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0화
내 말에 리리벨은 살짝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지금 하는 일과 뭐가 다른 거죠?”
“네 부모를 감시할 수 있겠어?”
“네, 할 수 있어요. 지금도 하고 있으니까요.”
리리벨이 태연하게 말했다.
누군가는 비정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나, 사실 백부와 백모 쪽에서 먼저 자식을 두고 계산적으로 행동했다.
일찍이 리리벨은 빨리 죽을 거라 생각해 바이얀만 자식으로 인정했으니까.
그렇게 자란 리리벨에겐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녀의 눈엔 부모를 향한 미련은 전혀 없어 보였다.
‘하기야 3회차에서 봤을 때도, 리리벨과 큰어머니는 서로를 장기짝처럼 이용하는 사이였지?’
꽤 흔한 범고래 모녀 사이였다.
‘나랑 아빠 같은 관계가 잘 없는 편인 거지.’
살아난 아빠는 아빠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거머쥐었다. 여기 있는 리리벨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네 부모를 찌르는 건?”
리리벨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새초롬하게 나를 향한 시선은 차갑고 냉정했다.
나는 그 안에 뿌리 깊게 자리 잡은 신뢰를 확인하고서 웃었다.
리리벨이 내게 무어라 대답했고, 나는 다시 무어라 지시를 내렸다.
* * *
‘좋아, 제일 마음에 걸리던 리리벨 일은 처리했고.’
아콰시아델 내부엔 내가 깊이 잠든 걸로 알려졌기 때문에 이동의 폭이 넓지 않았다.
게다가 나 또한 시간의 틈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움직이는 대신 필요한 사람을 모았다.
“잘 부탁할게.”
대뜸 내게 이런 말을 들은 사람은 바로 첫째인 벨루스였다.
가지런한 눈썹이 씰룩였다.
“너 그렇게 이해 못 했을 때 눈썹 움직이는 거, 둘째랑 버릇이 비슷한 거 알아?”
“불쾌한 말이군.”
“그래? 나는 네가 지금까지 진실을 꼭꼭 숨긴 게 불쾌했는데.”
“…….”
“해 봐, 변명. 들어는 줄게.”
“……그냥, 혼란스러웠을 뿐이야. 이젠 아니야. 과거에도 지금도 내게 있어 가주는 너뿐.”
“나 참,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말하는 뻔뻔함은 여전하구나.”
벨루스는 세 살인 나를 보면서 도저히 저 꼬마 여자애가 꿈속에 나온 의문의 ‘가주’인 걸 인정할 수가 없었다고 했다.
뭐, 그건 나도 이해하는 바였다.
꿈속에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했다고 하니, 대뜸 나타난 여동생에게 정을 붙이기가 쉽진 않았겠지.
“따질 생각은 없어. 나로선 너희가 기억하지 않는 쪽이 나았다고 봐.”
“…….”
벨루스가 입술을 달싹였다.
“그렇다면 너 홀로 기억하길 원했다는 소리인데, 그건 외롭지 않나?”
“한 사람만 외롭고 괴로운 게 낫지 뭐.”
“…….”
“아무튼 간에 첫째야. 무거운 소리는 이제 됐고 네가 세 놈 중에 제일 똑똑하니까 하나만 묻자.”
벨루스가 나를 보며 내 말을 기다렸다. 익숙한 일이라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너는 왜 너랑 둘째 그놈이 이전 생을 기억한다고 생각하냐?”
오래전부터 궁금한 일이었다.
아틀란은 보다시피 두뇌파가 아니었기에 상의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물어보긴 했는데.
“뭐, 어쩌다 했겠지.”
이런 대답이나 하는 놈이었다.
레바이가 기억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놈은 기억이 없는 데다, 없는 쪽이 더 낫다고 판단을 내렸고.
레바이만큼은 아니어도 벨루스도 똑똑한 축에 속했다.
“가장 가능성이 큰 추측은, 누가 시간을 다룰 수 있는가를 먼저 생각하는 거겠지. 그럼 제일 먼저 나오는 인물은…….”
“용 공작?”
