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6화
나는 웨일에게 잡힌 손과 가까워진 웨일의 정수리를 빤히 보았다.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반질반질한 눈동자는 다정했지만 깊은 심해처럼 일렁이는 감정을 투명하게 보였다.
이걸 보여 주어도 상관없다는 것처럼.
나는 이 감정의 이름을 잘 알았다.
‘꼭 혹등고래 그놈을 생각나게 하는 시선이네.’
애착을 바라는 눈빛.
물론 똑같지는 않았다. 혹등고래 그놈이 나한테 바라는 것과 웨일이 나한테 바라는 것이 다르듯.
딱 그만큼의 차이가 이 시선 안에 고여 있었다.
나는 손을 들어 웨일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넌 나한테 은인인데.”
“…….”
“왜 힘든 길을 가려 하는지 모르겠어.”
무려 네 번의 삶 동안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게 사랑이건만.
그걸 나한테 바라는 네가 조금 안타까울 뿐이야.
나는 내가 웨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우리가 처음 만났을 적에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
웨일이 작게 웃었다.
나지막한 웃음소리는 이미 성인의 것이었다.
“내가 바라는 길이니까?”
* * *
“네가 약혼을 한다는 소문이 돌더군.”
그날 저녁. 나는 드디어 아빠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마침 영지 내 일이 생겨 다른 곳으로 외부 업무를 보고 왔다던데. 그저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리 봐도 아빠는 성실하게 일할 얼굴상이 아닌데 말이지.’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지만 아빠는 여전히 내가 처음 보았던 얼굴에서 그리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전투 능력이 뛰어난 범고래답게 노화가 느린 것이다.
실제로 전 가주인 할머니도 나이에 비해서는 상당히 젊어 보이는 편이었다.
아마 나나 내 오빠들 또한 노화가 느릴 것이다.
‘엄마는…… 어떨까.’
문득 떠오른 모친의 존재를 더듬어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이내 씩 웃었다.
“응. 맞아. 돌아오니까 소문이 쫙 돌고 있길래 그렇겠거니 했는데?”
밖으로 나돌고 있는 나와 관련하여 항상 여러 소문이 돌았고, 늘 이 가문에서 가장 화제를 차지하곤 했다.
최근엔 내 약혼에 관한 소문이 화두로 떠오른 걸로 알고 있다.
“아빠가 허락한 거 아니었어?”
나야 그러려니 했는데, 굳이 부정을 안 한 건…… 아빠가 들었음에도 가만히 둔 거라 생각해서였다.
“내가, 네 약혼을?”
아빠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걸 보니.
‘……어느 간 큰 놈이 신나게 혀를 놀렸나?’
나마저 식은땀이 찔끔 흐를 것 같은 기세였다.
‘아니, 이 아빠는 갈수록 더 강해지는 느낌이네.’
역시 병이 많은 걸 막고 있던 게 분명했다.
“아니야? 아님 말고.”
“대체 무엇을 근거로 네 약혼이 진행될 거라 생각한 거지?”
어째 해석하자면 ‘들어 보고 그 근거가 될 만한 것을 모두 조져 버리겠다’ 하는 얼굴이다.
“아니, 상대도 있겠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행된 게 있나 했지.”
“흰수염고래를 말하는 거라면 수명도 돌려주면서 반려 의식을 풀어낼 방법이 생겼다고 하지 않았나?”
“아빠도 알겠지만 그건 내가 물의 힘을 각성했을 때 얘기잖아.”
아빠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그래도 잘생기긴 했지만.
흠. 그러고 보니 요즘 범고래 아가씨들이 아빠만 보면 열심히 자신의 힘을 열심히 드러낸다지?
아빠의 재혼 상대가 되면 가주가 될 수 있을 거란 꿈을 꾸는 범고래 여성들이 급증했다나.
‘어딜 넘보려고.’
어림도 없다. 아빠의 상대는 내가 열심히 확인을……. 여기까지 생각하다가 살짝 웃었다.
설마하니 이런 생각을 하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며 드러눕는 사이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말한 건 나도 쭉 알아보고 있다.”
눈을 뜬 이후로 물의 힘을 각성하기 위해 별 노력을 다 해 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남은 건 눈을 뜨자마자 찾기 시작한 보물 ‘리니어스’였고.
사실 이 보물 외에도 물의 힘과 관련하여 하나를 더 찾고 싶었다. 이쪽은 물건은 아니고 사람이지만.
“보물 쪽은 네가 두 놈을 굴리고 있을 테니 사람 쪽을 알아보았는데.”
“응, 어떻게 됐어? 이번엔 소식이 좀 있어?”
아빠가 살짝 고개를 내저었다.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없다. 모든 방계를 포함해 쫓겨난 수인까지 추적했지만 그런 이름의 범고래는 존재하지 않는다더군.”
내가 찾고자 하는 건 3회차, 내게 물의 힘을 가르쳤던 스승이었다.
‘설마 그 사람을 다시 찾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나는 곰곰이 과거를 떠올렸다.
리니어스를 손에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허둥거리기 바빴다.
하기야, 앞선 총 세 번의 삶 중 세 번째에서야 겨우 물의 힘을 각성한 데다.
떠돌이였으니, 물의 힘을 다루는 방법을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름이 ‘시저’ 맞나?”
“응. 맞아.”
시저.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여성 범고래 수인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했다.
