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98화 (198/275)

제198화

피에르는 심기가 영 불편했다.

오늘 있던 결투는 칼립소가 고대했던 싸움이었다.

그런데 결투를 끝낸 제 딸의 표정은 영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결투 도중에 새로운 문제를 직면한 사람처럼 분노와 여러 감정이 뒤엉킨 얼굴이었다.

제 딸은 감정 동요가 크지 않은 아이였다.

본인은 자신이 크게 웃고 쾌활한 사람이라 여기는 것 같지만.

가끔 그건 과장되었을 뿐, 볼수록 아이답지 않은 아이였다.

어차피 그건 오래전부터 느꼈던 일이었다.

그렇기에 피에르는 언젠가 딸이 이야기해 주겠거니, 하고 여겼다.

그래서 여덟 살밖에 되지 않는 딸이 자신과도 대등한, 혹은 어쩌면, 승부를 점칠 수 없는 힘으로 가주를 이기는 것을 보았어도.

크게 관심 두지 않았다.

“…….”

이뿐일까, 언제부터인가 제 첫 수하라던 아게노르 대신 뒤늦게 나타난 둘째 아들과 무언가 깊은 교감을 나누는 듯한 모습도.

칼립소가 도저히 알 수 없는 사실들을 알고 있는 것도 그저 넘어갔다.

지금도 딸이 가진 무언갈 의심한다거나, 그에 대해 궁금하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의 심기가 불편한 것은 이런 거창한 것들 때문이 아니었다.

결투가 끝나자마자 에키온의 손목을 잡고 달려간 상황.

그 상황 때문에 불편했다.

용 공작을 붙잡아다가 대체 자신의 딸에게 무슨 수작을 벌였냐고 본능에 확 내맡기고 싶을 만큼 말이다.

“아빠!”

그런데 저택으로 돌아온 칼립소는 몹시도 후련하게 보였다.

“갑자기 뒤처리를 맡겨서 미안해.”

피에르는 상념을 떨친 채 제 딸아이의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아픈 곳은 없는지, 그늘은 없는지. 이것을 살펴보는 게 인생의 목표인 사람처럼.

적어도 피에르는 이렇게 생각했다.

제 목숨은 딸아이가 구했다.

그러니 남은 생을 딸아이를 위해 살아가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비록 딸이 제게 숨기는 것들이 좀 많은 게 아닐지라도 말이다.

수상한 건 세 살에 제 앞에 나타났을 때부터 이미 심각했다.

“가주는 어떻게 됐어?”

“중간에 정신을 차렸고 본인의 발로 걸어서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피에르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어 말했다.

“빠른 시일 내로 정리하겠다고 전하더군.”

“흐음, 그래?”

칼립소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이었다.

“웃기네. 그렇게 쉽게 패배를 인정할 줄이야.”

그건 피에르로서도 의외였다.

몰론 패배는 명확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두 부녀는 가주가 한 번 더 승부를 요청하거나, 모든 수단을 써서라도 세력 싸움으로 변질시킬 경우도 예상했다.

“뭐, 뒤통수칠 계획이라도 세우고 있지 않겠어.”

역시나 대수롭지 않은 말투.

칼립소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그렇기에 모든 일에 태연하고 심드렁할 수 있는 듯했다.

적어도 아비인 자신에게 보이는 정과 신뢰가 거짓이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가끔은, 피에르 자신이 어느 날 갑자기 네 편이 아니라고 말하더라도.

“아, 그래? 알겠어.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차분하고 태연하게 대답할 것만 같았다.

아마 그의 감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칼립소가 이렇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아마도 딸이 숨기고 있는 비밀과 관련되어 있으리라.

“아빠, 잠깐 시간 괜찮아?”

이에 피에르는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았다.

병이 낫는 즉시 그간 못했던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나, 병 때문에 활자를 오래 읽는 것이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 그렇지 않으니 더는 서류를 라일라에게만 맡기지 않아도 되었다.

칼립소를 도울 만한 일이 없나 확인 차 검토하던 중이었다.

“마침 이 방에 아무도 없으니 여기서 대화해도 괜찮겠군.”

“응, 나도 좋아. 둘만 조용히 볼 수 있다면 어디든 괜찮았거든. 아, 그런데 다들 어디로 갔어?”

아틀란과 벨루스는 예전에 가르지 못했던 승부를 보자며 사라졌고, 아게노르는 흥미 가득한 표정으로 형을 따라갔다.

레바이는 제 방으로 향했고, 웨일은 삼형제를 따라갔다.

정확히는 아틀란에게 휩쓸려 갔다.

