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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201화 (201/275)

제201화

그러나 수인이 소년의 정체에 대해 떠올렸을 때는, 소년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도움을 받은 약한 수인들은 제대로 감사 인사도 전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먹을 거라도 줄걸…….”

“그러게. 뭐, 그래도 다시 보지 않겠어? 이 일대를 돌아다니는 것 같으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들도 알고 있었다.

황무지는 꽤 넓었으므로 다시 볼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릴지도 모른다는 걸.

“그나저나 저 아이가 정말 혹등고래 수인이라고?”

수인 하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고래 수인이 왜 아콰시아델에 있지 않고 여기에? 그것도 어린아이가 말이야.”

“그러게. 최근에 피난 온 놀래기 수인이 돌고래 수인들이 떼거지로 이동하는 걸 봤다고 했는데 말이야. 혹등고래 수인들도 주거지를 옮기는 건가?”

혹등고래들은 대대로 범고래 주변에서 그들을 모시는 이들이었다.

“인연이 되면 다시 보지 않겠나. 거 어린 소년이 정말 잘 싸우는구먼.”

수인 하나가 입을 쩝쩝 다시며 아쉬움을 남겼다.

한편, 자박자박 걸어가던 혹등고래 소년은 걸어가다 말고 그대로 무너졌다.

근처 바위에 등을 기댄 채 후 숨을 내쉬었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길어 눈을 가렸다.

조금 전 수인들이 봤다면 저렇게 눈을 가렸는데 어떻게 싸운 건지 의문을 가졌을 터였다.

“…….”

곱슬기가 있는 데다 덥수룩한 머리 때문에 음침해 보이는 인상마저 들었다.

그러나 소년에게는 겉모습이야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단 한 사람, 그가 원하는 사람이 자신을 보아 주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소년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한곳을 향했다.

쭉 간다면 아콰시아델 영지가 있을 방향이었다.

머리카락 아래로 드러난 소년의 턱은 반듯하고 단정했다.

머리카락 사이, 음울하게 가라앉은 눈이 한참이나 하늘을 향한다.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가주님.”

작게 중얼거린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비척비척 걸었다.

다음 장소를 향해서.

그의 주군은 늘 아니라고 이야기했지만. 선하고 곧아서.

약한 자들이 핍박받는 것을 두고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곳에서 약한 수인을 골라 착취하는 몇몇 상어 일파들은 자신이 강해지는 데 이용할 가치가 충분했다.

강해지면, 강해진다면…….

소년, 혹등고래 수인 ‘하우저’가 비척비척 일어나 걸었다.

당신에게 꼭 주고 싶은 것이 있노라고.

소년의 손에는 신비로운 느낌이 가득한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달랑 흔들렸다.

* * *

‘좋아, 대충 다 해결된 것 같지?’

3일만 집을 비워도 먼지가 쌓이고 차가워지는 게 집이라면.

주인이 3년씩이나 자리를 비우는 가문은 어떨까.

많은 것이 바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것을 각오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함께 시간을 보낼 사람은, 리리벨과 아빠의 은인이었다.

눈앞에서 회색 머리통이 꼼지락 움직였다.

“그러니까, 이걸 네가 만들었다고?”

나는 웨일이 만들었다는 음식을 냠, 입에 넣은 채 우물거렸다.

내 모습이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 되다 보니, 아빠 저택 근처에서도 아주 깊숙한 숲 사이에 의자를 덩그러니 가져다 둔.

멋없는 자리였다.

“오, 맛있는데?”

웨일이 느릿하게 끄덕였다.

“나, 가사 잘해.”

나는 순간 뱉어낼 뻔한 것을 참았다.

“음, 그렇구나.”

남이 열심히 잘 만들어 준 걸 뱉으면 안 되지.

“가사는 레바이도 잘하지 않나?”

“응, 형한테 배웠어. 아직 형보다는 모자라지만……. 곧 더 잘하게 될 거야.”

“그렇구나.”

나는 입가에 묻은 부스러기를 떼어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차분하게 말했다.

“웨일, 이번에 시간의 틈에 가게 된다면 말이야.”

“응.”

웨일에게도 내가 가는 이유를 차근차근히 말한 뒤였고. 웨일은 아무래도 좋다고 했다.

어차피 우리는 오래 볼 사이니 3년쯤은 기다릴 수 있다나.

‘잠시 내가 군대에 가고 웨일이 기다려 주는 애인이 된 기분이었지.’

보통 이런 사이를 두고 ‘곰신과 군화’라고 하던데, 군인의 입장이 되어 볼 줄이야. 상상도 못 했지.

나는 무덤덤한 표정 뒤로 잘생긴 소년의 얼굴을 보다 본론을 말했다.

“네가 날 위해 희생한 10년의 수명을 다시 돌려줄 수 있는지. 그런 방법은 없는지. 찾아볼 거야.”

“…….”

“네가 해 준 게 부담스럽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내가 아무래도 이렇게 생겨 먹어서 그런가 봐.”

나는 포크를 고쳐 잡았다.

“내가 주는 건 괜찮은데, 받는 건 조금 어려워. 특히나 스스로를 희생한 대가는 말이야.”

나는 평온하게 말했다. 마치 준비한 듯이 척척 흘러나오는 말들에 웨일은 잠시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그리고 너도 3년간 한번 생각해 보면 좋겠어. 그 사이에 네게도 여러 일이 있을 테고, 나를 좋아하는 게 또 다른 의미로 변할 수도 있잖아?”

친구라거나. 말하지 않은 의미를 알아차린 듯 소년의 얼굴이 딱딱해졌다.

“레바이가 키운 동생이니까. 게다가 넌 눈치도 빠르고 똑똑하니 내 말 잘 알 거라 생각해.”

