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05화 (205/275)

제205화

한창 고민에 빠져 있는데, 상념을 일깨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근데 그 쪼그만 놈은 어디 갔냐?”

돌아보면, 아틀란이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하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툭 뱉듯이 대꾸했다.

“그건 왜 묻는데?”

“뭐? 그야…… 금붕어 똥처럼 널 따라다니는 놈이 안 보이니까 하는 소리지.”

사람보고 금붕어 똥이 뭐야, 금붕어 똥이. 나는 차갑게 쳐다보고는 고갯짓했다.

“자고 있어.”

조금 전까지 내 무릎을 베고 꾸벅꾸벅 졸길래 침대에서 자라고 옆방으로 보냈다.

내 생일이 다가올수록 마치 겨울잠을 자듯이 잠이 많아졌더라.

예전처럼 자주 보는 게 아니다 보니 조금 아쉽긴 했지만. 어떡하겠어.

‘내 분리 불안 증상이 중증이라서 문제지. 눈에 안 보이면 불안하다니, 이거 원.’

나는 근질거리는 손으로 툭툭 손잡이를 건드리고서 눈을 들어 올렸다.

“어째 갈수록 덜 붙어 있는다? 뭔 떼어 놓으려 할 때는 떨어질 기미조차 없더니.”

“시끄러워.”

그건 내가 제일 잘 아는 일이었다.

분명 에키온은 과거에나 지금이나 나를 제일 따르고 맹목적으로 쳐다보는 건 맞지만.

미묘하게도 조금 다르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대체 어떤 부분이 그런 건지 뾰족하게 꼽을 수는 없지만.

감각이 간질거리곤 했다.

“쓸데없는 소릴 하러 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용건인데?”

“아니, 네가 돌아왔다고 해서 온 거지. 뭐 꼭 용건이 있어야 오냐?”

“그래서 내가 지난번에 왔을 때 시킨 건 다 했고?”

“…….”

아틀란이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눈치를 피하는 모양새가 딱 끝내지 못한 모습이었다.

나는 쯧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아틀란을 스쳐 지나가자, 아틀란은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마치 엄마 고래를 쫓는 아기 고래처럼 졸졸 쫓아왔다.

“뭐야, 뭔데. 말도 안 하고 가냐?”

“일을 끝내지 못한 놈이랑은 할 말 없는데.”

“매정하다?”

“그럼. 내 매력이지.”

내가 피식 웃자, 아틀란이 왈칵 미간을 찌푸렸다. 치사하다나.

‘그러게 누가 일 처리 못하랬나.’

아틀란에게는 리니어스의 추적을 맡겨 두었다. 아틀란뿐만 아니라 아게노르에게도 함께 맡겼는데.

어째 이놈보다는 의기양양한 게 뭔가 알아낸 게 있는 눈치였다.

“셋째는 뭔가 알아낸 게 있는 모양인데.”

“정답이야, 여동생님. 우리 다른 방에 가서 이야기할까? 둘째는 빼고 말이야.”

셋째의 여유로운 말투에 둘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야, 말버릇이 자유분방하다?”

“우리 서열은 유능함으로 매겨지는 것 아니었나? 나는 여동생님이 시키는 일을 해냈고. 넌 아니고?”

“…….”

“차이가 명확하네.”

“오냐. 이 XX 명을 재촉하네. 오늘 연무장으로 따라 나와라.”

“흐음, 그런 말 하면 내가 무서워할 줄 알고, 둘째야?”

“죽을래? 형이라 안 불러?”

어째, 둘째 저놈은 2회차 인생인데 갈수록 영 철이 들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셋째가 더 철든 것처럼 보일 때가 있으니.

‘보고는 조금 뒤에 듣겠네.’

투닥투닥하는 걸 봐서는 금방 연무장으로 향할 성싶었다.

자주 있던 일이었기에 자연스럽게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데.

내 위로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내가 긴 잠에서 눈을 뜨고 다시 3년이란 시간을 보내며.

곧 열여덟 살이 되는 지금 가장 불만인 게 있다면 역시나 성장을 완료한 키가 영 마음에 안 든다는 거다.

‘주변 놈들이 고개를 한참 들어야 보이니 원.’

이번에도 그랬다.

고개를 느릿하게 들어 올리자, 머리통 하나쯤 위에 놓인 조그마한 얼굴이 보였다.

“칼립소, 여기 있었구나.”

지구에서라면 바리톤이나 베이스에 가깝지 않을까. 오싹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들을 때마다 귀가 간지러워 벅벅 긁고 싶은 심정이 되는 게.

내가 이상한 건 아닐 테다.

망막 위로 새하얀 얼굴이 새겨졌다. 하얀 얼굴과 은발처럼 보이는 회색 머리가 살짝 흩날린다.

회색 눈동자가 한없이 무뚝뚝했다.

내게 그림자를 드리운 건 훌쩍 성장한 웨일이었다.

“넌 좀 다정하게 부르지 마. 귀 아파.”

“……그래?”

웨일이 무덤덤하게 끄덕였다.

“노력해 볼게.”

괜한 말이란 걸 알면서도 끄덕여 줄 만큼, 훌쩍 커 버린 게 실감이 났다.

더는 내 퉁명을 가장한 장난스런 모습에 난감해하지도, 어쩔 줄 몰라 하지도 않았다.

대신 조금 다정하게 웃었다.

그리고 어른스럽게.

‘역시 남의 집 애는 빨리 큰다더니.’

세 오빠 중에선 아틀란이 제일 크다. 웨일은 이런 아틀란과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컸다.

하기야 종으로 따지면 해양 생물 중에서 가장 크다는 흰수염고래 아니던가.

