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2화
서로 진지할 것 없는 농이 오갔다.
“걱정 마라. 신랑은 약혼식에서 처리될 거다.”
“내가 그렇게 두겠어?”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빠, 몇 달 전엔 웨일을 두고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 지금은 유치한 이야길 할 때가 아니잖아.”
“앞으로 유치한 사람이 되어 줄 용의가 충분하지.”
“진지한 얼굴로 장난하지 말고.”
나는 어설프게 웃었다가, 후 숨을 내쉬었다.
“레바이. 네가 말한 것 말인데, 저 남자의 기억이 유무는 우리 계획과 무관하지 않아.”
“질문 있어. 뭐가 무관하지 않은데, 가주님?”
질문은 리리벨 쪽에서 나왔다.
리리벨은 새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용 공작이 기억 잃은 건 놀라운데 말이지. 이게 이렇게 심각하게 다뤄질 이야기야?”
“정말 내 가족이랑 수하들은 참 서로에게 냉정하구나. 기억을 잃고 아기 새처럼 떨고 있는 동료를 향해 그게 할 말이니?”
“……누가 뭐처럼 떤다는 거야? 아기새면 새 새끼? 새똥 냄새난다고?”
“저런.”
우리 애들은 참 육지 동물만 떠올리면 부정적이구나.
“제일 냉정한 게 누군데.”
“둘째야, 혼잣말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란다.”
나는 살랑 손을 흔들었다.
어라, 손을 흔들었을 뿐인데, 내 손에 쥐여 있던 장식품이 둘째놈에게로 날아가 버렸네.
“으악! 무슨 짓이야! 그리고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거다! 가주님, 네가 이따위로 구는데 우리 인성이 좋길 바라다니 양심이 있냐!”
“아주 옳은 말이야. 한 대 더 맞아라.”
개개인의 개성이 더 도드라지기 전에 나는 얼른 손을 반쯤 들어 올렸다.
이 상황에서도 남자는 홀로 고요했다.
‘성장하고 더 조용해졌네.’
이런 점은 아빠와 비슷했지만 조금 달랐다. 아빠에게 체념에서 나온 초연함이 있었다면…….
이 남자는 군중 속에 의연하게 앉아 있되, 홀로 있는 것처럼 외로워 보였다.
왜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처럼 보이는지. 투스가 없어서 더욱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용의 힘이 불안정해.”
조금 전 테라스에서의 일로 알았다. 시간의 틈에서 나온 에키온은 적어도 힘이 불안정해 문제를 일으킨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성장하여 기억을 잃은 남자는 힘이 불안정했다.
“저기, 난 뭐가 심각한 건지 모르겠는데. 누구 알려 주실 인간?”
리리벨의 삐딱한 목소리에, 아게노르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답했다.
“알면서 묻지 마. 용이 불안정하면 세상이 멸망할 수도 있다잖아.”
그 멸망을 겪은 자, 아틀란과 벨루스만이 고요히 멈칫했다.
나는 정리하듯 손을 홰홰 저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계획을 앞당겨야겠어.”
“기억을 되찾아주는 게 아니라 계획을 당기신단 말입니까?”
“어떻게 되찾아줄 건데? 기억나게 만드는 추억 찾기나 할까?”
“…….”
“그런 걸론 소용없어. 내가 제일 잘 알아.”
나는 안다. 에키온의 짧은 생에서 가장 가치 있던 유일무이한 존재는 나다.
하지만 그런 내 이름조차 모른다.
그러니 단순히 지구의 소설이나 드라마처럼 추억을 반추한다고 한들 다시 깨어날 상황이 아니란 거다.
이건 감이기도 했다.
“용의 도시로 가고 싶어 하는 걸 봐서는 그곳에 뭔가 해결할 방법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하지만 용의 도시는 지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지.”
현재 용의 도시는 우리가 9년 전에 다녀왔을 때와는 전혀 달라진 모습일 터다.
육지 거북 수장이 어떻게든 막았겠지만, 그 홀로 황실의 수작을 막을 수는 없었을 터다.
한계가 있었겠지. 도시 곳곳이 지뢰밭이라 봐도 무방하다.
함정으로 가득한 도시.
함정인 걸 알면서 들어가 줄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용의 도시에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도록 만들면 돼.”
함정이 가득한 도시에 안전하게 갈 방법은 무엇인가.
바로.
함정을 만든 놈들을 족치면 된다.
“우린 예정보다 수도로 더 일찍 간다.”
내 말에 모두가 고요해졌다.
지금까지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은 일리아나, 눈치를 보던 청어들의 수장.
그 밖에 내게 충성을 맹세한 가문들이 고요하게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이야, 이거 폭군 아닌가. 어째 반대를 하는 놈이 하나도 없어?”