나도 너와 같은 떠돌이이자, 가문에서 버려진 자라고.
“생각해 보니 가명이었을지도 모르겠어. 몇 년간 뒤졌는데도 나오지 않는 걸 보면 말이야.”
나는 앞선 기억을 꼼꼼히 떠올렸다.
“나를 훈련시킬 때 분명 가위(scissors)를 사용했어. 물의 힘으로 만든 거대한 가위 말이야.”
“이런 것 말인가?”
아빠는 고개를 느릿하게 기울이더니 손끝을 휘둘렀다.
곧 아빠의 손 위로 물로 만든 가위가 만들어졌다. 여러 형태의 가위였다.
나는 그중에서 커다란 정원용 가위를 가리켰다.
“응. 그중에서 저런 거.”
“특이하군.”
“그렇지?”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생각해 보면 가명이 맞고 접근 방식이 달랐던 걸지도 모르겠어.”
가문에서 버려진 사람이 가문이 지어 준 이름을 쓰지 않는 건 당연할지도 모르겠고.
아니면 내게만 이름을 알려 주지 않은 걸지도 몰랐다.
아쉽진 않았다.
그만큼 참, 흘러가는 파도 같았고 바람 같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린 한순간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지. 네가 나중에 잘되더라도 날 찾지는 말렴. 그게 은혜를 갚는 길이란다.”
“스승님은 참 이상한 사람이네요?”
“알면 구르기나 하렴. 50번 남았지? 어디서 요령 피우니?”
“…….”
……생각해 보니, 사람 굴리는 방식이 아빠랑 비슷한데?
아무튼 간에.
‘이번 삶이라고 물의 힘을 사용하는 방식을 바꾸진 않았을 거야.’
물의 힘이란 건 범고래들에게 지문에 가까웠다. 각자 쓰는 고유 무기나 방식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다고 할까.
내가 망치를 즐겨 사용했던 것처럼 말이다.
“물의 힘을 쓸 수 있는 방계는 드물지? 이 사람들 쪽으로 집중해서 한번 알아봐 줄 수 있어?”
아빠가 끄덕였다.
“그리고 하는 김에…… 약혼 운운하는 놈들도 잡아 오지.”
“……걔들은 왜.”
“헛소문이나 퍼트리는 놈은 이 가문에 필요 없다.”
나는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 슬쩍 웃었다. 꾹 참았지만 터져 나왔으므로.
“왜, 아빠. 딸들은 어릴 때 아빠랑 결혼한다고들 하잖아.”
“그런데?”
“나도 어릴 때 한번 말해 줄 걸 그랬다.”
나는 소파에 엎드려 누운 채 양손으로 턱을 괴고 싱글싱글 웃었다.
“아쉽겠어.”
“그런가.”
아빠가 살짝 웃었다.
“결혼은 됐고, 평생…… 끼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결혼은 엄마랑 한 번으로 끝내려고?”
나는 아빠에게 슬쩍 청혼서를 찔렀다가 호되게 당한 방계 가문들을 떠올렸다.
아빠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이내 조금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래.”
나는 아빠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스쳐 지나간 회한을 보았다.
“한 번으로 족하다.”
“…….”
“그녀만 한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진솔하게 툭 흘러나온 목소리가 공기를 잔잔히 울렸다.
‘이젠 솔직하게 말하는구나.’
시선을 들었을 때, 아빠는 언제나 짓곤 하던 냉정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저, 아빠. 전에도 말했지만 엄마는…….”
“살아 있단 이야기 말인가? 아니, 죽었다.”
“…….”
나는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9년 전, 벨루스에게서 엄마가 아직 살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후 나는 언젠가 한번 아빠에게 전했지만. 늘 똑같은 소리로 답했다.
“그녀는 죽었다. 확실해.”
더할 나위 없는 확신이었다.
마치 눈앞에서 죽음을 본 것처럼. 더는 묻지 못했지만 그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왜 벨루스와는 이야기가 상반된 걸까?’
미뤄 둔 이 이야기를 풀 때가 온 것이 아닐까.
나는 이리 생각하며 몸을 일으켰다.
“언제 다시 나갈 생각이지?”
“이제 얼마 안 남았잖아. 근거지가 두 개 정도? 이번엔 꽤 오래 머물다 나가려고 해. 게다가 내일은 내 생일이잖아?”
내 말에 아빠가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싱긋 웃고는 방에서 나왔다. 곧 내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 * *
다음 날, 잠시 시찰을 나갔다던 벨루스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지만,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보다 먼저 찾아온 손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전부터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셋째놈이었다.
‘어제 아주 거나한 결투를 했나 본데……?’
새하얀 뺨에는 보란 듯이 반창고가 붙어 있었다.
더욱 차가워진 표정을 보아하니 이번에도 둘째에게 패배한 모양이었다.
‘사실 이놈이 쓰는 힘은 거의 암살에 맞춰져 있어서 결투엔 불리하긴 하지.’
그렇게 생각하며 놈과 마주 앉았다.
“어제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만 한눈을 팔고 말았어.”
“괜찮아. 결국 시일을 조금 둬도 괜찮으니까 너도 미룬 거잖아?”
“…….”
일단 심심한 위로나 전할까 싶었는데…….
셋째놈에게서 놀라운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보물 ‘리니어스’에 관한 단서를 찾았어.”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