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호출을 받고 리리벨은 투덜거리기 바빴다.
‘한동안은 부르지도 않더니, 갑자기 이게 무슨…….’
솔직히 조금 기분도 상하고 부아가 치밀기도 했다.
내가 욕심난다며 수하로 들어오라고 할 땐 언제고!
용의 도시에서 돌아온 제 주군, 칼립소는 자신을 따로 부르기는커녕 명령 하나 내린 게 고작이었다.
대기하란 명령이었다.
자신과 지금 접촉해서 좋을 게 없다나?
아니, 이렇게 방치할 거였으면 대체 왜 수하로 들인 거냐고.
‘내가 확 자리 뺏어 버릴까 보다.’
리리벨은 여기까지 생각하고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서라.’
여러모로 따져 봐도, ‘칼립소 아콰시아델’의 자리를 빼앗는 것은 무리였다.
‘미친 인간이라니까.’
자신의 눈은 잘못되지 않았던 거다.
설마하니 가주를 이길 줄이야.
처음엔 모두가 거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럴 리 없다고, 뜬소문이라 취급했다.
하지만 가주, 아니. 이제는 ‘전 가주’가 된 오큘라 아콰시아델이 직접 선언한 순간 소문은 진실로 판명되었다.
범고래 역사상 이렇게 평화로운 가주 교체가 있던가?
범고래는 탐욕스럽다.
역대 가주는 늙고 추하고 더럽게. 마지막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 들었고.
최후에는 젊고 강인한 후계에게 강제로 끌어내려지는 일이 만연했다. 전통과도 같았다.
한데 오큘라가, 그것도 역대 가주 중에서도 강하고 이기적이며 탐욕스러운 폭군이 스스로 자리에서 내려오다니.
범고래들은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삼삼오오 모였다 하면 수군거리기 바빴다.
“대체 무슨 수로 여덟 살짜리가 가주님을 이겨요?”
“그냥 후계자 자리를 물려주기 위한 수를 쓴 거 아니에요?”
“하지만 가주님이 그렇게 하실 이유가 무에 있어요? 뭐든 뜻대로 하실 수 있는데?”
다음 가주로 ‘피에르 아콰시아델’이 오르기까지는 그러했단 소리다.
피에르가 자리에 오르며, 모든 소문은 종식되었다.
몇몇 오큘라를 열렬하게 따르던 이들이 끝까지 의심을 제기했지만, 피에르의 병이 나았다는 소식에 이들마저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뒤를 이어 칼립소 아콰시아델이 가주와의 결투에서 승리한 후 모든 진기를 소모해 긴 잠에 빠져들었다는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은 이를 그저 피에르 다음 가주로 칼립소를 앉히기 위한 소문이라 취급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강하다고 한들 모두가 칼립소의 승리를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피에르와 오큘라의 결투가 잘못 와전되었겠거니 생각했고.
그 누구도 정정해 주지 않아, 소문은 슬쩍 진실이 된 것처럼 퍼졌다.
리리벨이 호출을 받은 건 이즈음이었다.
“그러게, 미리 죽였어야 했는데…….”
“…….”
“더 빨리 죽게 둘 것을. 병이 나을 게 뭐람.”
그녀의 모친 헤일라가 거울을 보며 중얼거렸다.
피에르가 가주 위에 오른 뒤로 피에르의 형제들, 로데센과 비오르의 진영엔 비상이 걸렸다.
당연했다. 연어 떼를 쫓다가 단 한 마리도 먹지 못한 꼴이 되었으니까.
헤일라가 음산하게 피에르 암살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리리벨은 저택을 몰래 빠져나와, 감시에 걸리지 않도록 은밀하게 한곳을 향했다.
마침내 리리벨이 도착했을 때, 그곳엔 먼저 서 있던 사람이 있었다.
하나로 길게 묶은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왔어?”
칼립소였다. 칼립소가 생긋 웃었다.
“리리벨.”
* * *
오랜만에 보는 리리벨이었지만, 변한 건 하나 없었다.
하긴, 고작해야 몇 개월이 지났을 뿐이니. 조금 눈에 띄는 게 있다면 키가 커졌다.
‘범고래 애들이 쑥쑥 클 시기긴 하지.’
비슷한 나이 대인 아게노르와 아틀란도 뭔 콩나물처럼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지 않던가.