“그래, 가주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용 공작을 처음 만났고, 그의 폭주로 세상이 멸망한 건 3회차의 일이다.
나는 이전부터 회귀해 왔다.
“……밝힐 수는 없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아.”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왜 이들이 기억한단 말인가?
누가 시간을 다룰 수 있느냐.
그리고 투스는 내게 ‘시간의 힘’을 견뎌 온 사람이라고 했지.
내 손을 내려다봤다.
‘설마 나한테 그런 힘이 있나…… 라기엔 억지지.’
그랬다면 나는 회귀 안 했다.
미쳤다고 생을 반복하냐.
나는 우선은 이 의문은 넘겨 두고 다시 물었다.
“그럼 질문을 바꾸지. 너랑 둘째놈은 기억하는데 셋째 그놈은 왜 기억 못 하는 거냐?”
“…….”
“덩달아서 레바이놈도 기억 못 하던데.”
가족만 기억이 떠오른다기엔, 셋째놈이 기억을 못 했고.
게다가 릴리도 일부지만 뭔가를 기억하는 눈치였다.
“나와 그 멍청한 아틀란, 그리고 셋째와의 차이점이라…….”
벨루스가 잠시 고민하더니 낯을 찌푸렸다. 나를 보는 표정이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눈치였다.
“뭔데, 속 시원하게 말해라? 3년 동안 궁금해서 죽어 가게 만들지 말고.”
“……글쎄, 가주님. 이것도 추측이지만.”
“추측이고 상상이고 다 좋으니까 얼른 말해 봐.”
“죽는 순간의 차이 같은데.”
“뭐?”
벨루스는 잠시 망설인 게 거짓이었다는 양 차분하게 말했다.
“셋째가 죽을 때를 생각해 봐.”
“그건 왜…….”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나 살리겠다고 죽은 사람을 다시 되새기라니.
내 표정을 보고서 벨루스가 얼른 말을 바꿨다.
“상황만 보라는 거야. 상황만.”
그러고는 자신이 설명했다.
“셋째는 죽는 순간까지 네가 무사히 멀리 도망친 걸로 알고 있었어.”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찬찬히 3회차의 기억을 떠올렸다. 마지막 전투의 일이었다.
막 승리를 거둔 순간, 용 공작이 폭주했다.
모두가 한 사람씩 죽어 갔고, 내 오빠들은 나를 도주시키기 위해 달렸다.
“쿨럭, 내가 여길 지킬게.”
개중 제일 먼저 남은 사람이 바로 아게노르였다.
“다음으로 남은 사람이 나잖아? 내가 죽어 가는 그놈에게 돌아가 말해 줬어.”
“…….”
“넌 무사히 도망쳤고, 너만은 잘 살아남았고.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란 걸.”
“…….”
“그러니까 웃으면서 죽던데.”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나와 둘째 그놈은 네가 무사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아는 채로 죽었지. 나보다는 아틀란 그놈이 더 오래 살았던가.”
나는 형제 중 가장 처절하게 죽었던 아틀란의 모습을 떠올리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아게노르는 생에 미련이 없었을 거다.”
“……너흰 달랐다는 거야?”
눈을 뜨고 다시 마주했을 때, 벨루스는 은은하게 웃고 있었다.
나와 다르게 그때를 떠올리는 게 어렵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다시 살고 싶었던 건 처음이었지.”
“…….”
“가주님, 내 여동생이자 하나뿐인 주군인 네가 죽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그건 미련 없는 이의 웃음이었다.
“결론을 내리자면 그래, 나와 아틀란은 미련이 남은 채로 죽었고, 네가 매개가 되어서 기억이 남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
“…….”
“증거로 가주님 너와 관한 기억만 선명한 데다, 너와 멀어지면 기억도 희미해져.”
이건 아틀란도 한번 이야기한 내용이었다.
“네가 살아 있는 걸 봤고, 지금이야말로 나도 그때 아게노르처럼 미련이 사라진 걸지도 모르지.”
어느새 나는 내가 주먹을 꾹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련의 차이라면.
‘릴리 또한 다시 살고 싶을 만큼 미련이 남은 일이 있었다는 건가?’
