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202화 (202/275)

제202화

칼립소의 표정은 냉랭했다.

그리고 텅 비어 있었다.

눈앞의 오큘라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사과하세요.”

오큘라의 눈앞으로 칼립소가 살아 왔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용 공작이 남긴 저주였다.

“가진 입을 자유롭게 놀리겠다는데, 누가 뭐라 하겠어요.”

“…….”

“하지만 제가 받아 줄 거라 가정하시면 안 되죠.”

온몸의 물을 모두 내보낼 것처럼 서럽게 울며 자신을 간절하게 바라보던 손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 얼굴이 지워지며 눈앞의 칼립소가 다시 보였다.

담담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뻔뻔하게.”

눈물이 메마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겪었을까.

얼마 전의 자신이라면 콧방귀를 뀌었을 이야기지만 이제는 달랐다.

오큘라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축여도 축여도 채울 수 없는 갈증을 얻은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어떻게 했어야 한단 말인가?

약한 개체였다.

자연에서 약육강식이 당연할진대, 동물이 그대로 인간이 된 수인들에게도 당연한 일 아니던가?

실제로 자신이 가주에 오른 뒤에 아콰시아델은 더욱 번창했다.

육지 동물 놈들은 여전히 수중 동물을 무시했지만 자신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기강을 세우고 위엄을 다졌다.

자신의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외로워요.”

어린 칼립소가 흑표범 저택에서 중얼거렸다.

오큘라는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타인의 기억이 침범해 오자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여태 몰랐는데, 꿈이란 처벌로 쓰기에 참 적절했다.

오큘라는 칼립소가 과거 느낀 감정마저도 똑같이 느껴야만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자연스럽게 알았다.

외로움.

정점에 오른 뒤 수십 년이 흘렀다.

어느 순간 벌레 좀먹듯 천천히 찾아오는 불면, 공허함.

하지만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그림자가 생겨나며 빈 껍데기만 남는 듯한 기분.

이것의 정체가 칼립소가 흑표범 저택에서 홀로 내쳐져 느낀 외로움과 같은 것임을.

종류는 다를지 모르나…… 본질은 같았다.

그 순간 오큘라는 더 큰 수렁에 빠져들었다.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눈에 찬 혈육을, 진정 남은 생을 걸어 보고 싶은 손녀를 만났으나.

손녀는 어느 날의 자신이 만든 가련한 피해자였으며, 이를 양분 삼아 괴물이 되어 버린 이였다.

오큘라는 입을 달싹였다.

사과도 할 수 없다면.

앞으로 자신은 이렇게 끊임없이 불면에 시달리며, 토로할 곳 없는 외로움에 파묻혀 남은 생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한평생 정점이었던 자리에서도 내려왔다.

스스로 내려온 것이었지만, 그녀는 알았다.

시기의 차이일 뿐.

이대로 다시 가주 위를 차지하더라도 뺏길 자리라는 것을.

시간과 시대는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오큘라는 자신이 앉아 있는 자리가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늪과 같은 진득함이 발목을 잡아당겼다.

오늘 밤에도 자신은 눈앞의 손녀가 죽는 모습을 볼 것이다.

처절하게 자신을 부르며 증오하거나. 외롭게 죽어 가는 모습을.

아아.

새까맣게 몰려오는 저것의 이름은 절망이로구나.

“이제 나를 어떻게 할 것이냐.”

칼립소의 푸르른 눈이, 커다랗지만 어딘가 굽어 버린 노인을 보았다.

왜일까, 눈앞의 있는 노인은 더는 오만하지 않았다.

마음이 꺾인 자의 시선이다.

왜?

하지만 칼립소가 알 필요가 있겠는가.

그녀는 오랜 시간 원망했던 대상에게서 원망마저 지워 버렸다.

사랑의 반댓말은 증오가 아니다.

지난 생에서. 그리고 다시 이번 생에서 가슴을 수하로, 가족으로 채운 칼립소에게는 더는 미련이 없는 대상이었다.

복수와 증오를 지워 내자.

무관심만이 남았다.

“당신을 보낼 곳이 있어요.”

눈앞의 노인은 이제 언젠가 수많은 아이를 죽게 둔 자일 뿐이었다.

말로 쉽게 던지는 사과는 누가 못하겠나?

속죄는 그따위로 하는 게 아니다.

칼립소는 자신이 자라 온 낡은 집을 떠올렸다.

가주의 명 하나에 부모와 떨어져 시름시름 앓다 죽어 버린 아이들을 떠올렸다.

“당신이 죽인 아이들의 부모를 하나씩 만나고 오세요.”

내가 없는 3년 동안 당신은 과거를 돌아보며 방랑하기를.

한평생 권력을 탐한 당신에겐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할머니가 초라한 환경에서 모두에게 잊혀지면 좋겠네요.”

칼립소는 가만히 어떤 상상을 해 보았다.

“당신의 남은 생이 편할 거라 생각하지 마세요. 잔인하게 굴 생각이라서요. 고작 어릴 때 냉대했다고, 방치했다고 억울해하진 마세요. 내가 강하지 않았다면 어디로 팔려 갔을지 모르잖아요?”

정말로 이 할머니가 자신에게 의미 있는 스승이나 가족이 되어 가르치는 꿈.

상상 속 자신은 할머니에게 당당하게 대들었다. 할머니는 화내지 않고 흐뭇하게 자신을 보았다.