다가오는 리리벨은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용케도 날 찾았네. 까맣게 잊은 줄 알았더니.”
새치름한 목소리와 불만 가득한 얼굴, 왜 이러는지 충분히 이해가 됐다.
“왜, 방치한 것 같아서 기분이 나빴어?”
나름 다정한 목소리를 내자 리리벨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그래. 그러는 넌 혼신의 힘을 다한 결투 끝에 잠들었다고 하던데. 멀쩡하게 깨어 있네?”
“에이, 내가 보낸 전언은 모두 들었으면서?”
청어 수인을 통해 리리벨에게 아무도 몰래 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잠들지 않았고, 네게 줄 것이 있으니 은밀하게 오라고 말이다.
리리벨의 표정이 누그러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개운해지진 않았다.
“조심하기나 해. 네 아빠가 가주가 된 것 때문에 아주 어수선해.”
“그렇겠지. 범고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잖아?”
범고래의 가주는 가장 강한 여성 수인이 된다. 이 전제가 깨진 셈이니 말이다.
긴 역사상 거의 깨진 적이 없는 일이었으니, 다들 쉬쉬하면서도 혼란스러운 것도 이해한다.
‘임시 가주란 말도 별로 안 먹혔나 보네.’
“어머니가 아주 이를 갈고 있지.”
“아, 큰어머니라면 그럴 것 같았어.”
“가볍게 넘기지 마. 네 아빠의 병이 나았다니, 힘으로는 더는 어찌 못하게 되었겠지만. 전통이 왜 전통이겠어.”
“응, 알아. 나도 쉽게 내린 결정은 아닌걸.”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는 고개를 까딱거렸다.
“일단 들어가자. 줄 게 있으니까.”
리리벨은 여전히 불만인 듯 삐뚜름한 표정을 하면서도 얌전히 날 쫓아왔다.
우리가 향한 곳은 리리벨에게도 익숙할 공간.
아빠의 저택 지하 공간이었다.
리리벨은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잔뜩 늘어져 있는 물건들을 보고 흠칫했다.
“뭐, 뭐야. 이건?”
“아, 어수선하지? 어어. 밟지 마. 중요한 거니까.”
네 목숨을 구할 거란다.
나는 늘어진 물건들 중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뽐내는 거대한 상아를 눈에 담았다.
이것을 빤히 보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시간의 틈에 잠시 다녀왔다.
들어갈 땐 에키온과 함께.
시간의 틈 안에서 멸종 동물들의 일부 등 주요 재료들을 수집할 때도 함께였다.
다만, 에키온은 빠져나오면 다시 들어갈 때 ‘페널티’가 생기므로 나만 잠시 리리벨의 재료를 가져다줄 겸 나온 상황이었다.
고로, 오늘 치료가 끝나고 간단한 볼일을 끝내면 투스와 함께 시간의 틈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3년이란 시간을 보내겠지.
“웬 풀냄새가 이렇게…….”
리리벨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명령 때문인지 조심조심해서 움직였다.
다 그럴 이유가 있어서 그렇단다.
잠시 뒤, 리리벨은 곧 지하 소파에 앉아 있던 웨일과 마주하고는 예쁜 낯을 왈칵 일그러트렸다.
그러나 내가 ‘진단’을 위해 손을 잡으라고 하자, 곧 표정이 묘해졌다.
“웨일, 그럼 부탁해.”
“응.”
웨일이 끄덕이고서는 눈을 감고 집중했다.
‘아쉽게도 같은 병이라도 세부적인 재료는 조금씩 다를 수 있다고 하니 말이야.’
나는 새하얗게 피어나는 빛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행스럽게도 리리벨 치료에 필요한 재료는 주요한 재료를 비롯해 아빠의 것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예상 범위 안이군요.”
“그래?”
새롭게 나타난 재료도 우리가 미리 준비한 재료 안에 있었다.
혹시나 없더라도 이제는 가주의 창고를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으니, 뭐든 찾기 어렵진 않았을 거다.
“바로 치료 가능하겠어?”
“응, 가능해. 할까?”
웨일이 나를 향해 눈을 살짝 휘었다. 나는 웨일을 보다 말고 멈칫했다.
‘얘가 이렇게 웃었나?’
리리벨에게 설명을 시작해야 하는데, 잠시 이것도 깜빡 잊었다.
