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8화
“생일 축하드려요, 칼립소 님!”
나는 종이로 만든 꽃가루를 맞은 채로 눈을 끔뻑였다.
“아, 미안해. 미사.”
“헤헤.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모퉁이를 도는데 누군가 뭔가를 던지기에. 나도 모르게 손을 잡아 제압한 차였다.
바로 미사임을 알았고 종이 꽃가루를 맞고서야 아차 싶었지만.
‘손이 너무 빨랐지.’
나는 미사의 손을 놓아주고 어깨를 톡톡 털어 주었다.
나보다 한참 크던 유모님은 이제 나와 엇비슷한 키가 되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놀란 얼굴이셔요? 설마, 생일인 걸 모르셨던 거세요……?!”
“아니, 아니. 잊을 리가 있겠어?”
사실 잊었다. 아주 잠깐 동안만.
그도 그럴 게…….
‘셋째놈이 너무 자연스럽게 방문했잖아?’
이른 오전, 아니지. 거의 아침부터 쳐들어온 아게노르가 제 할 말만 하고서.
생일 축하 인사는 전혀 없었기에 자연스럽게 나도 잠시 잊었다.
‘잊을 게 따로 있지.’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오늘을 잊어선 안 되는 이유. 내가 드디어 성년이 되어서?
아니, 몇 번이고 성년이 되어 봤는데 특별한 감흥이 있을 리가.
‘에키온.’
그 애가 오늘 드디어 성장하는 날 아니던가!
나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없다고?”
“네? 네…….”
에키온의 방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방 정리하던 에이야와 마주쳤다.
“도서관에 가신다고 잠깐 자리를 비우셨는데…….”
에키온이 도서관에?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에키온은 그곳이 제일 조용하다며 자주 가곤 했으니까.
책을 읽으러 가기도 했지만 대체로 그곳에서 투스와 함께 낮잠을 자는 게 주목적이었다.
내가 저택을 비우면서 생긴 습관이라고 했다.
“어, 칼, 칼립소 님?!”
뒤에서 에이야가 나를 불렀지만, 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아, 에키온 성장했는지 물어볼걸.’
도서관으로 한참 걸어가고 나서야, 문득 에이야에게 물어보는 걸 깜빡했음을 알았다.
성장했다면 그 모습이 어땠는지도 말이다.
그래도 괜찮다.
나도 곧 보게 될 테니까.
‘어째 내 생일인데 다른 사람 보길 더 기대하고 있단 말이지.’
하지만 고대하던 만남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칼립소 님, 칼립소 님! 잠시만요!”
지나가다가 마주친 데데가 내게 웬 봉투를 내민 것이다.
“어라.”
귀엽고 깜찍한 봉투였다.
발신인은 ‘아이리’.
나는 이름 옆에 붙어 있는 조그마한 다람쥐 스티커를 보고서 빵 터졌다.
아이리는 현재 리리가 쓰고 있는 가명이었다.
이 원작의 여주인공은 둘째 오빠와 끔찍한 곳을 탈출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잠들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놀라서 여기 오려던 걸 팔라야가 겨우 막았다고 했던가.’
듣기론 흑표범들이 아직도 리리를 찾고 있다고 하니, 왔다면 분명 위험했을 터다.
“아이리 님이 보내신 선물은 집무실로 가져다 두었어요!”
매해 챙겨 주었기에, 올해는 어떤 것을 보냈을지 궁금했지만.
그보다는 에키온이 먼저였다.
잠시 편지를 쓸어 보다가 데데에게 이 편지도 집무실에 가져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고 나서 도서관에 도착했더니.
“없잖아?”
에키온이 늘 있던 자리는 비어있었다.
나는 슬슬 미간을 찌푸렸다.
이상하게 가는 데마다 에키온과 엇갈리는 기분인데.
‘무슨…… 숨바꼭질하는 것 같네.’
오래지 않아 나는 정원에서 에키온을 발견했다.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 에키온의 사정상 에키온만을 위해 만들어진 정원이었다.
정자에 가만히 잠들어 있는 이는 자그마한 소년이었다.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
힘이 빠졌다.
‘……변함없잖아? 왜?’
새근새근 잠든 에키온이 깨지 않게 살그머니 다가가면서도 물속에 잠긴 듯 몸이 무거웠다.
‘왜 성장하지 않은 거지?’
분명 내가 성년이 되는 날에 성장한다고 했잖아.
손을 뻗어 에키온의 머리를 만지려다가 그냥 멈췄다.
명화 속 아기 천사처럼 잠든 에키온의 모습은 모습 말 그대로 그림 같았지만 착잡해졌다.
사기 인형처럼 뽀얀 피부를 보다 시선을 내렸다.
‘나 때문일까.’
거침없이 달려온 이번 생에선 마음에 걸릴 것이 거의 없었다.
흑표범의 집으로 보내지지 않은 것도.
가주 자리를 내 손으로 쟁취한 것도 모두 내 힘으로 해냈건만.
이제는 물의 힘을 얻는 것도 문제가 없어진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에키온이 마음에 덜컥 걸려 버렸다.
‘기대했구나, 난.’
생각 이상으로 이 애의 성장을 기대하고 있었던 거다.
물끄러미 소년을 보는 사이 투스가 스르륵 눈을 떴다.
투스는 나를 보고 반갑게 입을 열려 했다.
쉬이-.
내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자, 투스가 얼른 입을 합, 다물었다.
