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아버진 이런 시기가 마지막인 걸 아는 거지.”
“뭐?”
“아버지라고 언제까지고 널 끼고 살 수 있을 줄 아시겠냐. 상어, 정리하면 가주 위 받을 거잖아?”
“흐음. 티가 났나?”
“내가 널 모르냐? 가주님.”
“…….”
이놈과는 하나의 생을 함께했다는 걸 이렇게 느끼곤 한다.
“뭐, 맞아.”
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피로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빠를 보았다.
나만이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이었다.
“이제 아빠를 구해드려야지.”
“구해?”
“아빠, 사람들이랑 있는 거 안 좋아해. 아마 가주 자리는 성격상 전혀 안 맞을걸. 평생 혼자 살아온 사람이 얼마나 참고 있겠어.”
“…….”
“하지만 왜 했겠냐.”
날 위한 일이니까 참고 하고 계신 거지. 우리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네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은, 역시 황실을 치는 거겠지?”
“당연하지.”
“…….”
“기나긴 매듭을 풀어야지 않겠어.”
흘끗 둘째를 보면, 번듯하게 차려입은 옷이 무색하게 피로하게 보였다.
아마 나도 비슷한 표정일 것이다. 이건 시간이란 찌꺼기가 남은 회귀자들만이 가진 회한일 테니까.
특히나 나는 더.
툭, 어깨로 아틀란의 손이 올라왔다.
“간다.”
“어딜?”
“효도하러. 뭐, 나도 원망은 그만하고 아들로 살아야지.”
아마도 아빠가 우리의 어린 날 자식 모두를 외면했던 걸 말하는 걸 거다.
“생일 축하한다. 내 동생.”
내가 바꿔 놓은 것들이 쳇바퀴 돌아가듯 돌아가고 있다.
“나는 내 마지막 한을 푼 지 오래야.”
“…….”
“네가 행복하길 바랐으니까. 지금 그걸 보고 있지.”
“……오글거리게 뭐 하는 짓이야?”
“허, 대답은 그것뿐이냐?”
와락 낯을 일그러트리는 둘째놈의 손을 털어내면서 까칠하게 말했다.
“아직은 일러.”
“…….”
“황실을 모두 해치우고 나면, 그때 다시 말해. 그럼 더 행복해질 것 같으니.”
아틀란이 송곳니를 보이며 씩 웃고는 휘적휘적 가 버렸다.
시원해 보이는 표정에 나는 속이 풀리기는커녕 미묘해졌다.
“거…… 죽기 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싱숭생숭해지게.”
난 목을 긁적이다가 곧 테라스로 향했다.
생일의 주인공이 사라지면 안 되겠지만 어차피 이 파티에선 나보단 아빠에게 관심이 쏠릴 테고.
그것이야말로 아빠가 원하는 일일 테니, 맞춰 주기로 했다.
어차피 밤에 가족들과 내 사람끼리 모여 다시 파티를 하기로 했으니까.
‘잠이나 좀 자고 싶네.’
* * *
“으으…….”
테라스로 들어가 난간에 기대어 들고 온 샴페인을 쭉 마셨다.
“간에 기별도 안 가네.”
몇 잔 더 들고 올 걸 그랬나?
이렇게 생각할 무렵,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누구지?’
역광이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곧 머리 색을 보고서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어두운 빛의 진한 잿빛 머리카락. 머리 색과 비슷한 눈동자.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를 느슨하게 묶어 늘어트린 남자였다.
전형적인 학자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와 다르게 널찍한 어깨와 길고 비율 좋은 실루엣.
눈매만큼은 학자와는 전혀 거리가 먼 까칠한 눈매였다.
‘본인의 종과는 거리가 멀다니까.’
동그란 안경.
특히나 늘씬하고 날렵한 실루엣을 쭉 보다가 고개를 기울였다.
다가온 그가 까칠한 표정으로 접시를 내밀었다.
“뭐야?”
성장한 레바이였다.
“너 시찰 나가느라 못 오는 거 아니었어?”
“왔습니다. 누구 생일이신데 빠집니까?”
“충성스럽기도 하네.”