나와 관련이 크지 않았던 릴리의 모습은 금세 잊혀졌다.
나는 무거운 한숨이 나올 것 같은 표정으로 눈앞의 오빠이자 수하였던 사람을 보았다.
“그런 기억일랑 차라리 버리고 다시 태어나지 그랬냐.”
벨루스는 고요하게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한 줌 바닷물이 되어 바다의 신을 다시 만났다면 똑같이 빌었을 것 같은데.”
“…….”
“다음 생엔 모두가 행복하게 살면서 그걸 내 눈으로 보게 해 달라고.”
“…….”
벨루스는 그저 태연히 ‘기억이 없으면 소원을 들어주었는지, 알 수 없잖아?’ 하고 말했다.
“그보다, 가주님. 만약 이런 가설이 맞다면 널 지독히 따랐던 그놈들 중에서도 나올 수 있는 거 아닌가?”
“응?”
“기억하는 놈.”
나는 눈을 끔뻑였다.
확실히 나를 열렬히 따르던 수하들은 많았고, 그중에선 세 오빠를 능가하는 몇 놈도 있었다.
하지만…….
“레바이도 그중 하나인데 기억 못 하잖아?”
“글쎄……. 꼭 그 돌고래놈만의 일은 아니지 않나?”
무슨 말이냐고 묻자, 벨루스는 냉철하게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나는 가설의 하나라 생각하고 들어두기로 했다.
가능성은 낮을 거라 생각하면서.
‘어차피 내가 가까이 있어야 기억이 더 선명해진다며. 그럼 멀리 떨어진 놈들 중엔 기억할 놈도 없겠지 뭐.’
릴리조차도 나와 만난 뒤에 뭔가 떠오른 것처럼 말하지 않았던가.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어차피 이제 시간의 틈에 들어갈 테고, 결과야 3년 뒤에야 알 수 있을 테니까.
* * *
거대한 황무지.
육지 동물 수인들이 내쫓아 어쩔 수 없이 수중 동물 수인들이 살게 된 땅은 대체로 척박했다.
그나마 비옥한 땅은 아콰시아델이 다스리고 있었으며, 그 외에 땅은 버려지거나.
가끔 범고래들이 선심 쓰듯 순찰을 돌곤 했지만.
가주 ‘오큘라 아콰시아델’의 철칙은 약한 놈들은 죽어도 상관없다는 주의였기에.
이곳에 사는 약한 수인들은 더는 옛날처럼 원조도 도움도, 보호도 받지 못했다.
그리하여 버려진 땅들을 차지한 건 상어들의 일파 무리였다.
“으윽, 으으윽. 사, 살려 주세요. 도, 돈은 이것밖에…….”
약한 수인들은 늘 이렇게 비는 것밖에 할 수 없었고, 평생 죽을 때까지 이런 방식으로 사는 게 당연하다 여겼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그러했다.
쿠웅!
조금 전까지 약한 수인을 핍박하고 돈을 뺏어 들던 상어 수인이 바닥에 쓰러졌다.
쓰러진 놈들의 목에 난 가로줄은 상어들이 동물이었을 때 아가미의 흔적이었다.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고마움에 싹싹 빌던 사람들이 고개를 들었다가 조금 놀랐다.
요즘 황무지 구역엔 홀연히 나타나, 핍박하는 이를 때려눕힌 뒤에 사라지는 이가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저 사람이 요즘, 이 구역을 돈다던 그 사람이야?”
“……사람, 이라기엔 너무 어리지 않나?”
오늘에서야 소문으로만 듣던 이를 마주한 수인들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기요, 저기요!”
할 일을 다 했다는 양 사라지는 저이의 뒷모습은 성인보다 너무나 작았으니까.
소년이었다.
그것도 이제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남색 머리카락, 그 위로 검은 점같이 흩뿌려진 무늬가 인상 깊었다.
소년에게 구해진 수인 중에서 그나마 박식한 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 저런 무늬를 어디선가 본 적 있었는데…….
“……고래?”
그래, 고래 수인의 한 종이었다.
어느 고래였더라.
“아, 그래!”
혹등고래.
그래, 혹등고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