시선을 돌리면 아틀란이 히죽,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말은 하등 반항적인 주제에 누군가 반대 의견이라도 냈다간 그대로 죽일 듯한 시선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저 지나친 과잉 충성엔 웃음이 나왔다.
“어차피 지금도 오래 버틴 거야.”
황실은 결국 이곳까지 찾아왔다. 용 공작이 이곳에 있다는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은 찾아내지 못했지만.
시간문제일 것이다.
오래 버틴 거지.
나는 고개를 들어 모두를 돌아보았다.
“수도엔 황실이 있다.”
모르는 자가 없는 말을 툭 뱉은 건 다음에 이어질 말을 위해서였다.
“그 노린내 풀풀 날리는 놈들은 간악하고 치밀하며 인내심 또한 넘치는 새끼들이지.”
“…….”
“폭력적이고 치밀한 자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 또한 치밀해질 수밖에 없다.”
그게 내가 긴 잠에서 깨어나 내세운 서브 목표였다.
“황실을 치기 위해선 내실을 다져야 한다. 그러니, 가장 골칫덩어리인 상어들을 해치우자, 가 가주님께서 내린 첫 명령이셨지요.”
레바이가 조용히 받아쳤다.
이미 이들 사이에서는 암묵적으로 계승이 이루어진 뒤였다.
정확히는 아빠가 임시로 맡아 줬을 뿐인 자리를 내가 다시 가져온 거지만.
“그래. 남은 거점은 둘. 결정했어. 우린 여길 한 번에 공략한다.”
“하지만 준비된 여건보다 부족한 부분은 어떡하려고 하십니까?”
“둘로 나눠.”
내 말에 손을 든 사람은 침묵하던 벨루스였다.
“가주님, 알고 있겠지만 이 가문엔 아직 엉뚱한 생각을 하는 놈이 남아 있어. 둘로 나눠서 출정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거다.”
“알아. 일부러 남겨 둔 거잖아?”
“그럼에도 뜻엔 변함이 없다는 거지?”
“맞아.”
벨루스가 끄덕였다. 곧 첫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가주님의 뜻대로.”
* * *
회의가 끝나고 나름 파티랍시고 생일 초를 불긴 했으나, 지난 생일과 비교하자면.
상당히 짧고 굵게 끝났다.
아쉬워하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명령에 어쩔 수 없다는 듯 돌아갔다.
“성인식은 추후에 제대로 치르시면 되니까요.”
“맞아요, 칼립소 님!”
아쉬운 한편 다음을 기약하며 사라진 이들에게 고맙기도 하고 조금은 미안하기도 했다.
기대 많이 한 것 같던데. 다음엔 더 큰 파티를 열어 줘야 하나?
아빠마저 겨우 돌아갈 즈음, 누군가 마지막으로 남아 있었다.
본래라면 아쉬워하면서도 방을 나서야 했을, 첫째놈이었다.
현재 가문에서 아빠를 제외하고 제일 바쁠 놈일 텐데.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다.
“할 말 있어?”
“그래.”
서늘한 표정이 날 보는 순간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무슨 생각인지 다소 얼굴이 굳어 있기도 했다.
“왜, 이제 와 내 결정에 불만이라도 생긴 거야?”
“그런 건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게다가 넌 합리적인 결정을 했어. 이미 황실은 아콰시아델 내부에까지 첩자를 보내고 있으니까.”
정식으로 공표되지 않았을 뿐, 황실은 이미 용 공작을 쫓기 위해 혐오하던 이 땅에까지 사람을 풀었다.
잠입하기 위해서 우리 쪽 기사를 암살하거나 요인을 암살하고 특수한 능력으로 변장하여 차지하는 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아빠가 가주 자리를 차지한 이유 중 하나는.
낮은 가능성이지만 황실 쪽에서 갑작스럽게 싸움이라도 걸어 올라치면.
아빠가 가주로서 상대하는 한편, 나는 에키온을 안전하게 숨겨 놓고 놈들의 뒤를 칠 생각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굳이 가주 위에 올라서 이 모든 걸 지휘하지 않는 이유.
‘내 주변에 나 말고도 이전 생을 기억하는 놈이 있다.’
과연 그런 놈이 저 흑표범과 사자놈들 사이엔 없을까?
3회차에서 용 공작을 어떻게 다뤄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 에키온을 감금시켜 놓았던 모습이 마음에 계속 걸렸다.
1회차에도, 2회차에도 흑표범들이 이런 짓을 했다면 내가 아주 모를 수는 없었을 텐데.
“그래. 결정에 대한 불만이 아니라면, 뭔데?”
나는 생각을 드러내지 않은 채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