‘괜히 다른 이름이 대왕고래가 아니지.’

나는 손을 뻗어서 웨일과 내 키를 가늠해 보려다 포기했다.

그러자 웨일은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얌전히 내 쪽에 고개를 숙여 주었다.

“뭐 하는 거야?”

“음? 머리, 쓰다듬으려 하는 것 아니었어?”

“아닌데.”

“그렇구나.”

얌전히 끄덕이면서도 왜 머리는 안 들어 올리는 건데?

“하지만 나는 좋아해.”

“…….”

“네가 쓰다듬어 주는 거.”

나는 쓰다듬어 주는 대신 손을 내렸다.

“그전에 착한 일부터 하고 와.”

절레절레 고개를 젓는 동시에 웃자, 웨일이 그제야 상체를 들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둘째와 셋째는 기어이 결판을 짓겠다며 연무장으로 향하는 모양이었다.

‘그래 봐야, 2회차를 사는 아틀란은 아직 못 이길 텐데.’

아게노르 자존심도 대단하긴 했다. 하기야 원래가 그런 놈이었지.

게다가 이제 청년기로 접어든 오빠들이니, 한창 혈기왕성함을 감추지 못할 때이기도 했다.

나는 아게노르의 보고를 듣는 건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향했다.

웨일이 내 옆을 자연스럽게 쫓아왔다.

“어디 가려고?”

“널 보러 온 건데, 칼립소.”

“그럼 봤네.”

“아직 용건이 남았어. 진단해야 하니까.”

내가 황무지로 직접 나가게 된 뒤로, 웨일은 내가 돌아올 때마다 진단을 진행하곤 했다.

혹시나 아플지도 모른다면서.

‘가문에 힐러가 있는 건 참 좋은 일이긴 한데.’

나는 웨일을 물끄러미 보았다.

참 잘생긴 얼굴이었다.

날렵한 턱선이라거나, 반듯한 콧날. 큼지막한 어깨로 이어진 탄탄한 몸은.

어느 수인 아가씨가 보든 홀리듯 쳐다보게끔 성장한 웨일이었다.

특히나 무뚝뚝한 얼굴과 다르게 이런 무던한 낯으로 다정한 성격이 최고라나.

내가 아니라 주변 하녀들이 그러더라고.

모두가 내가 성년이 되는 날을 기점으로 해서 곧 약혼을 올릴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웨일, 말했지만 더는 잘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하지만 나와 웨일은 서로 알고 있다.

나는 시간의 틈에서 웨일의 수명을 돌려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늘 마음에 걸렸던 그 10년의 수명을 되돌려 줄 수 있단 것에 얼마나 기뻤던지.

게다가 이 방법은 웨일과 내가 맺은 흰수염고래들만의 ‘반려’ 의식 또한 되돌릴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단 거다.

“네겐 항상 진심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어.”

나는 눈을 뜨고 얼마 있지 않아 웨일에게 이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은혜는 평생 갚을 거야.”

사실 시간의 틈에서 3년, 다시 긴 잠에 빠져들어 3년.

6년이란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 얘가 나를 계속 좋아할 거라 생각 못 했지.

생각해 보라.

나와 얘가 만난 시간보다 배 이상의 시간이 흐르는데.

그 시간 동안 좋아하는 게 가능한가?

누군가는 한순간의 추억으로 평생을 산다고는 하지만.

긴 시간을 반복해 살아온 내겐 그건 사실 그다지 좋게 생각되지 않았다.

한순간은 한순간으로 두는 것이 좋다.

‘뭐, 어린 날의 치기로 좋아하는 거니까. 이러다 말 거라고.’

이렇게 생각한 내 잘못이란 걸 알게 된 것도 있겠지만.

성장할수록 알겠더라고.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랑 평생 살지 마.”

내가 이 애를 참 좋아하지만 사랑이 아닌데.

사랑이 되지 않을 것 같은데.

이를 알면서 평생 옆에 두는 건 이기적인 일이라고.

“나도 네가 더 좋아지면서 알겠더라. 네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는 이렇게 둬선 안 된다고.”

그래서 웨일에게 모든 사실을 토로했다. 자유롭게 해 주겠다고.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도 꼭 세 번째였다.

“알아. 지난번에도 말했잖아.”

“그래. 그러니까 매번 진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거야. 네 기력 아까워. 다치면 꼭 이야기할게. 맹세도 해 줄까?”

“무슨 말 하고 싶은 건지 알겠어.”

웨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임마저 무덤덤한 듯 부드러웠다.

모든 걸 이해할 수 있다는 눈동자.

항상 느끼는 거지만 꼭 흰수염고래를 정말 인간으로 만들면 이렇겠구나 싶은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관계로 계속 옆에 두면 안 된다고 느낀 거다.

웨일은 이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내가 단호하다며 탓하지 않았다.

그저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였다.

웨일은 잠시 좌우로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는 것 같더니, 한 걸음 다가왔다.

그러더니 빤히 보는데, 내가 물러나지 않고 시선을 마주하자 작게 웃고는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귀로 오싹할 만큼 낮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하지만, 칼립소. 아직 유예 기간이 있잖아?”

그랬다.

나는 웨일의 10년 수명도, 반려 의식도 무로 돌릴 방법을 알아냈지만.

문제는 이 방법이…….

“그때까지, 넌 내가 열심히 네 마음을 돌려 보려는 노력을 해도 된다고 허락했고.”

“…….”

“나는 네가 허락한 걸 마음껏 이용하는 거야.”

내가 ‘물의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웨일이 웃었다.

“응? 예비 반려님.”

완연히 성년이 된 얼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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