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03화 (203/275)

제203화

오큘라 아콰시아델의 첫째 아들과 그 부인이 일으킨 내란이었다.

칼립소의 뜻을 이어받아 피에르가 다스리는 아콰시아델은 오큘라가 이끌던 때와는 궤를 달리했다.

더는 약육강식만을 외치지 않는 가문의 변화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늘어났다.

헤일라는 수완 좋게도 불만을 가진 모든 이들을 포섭했고, 틈을 노렸다.

피에르 하나만 죽으면 모든 게 해결되리란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건 오만이었다.

표면상으로 내란을 이끌던 대장 ‘로데센’을 죽인 건, 피에르가 아니었다.

“미안하게 됐어요. 아버지.”

지금까지 조용히 자신의 정체를 숨겨온 리리벨이었다.

그녀는 마치 이 내란이 일어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리리벨은 안쪽에서부터 차분히 무너트렸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모친인 헤일라가 악에 받쳐 덤벼들었으나.

이마저도 해결해 냈다.

“꺄하하. 왜요, 자식 취급하지 않던 딸이 이러니까 신기한가요?”

“……언제부터 그년을 따랐니, 내 딸? 넌, 네 선택을 후회하게 될 거란다.”

로데센의 시체를 끌어안은 채 이를 아득바득 갈던 헤일라가 사라졌다.

감옥에 가둬 두었건만 감쪽같이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내란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붙잡히거나 항복했다.

그 이후로 투항한 이들이 실각하고 세대교체가 될 즈음.

도망간 이들이 투합하여 두 번째 내란이 일어났지만, 이는 첫 번째 내란보다 쉽게 제압되었다.

놀랍게도 이들을 제압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조용히 사라져 모두가 어디로 사라진 줄도 몰랐던 전 가주 ‘오큘라 아콰시아델’이었으니까.

그녀는 초췌한 낯으로 나타나 두 번째 반란을 일으킨 범고래의 머리를 던지고는.

다시 홀연히 사라졌다.

그리고 이런 사건이 모두 끝날 무렵에…….

칼립소가 눈을 떴다.

“어휴, 그래도 눈을 뜨신 게 어디야. 눈 뜨자마자 또 바쁘셨잖아.”

“뭐…… 어쩔 수 없었지.”

칼립소가 눈을 떴을 땐, 시간의 틈으로 들어가고서 무려 6년이 지난 뒤였다.

이미 가문의 모든 사람은 피에르를 진정한 가주로 인정한 뒤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칼립소가 넘어야 할 산은 피에르가 되어 버렸다.

칼립소는 자신이 잠들었을 적 소식을 가만히 듣더니 유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재밌게 돌아가네.”

눈을 떴더니, 어려운 과제가 주어져서 삶이 더 다채로워졌다나.

‘역시 범상치 않은 분이시라니까…….’

게다가 칼립소는 자신이 생각한 최악의 상황이 일어난 건 아니라며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칼립소의 시중을 들던 데데 입장에선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피에르는 칼립소가 눈을 뜬 즉시 가주 위를 양도하려 했지만.

칼립소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아콰시아델에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무려 3년 가까이 발목을 잡은 그 문제는…….

“아, 저기 가주님 오신다. 나 먼저 갈게. 오빠!”

“자, 잠깐. 데데! 데데!”

타타가 데데를 붙잡으려다가 멈칫했다. 가주님 좀 한번 뵙게 해 달라고 찾아온 것이었건만.

‘오늘도 뵙긴 어렵겠네.’

타타가 한숨을 쉬며 깔끔히 포기했다.

암묵적으로 칼립소를 ‘가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지금의 칼립소는 정식 가주가 아닌.

아직도 피에르를 표면상 내세운 채 움직이는 언더커버였다.

게다가 한창 바빠서 보기도 어려운 데다가…….

주변에 진을 치고 있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젊은 청년, 혹은 미혼 청년만 경계하는 이들이 말이다.

‘아게노르 님 손에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기 싫으면 조용히 몸 사려야지.’

소심한 타타는 알아서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타타의 눈이 향한 곳에 우뚝 선 사람이 당당하게 걸어가고 있었다.