“……알았어.”

웨일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반듯한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러니까 3년이 지난 뒤에도 내가 변함없으면 그땐 믿을 거라는 거구나. 내 마음.”

음, 내가 혹시 이 애의 스위치 같은 걸 누른 걸까.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 그 3년간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건데 말이지.

마지막 시간이 평온하게 흘러갔다.

* * *

모두에게 인사를 남기고 아빠와도 시간을 보냈다.

물론 짤막하게 인사 나눈 거지만 말이다.

‘어차피 다시 볼 건데 이 정도면 충분하지 뭐.’

이렇게 말했더니 셋째놈은 그렇게 서운한 말이 어딨냐고 했다.

너무 오랜 삶을 떠돌았기 때문일까. 가끔은 시간 감각이 없는 것 같긴 하다.

“그럼, 아빠 가 볼게.”

배웅하는 인원은 아빠뿐이었다.

내가 이렇게 바랐기 때문이다.

어깨엔 투스가 본체 모습으로 앉아 있었고,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될 터였다.

그런데 대답을 해 줘야 할 아빠가 묵묵부답이었다.

대신 아빠의 입이 열렸을 때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너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데, 볼 건가?”

딱 30분.

내가 시간의 틈으로 가는 시간이 잠시 더 미뤄졌다.

지하 공간이었다.

커다란 싸움이 일어나도 끄떡 없는 곳인 데다가, 문밖에서는 아빠가 대기하고 있을 터였다.

가만히 오감을 곤두세우면, 아빠가 가진 물의 힘이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참 청량한 느낌이라니까.’

생긴 건 피곤한 마피아처럼 생겨서는, 청량이랑은 저기 북극과 남극 정도로 먼 사람인데 말이다.

“그래서 할 말은 무엇인가요?”

나는 앞을 응시했다.

바로 면담을 요청한, 전 가주 오큘라 아콰시아델을 바라보면서.

* * *

오큘라는 칼립소의 말에 잠시 침묵했다.

무시하기보다는 어떤 말로 시작하면 좋을지 고민했기 때문이었다.

면담은 자신이 요청한 것이었다.

“피에르 그놈을 가주로 세웠을 때의 영향을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겠지?”

오큘라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작을 이리하려 한 것이 아닌데.

세월이 참 무서웠다.

이제 그녀는 하고 싶은 말도 이렇듯 거만하고 시비조로 하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부드러움? 다감함? 약자의 것이라 치부해 버린 지 몇십여 년이 흘렀다.

오큘라는 눈앞의 이 조그마한 것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는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의 눈 밑은 오랫동안 자지 못한 사람처럼 새까맸다.

칼립소와의 전투에서 그녀가 칼립소에게 봐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깨끗하게 졌다.

분함도 들지 않았고, 오히려 공허함을 느낀 건.

용 공작의 저주 때문이었을까.

이렇게 보니 자신의 손녀는 늘 똑같았다. 또래보다 작았고 또래보다 허약해 보였다.

그저 과거에는 벌벌 떨었고 지금은 반듯하게 앉아 있을 뿐.

겁에 질리든 아니든 신기할 정도로 눈을 마주쳐 오던 아이였다.

“그럼요. 그런 영향 하나 생각 못 할까?”

“가문이 엉망이 될 거다.”

남성 범고래가 가주가 되는 영향력은 생각보다 더 클 것이다.

오큘라가 괜히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칼립소가 두각을 드러내기 전까지 시커먼 손주들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두렵지 않느냐? 내가 이대로 가문을 나가 저 황무지의 상어놈들과 손을 잡을 수도 있다.”

“아하. 새로운 세력이 되시려고요?”

내용만 제외하고 보자면 평온한 목소리로 나누는 대화였다.

“아빠가 맡아서 엉망이 되든 파손이 되든 남에게 뺏기든. 난 언제든 원래대로 되돌릴 자신도, 다시 뺏어 올 자신 있어요.”

“3년이란 시간을 두는 걸 보니 어디로 가는 모양이구나.”

“상관없잖아요?”

오큘라는 침묵했다. 가만히 테이블을 노려보던 노년의 범고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이가 무색하게 젊어 보이는 낯이었지만 눈에는 세월이 담겨 있었다.

“나는, 너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최대한 가다듬고 부드러운 티라도 내보려 노력했다.

“본래 범고래는 할머니가 손녀를 가르치지.”

오큘라는 눈앞의 손녀 어깨에 손을 올리는 자신의 모습을 잠시 상상했다.

상상이란 걸 해 본 지 너무 오래되어 낡은 기능이 삐걱삐걱 움직였다.

“가주가 되어 보련?”

“…….”

침묵 속에서 오큘라가 재차 말했다.

“이렇게 말했겠지. 나는.”

상상 속에서 그녀는 조그마한 손녀를 상대로 손을 내밀고, 조그마한 몸보다 더 쬐끄마한, 마치 조약돌 같은 손을 내밀어 잡았다.

어디까지나, 상상 속에서는 손을 잡았다.

그랬다는 소리다.

“그래요? 그렇구나.”

칼립소는 지극히 태연하다 못해 차가운 얼굴이었다.

오큘라는 퀭하고 피로한 얼굴로 한참이나 칼립소를 응시했다.

첩첩이 쌓인 세월은 참으로 무서웠다.

그래, 무섭다.

오큘라는 참으로 오랜만에 두려움이라는 것을 제 사전에서 꺼내 들었다.

입이 달싹 움직였다.

“……미안하구나.”

오큘라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이리 사과한다면 받아 줄 것이냐?”

칼립소가 눈을 들어 올렸다. 맨들맨들한 눈이었다.

아무것도 담기지 않은 얼굴이 갸웃 기울어졌다.

“제가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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