‘잘했어.’
나는 입 모양으로만 말했다.
‘에키온도 실망하지 않았을까.’
평화롭게 잠들어 있는 소년을 굳이 깨우고 싶진 않았다.
‘그나저나 대체 왜 아무런 성장도 이루어지지 않은 거지?’
약간이라도 컸다면 차라리 희망이 있었을 텐데.
한참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앉아 생각하는 사이, 나지막한 미성이 들렸다.
“칼립소, 왜 찌푸려?”
“…….”
“누가 괴롭혀?”
나는 찌푸린 그대로 고개를 돌렸다.
“왜 찌푸리긴. 너 때문이지. 왜 성장 안 한 거야?”
“…….”
“나한테 거짓말했어?”
막 잠에서 깨어난 에키온이 정신이 확 들었는지 서둘러 상체를 일으켰다.
“……안 했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키는 자라지 않을지언정 갈수록 예쁘고 유려해지는 아이였다.
에키온이 하는 행동은 뭐든 예뻤지만. 지금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체 왜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거야? 이런 순한 얼굴로 보기나 하고.’
나도 모르게 투기가 흘러나온 걸까. 투스가 파드득 비늘을 떨었다.
-칼립소!
“난 변명은 안 들을 거야.”
-그게, 아니라. 공작님! 거짓말 안 했어!
“안 했다고?”
투스가 열심히 기어서 내 손으로 착 올라왔다.
“일 밀리미터도 안 자란 걸 눈앞에서 보고 있는데, 무슨 말이야.”
-하지만 시간은 말하지 않았는걸!
“그래서, 뭐 오늘 저녁이라도 되면 갑자기 짜잔 하고 성장해?”
-그건…….
투스가 이리저리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말했다.
나를 진정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느껴졌다.
“미안해. 화풀이하려던 건 아니야. 다만, 너도 알다시피 에키온의 성장은 내 마음에 정말 아픈 손가락 같은 거라서.”
-아니야. 칼립소. 아파하지 마. 정말 공작님, 거짓말 안 했어.
에키온을 바라보자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이 보였다.
-그저 아직 때가 아닌 거야. 저녁, 아니……. 밤이야.
“밤?”
“용은, 밤에 완성이 돼.”
나는 시선을 돌렸다.
에키온이 내 옷자락을 살짝 잡은 채로 말을 이었다.
“나는 밤에 태어났으니까. 성장도 밤에, 하는 거야.”
“그렇구나……. 뭐야.”
나는 투스를 내려놓고 얼굴을 부여잡았다.
“하아, 깜짝 놀랐잖아.”
아무리 생일이라도 이런 깜찍하고 깜짝 놀랄 이벤트는 옳지 않다.
에키온이 잠시 망설이더니 내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부아가 치밀어서 물었더니.
책에서 얼굴을 부여잡고 있던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는 장면을 봤다나.
결국 긴장이 풀려 공허하리만치 웃음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홀가분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이네. 적어도 오늘 성년이 된 날 겸 생일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으니 말이야.”
네 번째로 맞이하는 성년이었다.
“갈까? 다들 파티를 준비하고 있을 거야.”
* * *
그날 저녁.
에키온에게 말했던 대로 성대한 파티가 열렸다.
1부는 많은 사람, 즉 범고래 방계 가문과 여러 가문 수인이 함께 참여하는 파티였다.
에키온은 여기 오지 못했다.
당연하다. 귀족들이 모두 오는 자리에 데려올 수 있을 리가 없으니.
‘내가 살다 살다 이런 파티 참석을 다 해 보네.’
나는 내가 입은 옷을 슬쩍 보았다.
1회차와 2회차에선 파티에 참석하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흑표범 집안에서 나는 살아 있되 없는 사람 취급이었으니.’
3회차에선 쌈박질만 하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자리가 없었다.
‘아니다, 레바이 그놈의 잔소리 때문에 있기야 했지?’
사기를 위해 승전 파티 정도는 열어야 한다고, 가주도 참석해야 한다고 얼마나 성화던지.
그때엔 제복을 걸치고 참석했다.
‘내가 드레스라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사치스럽고 무거운 건 싫다고 딱 잡아뗀 탓에 원피스에 가까운 옷을 걸치게 됐다.
괜찮다.
수중 동물 수인들의 파티는 이런 차림도 용납되기 때문에.
“이야, 우리 아빠 인기 많네.”
파티장 한쪽에 선 채, 나는 아빠를 향해 잔뜩 몰린 사람들을 보며 키득 웃었다.
“많기는. 이게 다 네 옆에 접근을 못 하니까 절로 몰린 거잖아.”
“누가 인사하지 말랬나.”
옆에서 아틀란이 나를 슬쩍 보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놈도 파티랍시고 머리를 반쪽 넘긴 채 멋스러운 차림이었다.
“아버진 네 옆에 웬 놈들이 오는 게 싫은가 보지.”
아빠의 압박을 이겨 내지 못해, 내 옆에 아무도 오지 않은 거라나? 웃기기도 했다. 내 생일인데.
“누가 오면 안 되는 건데. 아, 잘생긴 청년들?”
“……허, 그 표정 뭐냐. 노인네 같았어.”
“노인 맞지 뭐.”
60년 넘게 살았으면 그렇지 않나. 속으로 중얼거렸다.
“……야. 대신 변명하자면 말이다.”
아틀란이 시키지도 않은 눈치를 보더니 천천히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