레바이가 접시를 내민 채로 까슬하게 웃었다.
미소인지 냉소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얼굴이다.
“충성 빼면 시체라서요.”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말 하지, 그래.”
“아, 티 났다니 유감입니다.”
“쯧.”
나는 레바이가 내민 잔을 홀짝이며 느릿하게 다시 보았다.
“네가 왔다는 건, 첫째놈도 같이 돌아왔겠네?”
“그렇습니다만, 언제부터 벨루스 님을 바로 찾을 정도로 애틋하셨습니까?”
“우애로운 남매지.”
“부려 먹기 좋은 수하가 아니고 말입니까?”
나는 살짝 웃었다.
‘이놈은 갈수록 3회차랑 똑같아지네. 가끔 헷갈리게스리.’
나만 이렇게 느낀 건 아니었다.
아틀란이나 벨루스도 비슷하게 느꼈고.
사실 궁금해서 몇 번이나 떠봤는데, 정말 3회차를 기억하지 못 하는 눈치였다.
‘기억, 안 하는 게 좋긴 한데…….’
사실 똑같은 사람이라도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느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성장했다.
아틀란 놈의 경우는 이전 생에서보다 사나움이 살짝 덜했고, 키가 더 컸다.
벨루스는 여전히 차갑긴 하지만 약간이라도 부드러운 표정을 지을 줄 알게 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놈만은 기억하는 3회차랑 완전히 똑같이 성장했단 말이지?
‘이유가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우연인가.’
그 사이 레바이는 텅 빈 접시를 한쪽에 치워 두고 다시 다가왔다.
“가주님?”
“네게 가주라 불리는 건 몇 번이나 들어도 묘하긴 하다, 야.”
“네?”
“아니. 혼잣말.”
레바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곧이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한 손을 가슴에 올려두고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생일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반듯한 인사였다. 날렵한 체구랑 잘 어울리기도 했다.
같은 돌고래들은 루가루바처럼 동글동글하게 생겼던데.
왜 이놈만 돌연변이처럼 생긴 걸까 늘 궁금했었지.
“생일 축하드립니다, 가주님. 아주 오-래 사십시오.”
“욕을 해라, 욕을.”
당시 오래 살란 말이 계속 생을 반복하란 말로 들린 탓에 화를 낸 적이 있었는데. 억울해하던 이놈 얼굴이 아직도 선했다.
그때가 생각나서 살짝 웃었다.
그러다 웃음을 지우며 물었다.
“넌 대체 왜 날 따르냐?”
그간 레바이는 내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알아서 내 비서관 노릇을 해 왔다.
내가 잠들어 있을 때조차 말이다.
“은혜…….”
“그건 갚을 대로 갚았어. 난 네가 떠나서 행복하게 살아도 상관없어.”
레바이가 차갑게 웃었다.
“부려 먹을 땐 언제고 이렇게 말씀하시니 조금 섭섭하군요.”
상관을 비웃다니 하극상이다.
“저 권력 좋아합니다. 그러니 자꾸 꼬여내지 마십시오. 헷갈리게.”
잠시 과거를 더듬는 동안, 레바이가 실례가 되지 않을 거리만큼 가까워졌다.
얼굴이 똑같은 탓에 아주 찰나, 내가 어느 생에 서 있는지 헷갈렸다.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제 출세 좀 보장 부탁드립니다.”
“왜?”
안경 아래의 눈이 한참이나 날 응시했다.
“권력이 넘치는 여성이 취향입니다.”
“…….”
시선이 교차하는 곳부터 옅은 긴장감이 퍼졌다.
이 긴장감이 만약 향기라면 숨 쉴 때마다 더욱 진해지는 느낌이 들지 않을까.
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잖아.”
“…….”
어느새 내 손이 레바이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너는 왜 나를 헷갈리게 만들까.
기억도 못 하면서 말이지.
‘차라리, 기억했다면 뭐가 달라지려나?’
아, 달라지겠지.
‘괘씸죄로 한 대 때렸다.’
웃긴 건 이놈이 반항하기는커녕 얌전히 허리를 숙여 얼굴을 내주었단 점이었다.
