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0화
자연스럽게 3회차가 떠오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직전에 꿈을 꾸기도 했던 데다가.
세상을 멸망시키던 그 순간은 내가 회귀를 아무리 반복하더라도 잊지 못할 일일 테니까.
‘머리, 길어졌구나.’
에키온의 머리가 지나치게 길었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머리카락은 잘은 모르지만 허리까지 닿을 것 같았다.
이질감 없이 어울렸다.
머리카락은 길었지만 선이 가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아니, 얼굴의 선은 섬세하고도 유려했지만 넓게 벌어진 어깨선과 탄탄하고도 길게 뻗은 몸의 밸런스가 성별을 모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다만 얼굴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남녀를 불문하고 홀리는 듯한 기분이 드는 낯이었다.
색이 바뀌지 않은 금색 눈동자가 느릿하게 깜빡였다.
더욱 길고 섬세해진 속눈썹 끝에서 달빛이 녹아 은은한 은빛마저 돌았다.
모든 것이 그의 성장을 가리키는 동시에.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뭘까. 이 묘한 감각은…….’
다만, 3회차 멸망의 순간처럼 무미건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이 표정 때문일 것이다.
길게 뻗은 손은 손가락이 길고 마치 피아노를 치는 이의 것처럼 손끝마저 아름다웠다.
신이 이토록 정성스럽게 만든 피조물이 있을까 싶은 아름다운 모습이었지만.
남자의 손이 뻗어 내 뺨에 닿는 순간.
‘……!’
나는 등으로 내리는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경고와 같은 감각이었다.
거칠게 뿌리치지 않은 건 오랜 시간 내 생을 차지한 이성 덕택이었다.
저건, 에키온이다.
적이 아니야.
나는 마치 사람이라도 되는 듯 본능을 향해 속삭였다. 그러나 본능은 다시 그건 모르겠다는 듯 뇌리가 아프도록 경고했다.
숨을 참으며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에키온.”
“…….”
“너 맞지?”
우스운 일이었다. 저 얼굴에, 저 머리 색에 저런 눈에.
이런 존재감이 또 어딨다고.
눈에 보이지 않으면 묘하게도 날 안달 나게 하는 이는 에키온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여전히 섬뜩한 감각이 등을 찔러 댔다.
조심하라고, 당장이라도 주먹을 쥐라고. 뭐든 무기를 쥐라고.
남자는 대답하는 대신 상체를 더 기울였다.
사르르. 우리 사이로 푸른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물결쳤다.
마침내 남자의 얼굴과 더욱 가까워진 찰나.
에키온의 모양 좋은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넌 누구지.”
세상 좋은 소리를 모아다 툭툭 섞어 놓은 듯 아주 좋은 목소리였지만.
귀로 유혹하듯 녹아든 음성에 멈칫하기도 잠시, 한발 늦게 그 내용이 뒤통수를 때렸다.
“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에키온, 너 맞지? 어디 아파?”
남자는 내 얼굴을 쥔 채로 한동안 말이 없더니 다시 물었다.
여전히 감정이라곤 존재하지 않은 듯 건조한 표정이었다.
“에키온. 그게 내 이름이라고?”
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깜빡였다. 그 이름을 곱씹듯이 제 이름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상했다. 고저 없는 목소리도 감정 없는 얼굴도. 말의 내용도.
“그리고 네가 용의 반려인 모양이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기분이 가라앉았다. 마치 전혀 관계없는 타인을 가리키는 듯한 목소리였으니까.
잠시간 외양에 시선을 빼앗긴 것도 찰나,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는 넌 누군데……?”
“…….”
잠깐의 침묵 끝에 남자가 순순히 시인했다.
“모른다.”
“……허?”
“기억을 잃은 것 같은데.”
“뭐? 기억 상실?”
내가 어처구니없어하는 것도 잠시, 나는 다시 한번 쏘아지는 선연한 본능의 경고에 눈을 홱 들어 올렸다.
“더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혹시 여기서 용의 도시는 얼마나 떨어져 있지……?”
“용의 도시는 왜?”
“날 거기로 데려가 줄 수 있나?”
“사정을 말해 준다면.”
참자. 일단 들어 보자. 이게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상황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정상적인 성장이 아니었으니, 불가피한 부작용이 발생했을 수도 있다.
“말하기 어렵다면.”
“어려워?”
그러나 다음 순간 이어진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찌푸렸다.
스르륵 놓아지는 손을 꾹 잡았다.
“어딜 가려고?”
“들어줄 생각이 없다면 다른 이를 찾아가지.”
이것 보게.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네 성장을 좀 보고 안심하나 싶었더니. 이건 대체 무슨 일인지.
“그래, 뭐. 말하기 어려울 수 있지. 이해해. 기억이 사라졌다면 혼란스럽겠다. 그렇지?”
나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느낄 테고. 나는 내가 느낀 본능의 경고가 뭔지 깨달았다.
에키온이 내뿜는 경계심이었다. 경계 어린 힘. 확실히 용은 용이었다.
“말하기 싫으면…….”
경계하는 것만으로 이런 힘이 느껴지다니 말이다.
