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11화 (211/275)

제211화

내 물음을 들은 금빛 눈동자가 오묘한 것을 띤 채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은 뭐야?”

“나를 함부로 대하기로 마음먹은 건 그것 때문인가 해서 봤다. 주먹을 뻗을 때부터 뭔가 변한 것 같기에.”

“비슷해.”

내가 이 애를 진짜 에키온으로 생각했다면 주먹을 뻗지 않았을 터다.

남자는 기억을 잃은 사람치고는 유달리 침착했다. 게다가 싸우면서도 용의 도시로 가고 싶어 하는 모습까지.

어쩌면 성장한 에키온의 몸에 뭐가 씐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환생자도, 회귀자도 있는데. 빙의자가 없을 건 또 뭐람.

에키온은 내게 깔린 자세임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조용하게 말했다.

“애석하게도 난 네가 아는 그 존재가 맞을 거다.”

“그래? 예뻐해 달란 소리를 깜찍하게 하네, 성장한 용용아.”

“…….”

에키온이 당황한 분위기를 내는 동시에 다시 말을 이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남자 또한 내가 자신의 말을 전혀 믿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린 듯했다.

잠시 이놈의 멱살을 쥐고 바닥으로 뛰어내려 조용한 곳으로 갈까 싶었지만.

‘안 돼. 주변에 보초가 쫙 깔렸다.’

손님이 잔뜩 모이는 날이니만큼, 할머니 대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기사들을 아주 많이 풀었다.

예전처럼 약육강식 운운하면서 대놓고 힘이 약한 수인 가문을 핍박하는 일이 없도록 예방하기 위함이었다.

그런 일이 일어났다간 가만두지 않겠다는 아빠와 내 호령도 일찍이 있었고 말이다.

그러니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조용히 대화할 수 있는 곳은.

여기서 멀리 떨어진 아빠의 저택이 아닌 한. 차라리 이 테라스가 낫다는 소리다.

‘누군가 온다면 내가 알 수 있으니 말이지.’

이미 감각을 예민하게 세운 상황이었다. 곧바로 어떤 기척이든 알아채기 위해서.

전투로 인해 더욱 날이 선 상황이기도 했다.

남자는 내가 더는 움직이지 않을 거란 걸 일찌감치 깨달은 눈치였다.

눈치가 빠르다.

게다가 30분간의 전투를 생각하면 따로 전투를 배운 몸짓이 아님에도 전투에 능숙하다.

무슨 말이냐고? 나도 잘 모르겠지만 솔직한 감상이 이렇다.

굳은살이 배인 손이 아닌데, 검을 잘 쓰는 검사를 본 기분이랄지…….

내 눈이 날카롭게 벼려졌다.

생각할수록 더욱더 남자를 향한 경계가 커지는 중이었다.

포기한 남자 쪽에서 입술을 떼었다.

“이동은, 할 생각이 없는지 묻고 싶은데…….”

“없어. 그대로 이야기해.”

“가깝지 않나?”

“이를 어쩌면 좋아. 용용이는 나랑 붙어 있는 걸 제일 좋아했는데?”

“…….”

처음엔 분명 무미건조한 낯짝이었고 지금도 표정 변화가 크진 않았지만 당황스러움만큼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곧 체념의 빛이 어린 쪽에서 설명을 시작했다.

“……모든 용은 영혼 속에 선대 용들의 경험과 지식을 품고 있다.”

“백과사전 같은 건가.”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용의 신체 혹은 정신에 문제가 생겼을 때 가끔 의식을 지배하기도 하지.”

“정리하자면, 기억을 잃었으니 긴급하게 그 ‘백과사전’이 널 돕고 있다는 거야?”

에키온이 끄덕였다.

“그렇다.”

그 후로도 세부적인 설명이 이어졌고, 이해하자면 이렇다.

지금 설명한 백과사전 같은 게 초대 용의 영혼의 조각 같은 건데.

에키온은 성장하면서 기억이 휙 날아가 버린 상태란다.

이대로 두면 용의 생명이 위험해질 위기라 판단하고 조각이 깨어나 지식을 주고 있다나?

“초대 용의 지식은 내가 용의 도시로 가길 희망했다.”

“왜?”

“그곳엔 용의 재산이 잠들어 있으니. 기억이 원래대로 돌아오진 않더라도, 최소한 안정적일 거라 판단한 듯하다.”

“…….”

“고향이니까.”

에키온에게 기억이 없다는 게 실감 났다.

용의 도시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또 당할 뻔했는지 안다면 이렇게 말 못 할 테니까.

‘게다가 현재의 용의 도시로 가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곳은 에키온을 붙잡기 위한 거대한 덫이 된 지 오래였다.

“넌 거기 가면 안 될걸.”

“어째서?”

“황실이 용을 해부해서 죄다 삼키든 노예로 삼든. 위대하고 악독한 독기를 품고 대기하고 있거든.”

9년 동안 용의 도시에서 새로운 영주 대리로 앉은 육지 거북의 수장이 매해 보고서를 보내 왔다.

“황실은 널 찾기 위해 이 먼 땅까지 첩자를 보내 오고 있어서 말이지.”

매번 아직은 때가 아니란 말과 함께 에키온의 안부를 묻는 편지가 열 장쯤 동봉되어 있었다.