하나로 묶어 허리까지 늘어트린 머리카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탄탄하지만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가녀린 허리며 길쭉한 팔다리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얼마나 폭발적인 힘을 가진 건강한 신체인지는 타타도 잘 알았다.

새하얀 얼굴에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맑고 청순한 얼굴이었다.

저런 얼굴로 휘두르는 주먹을 생각하면 목 뒤의 솜털이 삐죽 서는 기분이지만.

‘미인이시지.’

……확실히 피에르와 그녀의 오빠들이 신경 쓸 수밖에 없을 법했다.

* * *

“데데!”

칼립소는 쪼르르 달려온 데데를 보고서 활짝 웃었다.

볕이 드리운 싱그러운 미소는 지나가던 이의 시선을 확 사로잡는 청초한 매력이 있었다.

성장한 칼립소는 부친이나 오빠처럼 키가 훌쩍 크진 않았지만 딱히 실망하진 않았다.

회귀자의 삶이란 게 그렇다.

‘성장한 내 모습을 스포당하는 느낌이란.’

그저 영양 상태가 좋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차이가 있을 뿐.

이번엔 풍족하게 자랐지만 키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아쉬운 마음이었다.

‘키가 더 크면 싸움이 편할 텐데 말이지.’

칼립소가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이제 막 돌아오신 건가요?”

“응, 맞아.”

칼립소는 데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걸치고 있던 망토의 단추를 하나 풀어 헤쳤다.

확실히 칼립소의 옷차림은 어딘가에 다녀온 것처럼 단출한 의상이었다.

“여전히 그놈들, 황무지에 숨어다녀서 말이지. 도통 귀찮은 게 아니네.”

황무지에서 거센 싸움이 있었던 걸까. 뒹굴다 온 건지 먼지도 쌓여 있었다.

칼립소는 뺨을 문질렀다.

“뺨이 근질근질하네.”

데데는 이에 칼립소의 뺨을 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아주 작은 실금이긴 했지만 피가 흐르고 있었으니까.

이렇게 오셨단 말인가?

데데가 놀라 손을 뻗으려는 찰나 칼립소의 옆에서 불쑥 손 하나가 뻗어 나왔다.

“칼립소 님, 피나요. 피!”

데데와 칼립소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돌아갔다.

그곳엔 새하얀 곱슬머리를 가진 청년이 서 있었다.

솜사탕 혹은 흰 뭉게구름 같은 머리카락이었다. 새까만 눈동자는 동글동글했다.

전체적으로 둥글고 순하게 생긴 남자였다.

하얀 뺨은 핏줄이 비쳐 보일 만큼 연하고 뽀얗게 보였다.

남자가 염려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치면 안 돼요, 칼립소 님.”

남자는 혼을 빼는 듯한 얼굴로 자연스럽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칼립소가 뺨에 닿는 손수건을 잡았다. 그러더니 웃어 보였다.

“루가.”

이름을 불린 청년, 루가가 기쁘다는 듯 활짝 웃었다.

“네!”

“어쩐 일로 혼자야?”

“어머니 대신 왔어요. 오늘 돌아오신다고 들었는데, 제가 타이밍을 잘 맞췄나 봐요.”

“그래, 그렇네? 너랑 데데가 지금 돌아와서 처음 보는 사람이야.”

칼립소가 걸어가자 루가가 자연스럽게 옆을 따랐다.

“네가 차기 가주가 된 건 확실해진 모양이네.”

“네. 맞아요.”

루가는 벨루가 가문의 차기 가주가 될 예정이었다.

데데가 슬쩍 한 걸음 떨어졌다. 얼굴엔 살짝 난감한 표정을 띤 채였다.

벨루가 가문의 루가.

이제는 모르는 이가 없는 이름이었다. 좋은 쪽이라면 벨루가 가문의 후계자가 가주만큼이나 유능하다는 쪽이겠고.

우스운 건, 눈을 뜬 칼립소 앞에서는 세상 순한 듯 웃었기에 칼립소는 선뜻 이 얼굴을 믿는다는 점이었다.

“이번엔 가문에 조금 오래 계시나요?”

“음, 글쎄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은 그래.”

