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찬연한 금빛 눈동자였다.

파충류의 것 같이 길다란 동공을 보고 있노라면 조금 홀릴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궁금한 것, 있다. 조금 전 내가 느낀 게 외로움이라고 했는데.”

“응. 그런데?”

남자의 손이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이번에도 내버려 두었다.

“네가 줄곧 내게 많은 걸 알려 주었다면. 이것도 알려 주겠나.”

남자가 내 손을 잡고 가져다 댄 곳은 가슴이었다.

나도 모르게 흠칫했다.

잠깐만, 내가 아무리 화통하다지만 또래 가슴을 만지는 건 조금…….

얼떨떨한 기분에 손을 빼려는 찰나, 손끝으로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빼지 못한 건 세차게 뛰는 박동 때문이었다.

너무 빨랐다.

“…….”

내 심장에까지 전이될 것 같은 거대한 박동과 빠른 속도.

“눈을 떠 너를 본 순간부터 이렇게 되었다.”

“…….”

“인간들은, 이것을 무어라 부르지?”

뭘 당황하는 거야.

에키온이 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나를 특별하게 여긴다는 사실은 이미 9년 전부터 알고 있지 않았던가.

게다가 나를 반려 자리에 앉혀 두었단 말도 하지 않았나.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킨 건 간절하게 바라보는 남자의 얼굴 때문이었을 것이다.

‘살면서 얼굴에 홀려 본 적이 거의 없는데 말이지…….’

“이거 아주 요물이네.”

“…….”

나는 찌푸리면서도 손을 떼어내지 않았다.

3년이란 시간의 틈에서 에키온이 어떤 모습이 될까 상상하면서 조금 기대를 했더랬지.

네가 장성한 모습은 아마도 내 취향일지도 모르겠다고.

“이거 그냥 심장이 고장난 거야. 어디 아픈 것 같은데 의원을 불러 줘?”

“…….”

남자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느껴졌다. 갈망마저 일렁이는 눈동자를 보다가 나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내 말이 가시가 되어 박혀 왔다.

구해 준 건 책임이 따른다.

그러니, 나는 이것을 알려 줄 의무가 있으므로.

“사랑이야.”

“…….”

“넌 날 사랑하는 거야.”

에키온 난 말야, 네가 직접 이 말을 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했는데.

넌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날 두고.

* * *

다음 날.

나는 일찍부터 일어나 곳곳을 돌아다니며 무기며 인선들을 체크했다.

“아틀란과 레바이는 나와 함께 움직이고. 다른 쪽은 벨루스 네가 웨일, 리리벨과 함께 움직여.”

리리벨이 우아하게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만, 왜 내 쪽에 치료사를 붙여 주는 거야?”

“왜긴. 네가 제일 뱀장어처럼 날뛰니까. 확률적으로 필요할 가능성이 높을 거 아니야.”

“허, 아틀란 저놈은?”

“그건 아틀란을 이기고서 얘기하면 다음부턴 바꿔 줄게.”

리리벨은 병을 회복한 이후부터 오히려 더 싸움을 난폭하게 하는 기질이 생겨 버렸다.

격하게 움직여도 더는 아프지 않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듯이.

고쳐지지도 않아서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내버려 두고 있었다.

“아빠가 너희 쪽 방향으로 시찰 갈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

“흥, 걱정 같은 건 안 했거든?”

아빠는 계획상 잠시 근처 도시로 이동하기로 했고, 가문은 아게노르가 지키게 되었다.

“이번에 썩은 때들을 다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네. 몸들 적당히 사리고.”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로 상어 거처를 세상에서 지워 버리도록.”

황성과 싸움을 위한 마지막 전초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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