이런 것까지 비슷했다.
“나는 남편은 하나만 두기로 결심했거든?”
“어느 지점이 감히 가주님을 오해하게 만든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권력 넘치는 사람이 취향이라며.”
“취향 맞습니다. 존중 좀 해 주시죠? 그리고 당연히, 가주님 곁에 있으면 그런 사람을 많이 보지 않겠습니까?”
“흐음?”
나는 손에 콱 힘을 주었다. 오묘하게 긴장감이 차오르던 분위기가 산산조각 나듯 깨져 버렸다.
“음, 가주님? 외람되나…… 제 턱주가리를 날려 버릴 심산이십니까?”
“입을 놀리는 솜씨가 아주…….”
“입으로 먹고사니 차라리 팔다리를 부러트려 주시지요.”
“진짜 부러트려 버린다?”
“…….”
입을 다물면서도 투덜거림이 그대로 느껴지는 얼굴에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로 레바이의 얼굴을 쭉 밀어냈다.
“됐다. 내가 착각했나 보다.”
“무엇을 말입니까?”
“안 알려 줘.”
나는 레바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고는 그대로 손을 흔들었다.
“가 봐, 난 좀 쉴래.”
“……예.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레바이가 돌아가다가 말고, 돌연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잠시 돌아섰다.
“가주님.”
심드렁한 표정으로 놈을 보았다. 놈이 멋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오래 사십시오.”
기분이 더욱 묘해졌다.
* * *
레바이가 돌아간 뒤로 한동안 밍숭맹숭한 기분이 온몸을 지배했지만.
‘그래 뭐. 이런 때도 있는 거지.’
사실상 레바이 그놈이 정말 과거를 기억하면서 모른 척하는 건지.
못하는 건지. 당장 중요한 건 아니었으니까.
‘아리송하게 구는 이유가 있겠지, 뭐.’
홀가분한 기분이 온몸을 지배했다.
“생일이라.”
몇 번이나 반복한 생일이다.
남은 생일은 오늘처럼 행복한 하루가 되려나?
“황실을 때려잡으면 그렇게 되겠지.”
내 옆에는 잔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레바이가 다시 와서 가져다준 잔이었다.
쓸데없이 세심한 놈이다.
나는 푸르른 달을 한참 보며 눈을 깜빡이다가 잠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폐허가 된 성에 서 있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3회차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나는 다친 몸을 한 채 폐허를 둘러보았다.
곧 나를 죽이고, 세상을 멸망시킬 공격이 날아올 터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이 세상을 멸망시킬 용 공작은 보이지 않았다.
‘……뭐야. 어디로 간 거지?’
공간이 산산이 부서지며 재조립된다. 눈을 감았다가 떴을 때, 어두운 공간에 서 있었다.
시간의 틈이다. 나와 에키온이 3년 동안 있던 곳.
“칼립소의 시간을 엿보지 않을 거야.”
“그래? 난 봐도 딱히 상관없는데.”
“나중에.”
“나중에?”
시간의 틈에서 어느 날 나눴던 대화가 공간에 둥둥 울렸다.
그러다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칼립소가 직접 보여 줘.”
“아, 잠든 건가…….”
눈을 벅벅 비볐다. 시간이 얼마나 지나간 건진 모르겠지만.
많이 지나간 건 아닌 듯했다.
테라스 문 너머로 파티의 음악 소리가 아직 들려 오고 있었다.
기지개를 쭉 켰다.
‘몽롱하네.’
눈이 간지러웠다.
다시 한번 눈을 비비다가, 무언가 내 아래로 드리웠다는 생각에 고개를 들어 올렸다.
‘뭐야. 언제 다가온 거지?’
누군가 서 있었다.
천천히 눈을 깜빡였을 때, 하늘을 보던 사람이 고개를 돌렸다.
살랑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푸른 밤을 닮은 청명한 쪽빛이었다.
조금 전 꿈속, 3회차 멸망의 순간에 없던 인물이 떠오른다.
……용 공작이다.
색이 다른 시선이 교차했다.
한 시간 같은 찰나가 지나간 순간, 내 입이 절로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