칼립소가 덤덤하게 자신의 뒷목을 문질렀다. 뻐근한 듯 목을 이리저리 움직이기도 했다.

“뭔 문어처럼 감쪽같이 숨었다가 나타나는 놈들 때문에 말이지.”

“아직 기승이군요.”

“그렇지. 소수지만 게릴라전으로 움직이니 얼마나 귀찮은지.”

칼립소가 어깨를 으쓱했다.

“게다가 내일이면 나도 성인이잖아?”

칼립소는 잠시 하늘을 보다가 평온하게 말했다.

“약혼해야 할지도.”

칼립소는 가만히 걷다가 문득 고개를 돌렸다. 루가가 걷지 않은 채 멈춰 있었다.

칼립소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루가?”

루가는 무어라 하려 입을 달싹이려다 이내 예쁘게 웃었다.

“……잠시 급한 일정이 떠올라서, 제가 다시 찾아뵈어도 될까요?”

“응? 그렇게 해.”

칼립소가 대수롭지 않게 끄덕이자, 루가가 고개를 숙이고는 돌아섰다.

지켜보던 데데는 안타깝다는 듯 쳐다보다가 고개를 슬쩍 내저었다.

한편 루가는 속으로 참았던 한숨을 쉬었다.

이거야 원, 소꿉친구로 시작했던 이 감정이 전하지도 못한 채 좌절되는 기분이란.

청년이 된 루가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도전해 보기엔…… 라이벌이 너무 강력한 탓도 있을 것이다.

* * *

“음, 많이 바빴나 보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루가가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 그것도 말하지 않고 돌아간 걸 보면 말이다.

“아하하…….”

데데가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할 말이 있어 보였는데, 데데의 입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다만 이렇게 슬쩍 말할 뿐이었다.

“오늘 오빠가 다녀갔는데, 조만간 뵙고 싶다고 했어요.”

“아, 타타? 언제든 오라고 그래. 또 나가기 전에 봐야겠네.”

“네.”

데데가 결심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꼭, 꼬옥 저랑 같이 찾아 뵐게요.”

“응? 어, 그래……?”

나는 눈을 깜빡이면서도 끄덕였다. 어째, 결사항전을 앞둔 장수 같은 모습이었다.

우리는 막 저택에 들어서고 있었다. 가주 대리가 된 아빠는 본 저택에서 업무를 보았지만 잠은 이전의 건물을 사용했다.

본성의 모든 건 자기 게 아니라나.

새삼 지난 일들이 주르륵 떠올랐다.

시간의 틈에서 있었던 3년. 그리고 나오자마자 잠든 것.

잠든 동안 꿈을 꿨던 일.

긴 잠에서 눈을 뜨자마자 일어난 문제로 개판 되기 전에 열심히 발로 뛰어다닌 일까지.

‘그동안 가문을 뜻대로 할 수 있던 순간도 무수했을 텐데, 이렇게 욕심이 없는 것도 대단해.’

지난 시간 동안 어색했던 일은 꼽아 보자면.

‘눈을 떠보니 내 몸이 생각지 못하게 커져 있었다는 거려나.’

3년 동안 잠들어 있었으니 당연했다.

눈을 떴을 때 눈시울이 붉어진 수하들과 가족들의 모습을 본 건 기분이 묘했더랬지.

아무튼 우리가 들어선 건물은 아빠의 저택이었다.

문을 여는 순간 도도도 조그마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습관처럼 한쪽 다리를 접어 앉아, 팔을 벌렸다.

포옥!

곧 품에 누군가 조금 모자라게 폭 들어왔다.

나는 꼬옥 안긴 대상을 향해 모자란 만큼 꾹 안아 주었다.

“칼립소.”

맑은 목소리에 나는 절로 웃었다.

“응, 에키온.”

나는 에키온을 바라보며 아주 잠깐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간 잘 지냈지?”

에키온은 9년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외관이었다.

아니, 아주 조금 커진 정도랄까.

이제 나와 서 있으면 누가 봐도 나이 차가 꽤 나는 남매처럼 보일 터였다.

나는 몰래 쓰게 웃었다.

이렇게 된 건 모두 내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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