나는 머리를 느릿하게 기울이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말하게 만들어 주면 되겠네.”
내 미소에 순간 에키온이 멈칫하는 것도 잠시, 서둘러 뒤로 몸을 물렸다.
아주 찰나의 틈을 두고 에키온이 있던 자리로 부웅, 내 손이 지나갔다. 번개 같은 속도였다.
“이야. 우리 용용이. 성장하니까 몸도 아주 그냥 날렵해졌네?”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일어나 전투 자세를 취한 채였다.
“무슨 짓…….”
에키온은 당황하면서도 착실하게 한 번 더 뒤로 물러났다.
그 자리로 내 다리가 부웅 날아갔다. 깔끔한 날아차기를 한 동시에 자리를 잡았다.
“무슨 짓이냐니. 너도 나 공격하려 했잖아? 네가 말하는 내내 등 뒤로 살기가 느껴지던데. 네 거 아냐?”
우리 용용이가 어느새 장성해서 나를 협박하려 생각했다니 참으로 감격 어려서 눈물이 나다 못해 주먹이 꽉 쥐이네.
“난…….”
“인사도 없이 어딜 가려 했어.”
나는 주먹을 쥐었다 풀며 툭툭 목을 풀었다. 내 얼굴로 더욱 화사한 미소가 지어졌다.
아마도 아틀란이 보았다면 저 미친X 하고 외쳤을 만한 얼굴이었을 것이다.
“말하기 싫으면 실토하게 해야지 뭐.”
* * *
‘용은 성장하면 자동으로 강해지는 건가?’
30분 뒤. 나는 엉망이 된 테라스에서 후, 숨을 내쉬었다.
‘이거 완전 사기네, 사기.’
내 손에는 멱살이 쥐여 있었고, 나는 누워 있는 남자의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이야. 우리 용용이 강해졌네?”
에키온은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우리의 정과 관계를 생각해서 이 고운 얼굴은 안 건드렸는데 말이지.
‘음, 간만에 스위치가 켜져 버렸네.’
나라고 뭐 화가 나지 않겠는가.
웃고 있었지만 오래전 아빠의 병을 고치는 데 멸종한 동물의 일부가 필요하다는, 불가능한 일을 선고받았을 때만큼이나 빡친 상태였다.
우리의 싸움은 용케도 테라스 문을 가린 커튼 하나 건드리지 않고 이어졌다.
당연하지. 내가 그걸 바랐으니까.
안쪽에서 이쪽을 보지 못하도록 쳐진 두꺼운 천과 전투 나팔을 연상시키는 커다란 춤곡은 테라스의 소란스러움을 적절하게 가려 주었다.
“그런데 아직 누나한테 덤비려면 멀었다. 그치.”
실제론 내가 누나가 아니라 에키온이 연상이었던가. 정신연령이 한참 차이 나니 그렇다고 하자.
나는 멱살을 놓고 에키온의 턱을 잡아 올렸다.
“자, 이제 말을 할 용의가 생겼어?”
“……용을 쥐어 패는 자는 또 처음이군.”
“이야. 기억도 없으면서 처음인 건 어떻게 알아? 우리 용용이. 거짓말도 하나?”
“…….”
“우리 정을 생각해서 얼굴은 건드리지 않았어.”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자, 에키온은 당황한 표정으로 한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미쳤다는 소리를 듣는 편인가?”
“아. 섭섭지 않게 들어.”
“…….”
“아마 한 번 더 도망치려 들면 미친 인간 다음엔 어떤 소리 듣는지도 알려 줄 수 있는데.”
에키온이 작게 한숨을 쉬더니 천천히 양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졌다. 일단 일어날 수 있게만 해 주면 좋겠는데…….”
“그 이상한 힘으로 도망가려고?”
“맹세라도 하지.”
에키온의 몸에서 금빛과 푸른빛이 흘러나왔다.
3회차가 멸망하던 때에도 한번 봤던 힘이기에 당황하지 않았다.
폭주하던 용 공작이 쓰던 힘은 금색, 푸른색, 검은색. 이렇게 세 종류였다.
개중 검은색은 폭주할 때만 나오는 모양인 듯했다.
내가 자리를 살짝 뒤로 물려주자, 에키온은 상체를 일으켰다.
“……내 몸에서 일어날 생각은 없는 거겠지.”
“아, 도망 안 가게 붙잡는 건 이게 딱이라서. 그냥 이대로 얘기해.”
“그전에 대체 왜 화를 내는 거지?”
“너 같으면 곱게 키운 애가 기억도 못 하고 갑자기 집에 갈 거라며 엉엉 우는데 당황스럽지 않겠어?”
“울……. 운 적은 없는데.”
“당황한 꼴이 금방 울 것 같던데.”
“울면 때리는 건가?”
“나쁜 버릇은 고쳐야지.”
선문답이 오고 갔다. 에키온은 이 대화에 영양가가 없음을 깨달았는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번 양팔을 들어 올렸다.
“항복하지. 모두 털어놓겠다.”
“그래. 우리 진짜 용용이는 어디 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