웨일은 무뚝뚝한 외형인 데다, 원체 잘 안 웃는 편이었던지라 눈길을 끌었던 탓이다.
웃어도 희미하게 웃었던 것 같은데.
“깜짝 놀랐네. 뭐라는 건 아닌데…… 너 웃는 게 좀 변한 것 같다?”
“아, 음…… 티 나?”
“나지?”
“마음에 들어?”
“내 마음에 들어야 돼?”
“음…….”
웨일이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살짝 뺨을 발긋하게 물들이며 웃었다.
“셋째 형님이…… 이러면 먹힐지도 모른다고 해서…….”
“……셋째? 아게노르? 너네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는데?”
얘 레바이 말고는 다 벽을 두고 있지 않았나?
우리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저기요, 칼립소 아콰시아델 님? 연애 놀음은 뒤로 미루고 설명 좀 해 주지 그래? 그래서 뭐 어떡하면 되는 건데?”
뾰족한 목소리에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리리벨은 이렇게 말했지만 조금 초조한 기색이었다. 하기야 똑같은 병을 가진 ‘아빠’를 진단하는 걸 봤을 거다.
게다가 아빠의 병이 싹 치료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테고.
같은 병을 가진 사람으로서 긴장되는 게 당연했다.
“어떻게 하면 되긴, 그냥 있어.”
“…….”
“약속했잖아? 치료해 주겠다고.”
웨일을 보자, 웨일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한번 웨일이 손을 뻗었을 때, 리리벨은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지금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나.”
리리벨의 입술이 떨렸다.
리리벨은 꾹 깨물고서는 다시 입을 열었다.
“……살 수 있어?”
억지로 눈물을 꽉 참은 건 이 애의 자존심 강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을 보여 주는 것일 터다.
어린 나이였지만, 일찍 철이 들었다. 어쩔 수 없는 생존 본능이자 악에 받친 결과였을 것이다.
왜 나만 괴로워야 하는가.
왜 나만 일찍 죽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고민과 고뇌를 이어왔을까.
나는 잠시 연민 어린 눈으로 친척을 바라보다가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새 삶을 시작하게 된 순간에 소감이나 말해 줘.”
“…….”
“눈 감아.”
치료가 시작되었다.
* * *
“어때, 다시 태어난 기분은?”
나는 싱글싱글 웃으며, 눈을 뜬 리리벨을 향했다.
병세가 아빠보다 약하거나, 아빠만큼 병을 오래 앓지 않아서일까.
리리벨은 아빠와 다르게 치료가 끝나고도 잠들지 않았다.
리리벨은 특유의 냉하고 도도한 표정으로 나를 차갑게 보았지만.
자세히 보면 더는 뾰족하지도 날카롭지도 않았다.
“……마워.”
“응?”
“고, 고맙다고!”
리리벨이 소리를 치고는 씩씩대다가 얼른 우아하게 제 입을 가로막았다.
발긋 달아오른 뺨이 그 나이다운 소녀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조용히 해. 널 치료해 준 애가 잠들었잖아.”
현재 웨일은 치료가 끝나고 내게 기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내가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자, 리리벨은 볼을 좀 더 물들이면서도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다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내 앞에 고아하게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잠시 나를 무어라 부를까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맑고 명료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가주님.”
치료를 시작하면서 레바이를 내보내고, 이 공간엔 아무도 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 있는 건 잠든 웨일, 그리고 나와 리리벨뿐이었다.
한때 유일한 친구이자 나를 배신했던 다재다능한 범고래를 바라보며 나는 살짝 웃었다.
“그래.”
“……정말 치료해 줄 수 있을 줄 몰랐어요. 앞으로, 가주님만을 따를게요.”
“그렇게 말하지 않더라도 이미 그래야 하지 않나? 너 맹세했잖아?”
“……분위기를 타는 거죠. 분위기를.”
리리벨은 삐뚜름하게 나를 보면서도 자세를 바꾸진 않았다.
“그래, 리리벨. 그럼 우리 계산을 시작해 볼까?”
내 말에 리리벨이 노려보던 걸 멈추고 진지한 얼굴을 했다.
널 살려 주고 난 충성을 얻고.
그리고…….
“넌 앞으로 본격적으로 비밀 무기로 활동해 줘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