‘허어. 말이 백과사전이지 결국 오래전에 살다 갔던 용이 도와주고 있다. 이거잖아?’

……어쩐지 말투가 예스럽다고 했어. 우리 용용이 귀여운 말투는 어디 갔나 싶었지.

나는 쯧 혀를 찼다.

“네가 에키온이 아니란 소리를 길게도 하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네가 아는 존재가 맞다.”

“내 이름이 뭐게?”

“…….”

나는 미약한 당황을 보이면서도 끝내 답하지 못하는 남자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오래 밖에 있다 보니 차가워진 손이 그린 듯 완벽한 선을 이룬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남자는 내게 턱을 내어준 채 가만히 나를 응시했다.

“가짜 용용아. 나는 기억이 곧 영혼이라고 생각해.”

사람이 그 사람일 수밖에 없는 증거, 회귀자인 나만이 누구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날 위협하고.”

기억이 없는 자는 내가 아는 그 사람이 아니다.

“공격하고.”

나는 지난 생을, 태어난 순간 이 생을 그렇게 버텼다.

“내 이름조차 모르는 남자는 내가 아는 그 애가 아니야.”

나는 차갑게 쳐다보다가 얼굴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이런 자세를 취하지 않아도 도망가려 한다면 충분히 붙잡을 수 있었다.

‘음, 이걸 어떻게 처리한다.’

아빠와 세 오빠. 그리고 레바이. 웨일, 리리벨……. 위 사실을 공유할 이들을 하나씩 떠올렸다.

너무 오래 자리를 비웠나.

연회장 쪽에서 들려 오는 음악 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있었다.

잔잔한 춤곡 차례이거나 이제 춤이 파할 시간인 듯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근처에 시종이 있겠지? 둘째를 데려오라 해야겠는데…….’

이렇게 생각하며 돌아보다 말고 흠칫했다.

“……뭐야. 너.”

절로 미간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었다.

“왜…… 울어?”

남자는 참으로 무미건조한 얼굴을 한 채 주르륵, 눈물을 흘리며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우는 한편으로 표정 변화가 전혀 없어서 오히려 기묘한 광경이었다.

남자는 닦을 줄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마치, 어린 날 울면서도 눈물을 닦을 줄 모르던 에키온처럼.

“허.”

그래. 정말 부작용으로 이렇게 된 거라면 내가 더 화를 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전히 나는 저 남자가 에키온처럼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건 본능에 가까운 감이었다.

문을 열려고 커튼을 잡는 순간, 낮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네게 거짓말을 하나 했다.”

“일단 눈물이나 그치고 얘기하지, 그래?”

“내 의지가 아니다.”

“……용께서 눈물샘도 조절 못 해? 그래. 무슨 거짓말을 한 건데?”

“눈을 뜨자마자 초대 용의 조각은 용의 도시로 가야 한다고 경고했지만. 나는…… 누군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름도 외모도 어렴풋한데 찾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 때 발견한 사람이…….”

“…….”

“너였다.”

그 말에 나는 오묘한 낯으로 남자를 볼 수밖에 없었다.

“네 이름이 무엇이지?”

성큼 다가온 남자가 조심스럽게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손이 내 손목을 잡았다.

허락 없이 날 건드린 자를 응징하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웠기에 내어 준 것에 가까웠다.

“스스로 기억해 봐.”

목소리는 누그러졌지만, 내 시선은 여전히 차디찬 서리 같았다.

남자가 시선을 내렸다.

그와 동시에 땅이 흔들렸다.

‘잠깐. 잠깐, 잠깐만…….’

익숙한 흔들림에 나는 얼른 남자를 붙잡았다.

남자가 조금 놀란 동시에 지진이 멈췄다.

“……너, 용은 용이구나.”

지금의 흔들림. 이거 용의 힘이었다.

“…….”

지진을 멈추고 나니, 더욱 이루 말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지금도 이 남자가 에키온처럼 느껴지지 않는데.

여전히 눈물을 닦지 못한 채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내가 기억하는 그 애의 것을 떠올리게 했으니까.

골치 아팠다.

* * *

더 큰 문제가 있었다.

투스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에키온 옆에 껌딱지처럼 붙어 있어야 할 종속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남자가 더욱더 에키온처럼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지만.

나는 조가비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기억을 잃었다고.”

파티가 끝난 뒤, 본래라면 내 생일을 축하할 가족과 지인들, 가까운 수하들만 모인 소소한 축하연이 열릴 자리였으나.

이 자리는 자연스럽게 회의 자리가 되었다.

“와, 덩치 크네. ……이놈 이렇게나 컸었나?”

“말조심해라. 회의 자리다.”

아틀란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가 입을 다물곤 어깨를 으쓱했다.

커다란 방에 익숙한 얼굴들이 여기저기 모여 앉은 자리, 내 옆엔 에키온이 얌전히 앉아 있었다.

“외람되지만 고귀한 분께서 기억이 있든 없든. 저희의 계획과는 무관한 내용 아닙니까?”

“버려.”

“어쨌거나 용 공작님은 이전에도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맡으신 역할이…….”

“버리지.”

“…….”

“…….”

나는 고개를 돌렸다.

버리라고 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빠였고, 다리를 꼰 아빠는 당당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몇 달 전엔 웨일을 버리라고 하더니…….’

“아빠, 그러다 내 결혼식 날엔 울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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