말도 안 되는 꿈이었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초라하고 비루한 꼴이 되길 바라요.”

“…….”

“그러다가 어느 날 초라한 내 자신이 너무 싫어져서…… 그만 죽고 싶은 날이 오면, 날 찾아오세요.”

“…….”

“죽여드릴게요.”

당신이 나를 흑표범이란 죽음의 길로 몇 번이고 인도했으니.

나라고 그리 못 할까.

“죽음만은 원하는 죽음을 드리죠.”

눈앞의 칼립소는 화사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은 회귀자만이 가질 수 있는 광기가 어른거렸다.

“내 마지막 배려예요.”

좋죠?

* * *

전 가주 오큘라 아콰시아델의 유배지가 결정되었다.

이로부터 세 시간 뒤, 칼립소는 투스와 함께 시간의 틈으로 들어갔다.

3년 뒤, 무엇이 자신을 기다릴지 짐작해 보다가 상상의 끝을 맺지 못한 채로.

무엇이 기다리든 뭐든 해결할 자신이 있었으니, 그 상상은 끝을 맺지 못해도 괜찮았다.

“이번 생은 참 재밌어.”

칼립소가 개운한 얼굴로 웃으며 시간의 틈에서 눈을 감았다.

눈을 뜨면 자신을 기다리던 용 공작을 볼 수 있을 것이다.

03.

청산과 범고래의 진정한 행복

-9년 뒤.

오래전 수인들은 종에 따라, 혹은 환경, 혹은 저들만의 전통에 따라 성인으로 보는 나이가 각각 달랐다.

그러나 제국이 들어선 뒤로 성년의 나이는 ‘열여덟 살’로 법제화되었다.

“그러니까, ‘그분’께서 내일이면 성년이 되신단 이야기잖아.”

“그렇지! 너무 신기하지 않아 오빠?”

청어 수인들의 가주 타타는 조금 소심한 편이었다.

이 성격으로 어찌 가주가 되었느냐, 그가 가진 특기가 제일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는 소심함을 신중함과 차분함으로 승화한 케이스였다.

무엇보다 그에겐 대범한 축에 속하는 데데라는 여동생이 있었고.

데데는 칼립소 아콰시아델의 직속 하녀이자 이제는 시녀이기도 했다.

“그분께서 치어처럼 어리던 시절이 어제 같은데 말이야.”

“……말은 똑바로 하자, 데데.”

현재 이 거대한 아콰시아델의 가주 칼립소 말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그분은 단 한 번도 어린 물고기 같았던 적이 없으셨어.”

타타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하지만 여동생의 말에서 일부는 공감했다.

시간이 참 빨랐다.

9년 전, 칼립소는 시간의 틈에 들어가면서 자신은 깊은 잠에 빠졌다고 소문을 퍼트리게 했지만.

타타나 혹은 일리아 같은 자신의 편에 선 자들에게는 맹세를 전제로 진실을 알리고 들어갔다.

‘많은 일이 있었어.’

그렇게 시간의 틈으로 사라졌다가 꼭 3년 뒤에 나타났다.

문제는 이때…….

“돌아온 가주님이 정말로 잠에 빠졌을 때만 해도 모두가 식겁했는데 말이야…….”

“오빠, 말조심해. 피에르 님이나, 혹은 벨루스 님, 아틀란 님, 아게노르 님 앞에서 그 얘기 조금이라도 꺼내면 큰일 나는 거 알지?”

“……내, 내가 미쳤어. 꺼내게?”

칼립소가 약속한 3년이 지나고 다시 돌아왔을 때.

애석하게도 칼립소는 자신의 발로 시간의 틈을 걸어 나오지 못했다.

정확하게는, 잘 나오고서 그대로 쓰러져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자신이 소문을 퍼트렸던 대로 깊은 잠에 빠져버린 것이다.

병도, 기절한 것도 아니었다.

원인 모를 잠에 빠진 칼립소의 모습에 그야말로 아콰시아델엔 비상이 걸렸다.

당시 가주 대리였던 피에르의 모습을 떠올리면 타타는 지금도 등골이 섬뜩했다.

“……세상 모든 걸 뒤져서라도 방법과 이유를 알아내.”

칼립소가 눈을 뜨지 않으면, 이 거대한 가문이 아무짝에도 필요 없는 것처럼 굴었는데, 그의 모습은 폭풍 직전의 고요함을 닮아 있었다.

용 공작의 권속인 투스만이 이건 시간의 틈에서 오래 보낸 자의 후유증이라고 외쳤지만.

칼립소의 잠이 길어지면서 여기에 귀를 기울이는 자는 없어졌다.

그나마 용 공작이 옆에 있어서 잠에 빠진 시간이 줄어들 거라는 말이 없었더라면…….

아마 용 공작은 분노한 피에르나 삼형제에게 맞아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칼립소는 꼭 3년을 더 자고 나서야 일어났다.

“일어나셨으니 망정이지.”

“어휴, 일어난 것도 내란 중에 일어나셨잖아.”

문제는 칼립소가 잠든 사이 피에르가 칼립소를 돌보느라 내정을 잠시 던져 두었단 점이었다.

벨루스가 책임을 졌지만 피에르의 눈에서 벗어난 자들이 은밀하게 움직였고.

한 차례 반란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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