이 이야기를 들은 칼립소가 웃었다.

“여전히 싸움을 좋아한다니까.”

칼립소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피에르의 방 전체에 연한 물의 장막이 펼쳐졌다.

이제 어떤 소리도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다.

“아빠의 물 색은 참 신기해.”

칼립소는 가만히 물을 응시했다. 병이 낫고 난 뒤 피에르가 사용하는 물의 색이 바뀌었다.

병이 그의 물 색도 흐려 놓았던 것일까. 아니면 지금까지는 제대로 힘을 쓸 수 없었기에?

조금씩은 다 영향이 있었겠지.

지금 펼쳐진 물은 에메랄드빛이 섞여 있었다.

지구에서 한 번도 가 본 적은 없지만 브라운관을 통해서 봤던 지중해 바다색이 이렇지 않을까.

“네 모친과 똑같은 소릴 하는군.”

칼립소는 눈을 깜빡였다.

드물게도 모친 이야기를 피에르 쪽에서 먼저 꺼냈으니.

“아빠, 왜 부인이라고 하진 않고?”

“글쎄, 확실히 나와 결혼한 여자는 맞지만.”

“…….”

“부부였는지는 아직도 모르겠군.”

피에르의 머리 한구석으로 연하게 웃는 여성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칼립소는 그 여자를 닮았다. 자신과 닮은 구석은 그다지 없었다.

아쉬운 건가.

아니면…… 그리운 건가.

“그래서 할 이야기는 무엇이지?”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말을 돌리는 음색에 칼립소는 또 한 번 모친 이야기를 할 기회를 놓쳤다.

어쩔 수 없지. 앞으로 기회는 많을 테니까.

“오늘 아빠한테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나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칼립소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피에르를 눈에 담았다.

많은 고민을 거쳤다.

판단은, 결단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중요한 비밀인가?”

“중요하지.”

그녀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비밀이니까 말이다.

피에르는 눈앞의 딸이 웃는 것을 보았다. 이전과는 조금 다른 느낌의 웃음이었다.

“아빠, 나는 아주 오래 살았어.”

“……8년이면 짧은 시간은 아니지.”

피에르의 농에 칼립소는 그저 웃었다.

“똑똑한 사람이니까 그냥 하는 말이 아닌 걸 알지?”

자신은 딸의 비밀을 알고 싶었는가. 아니면 이대로 묻고서 가족으로서 지내도 좋았던가.

어쩌면 이대로 좋다고 생각한 건 그저 칼립소를 배려한 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번 생으로 꼭 네 번째야.”

피에르의 거대한 힘에서 기인한 예민한 감은 이미 그에게 알려 준 것일지도 몰랐다.

옛날부터 칼립소는 필요한 것들을 꼭 제게 말해 주었다.

주의사항, 참고사항 등.

필요한 것은 꼭 알리는 아이였다. 일부러 비밀을 만드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니, 자신에게 쭉 비밀을 유지했다는 것은.

“나는 죽으면 매번 다시 태어나 똑같은 삶을 살고 있어.”

……그가 알게 되면, 어쩌면 자신에게 혹은 부녀 사이에 큰 변화가 있을지도 모른단 이야기였다.

칼립소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최대한 간결하게 요약된 삶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모든 이야기가 끝났을 때, 피에르는 자신의 감이 맞았음을 알았다.

“어때, 이런 꿈을 꿨단 이야기를 하면 믿겠어?”

“적어도 진실이라는 건 알겠군.”

“…….”

“내 딸이 하는 말은 뭐든 믿어.”

웃고 있던 칼립소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는 쓰게 웃었다.

피에르는 살면서 자신의 삶을 동정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다만, 세간에서 자신의 삶이, 자신이 가진 불행이 크다는 것은 알았다.

“창창한 나이에 죽는대요.”

“어머나, 그렇게 큰 힘을 가지고서?”

“아깝네요. 시한부라니.”

그리고 그는 눈앞에 자신의 불행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불행을, 아니 삶 전체가 불행했던 딸아이와 마주했다.

“……내가 얼마나 못난 쓰레기였는지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군.”

세 살.

처음 만난 제 딸이 유달리 경계하면서도 가끔 서럽게, 원망스럽게 보던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그러다가도 기대조차 하지 않던 이유를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하하. 쓰레기까지야.”

60년. 칼립소 안에서 피에르가 칼립소를 외면했던 시간은 이토록 긴긴 시간에 해당했다.

이쯤 되면 이번 생에서 칼립소가 마음을 연 것이 대단하다 못해 기적처럼 느껴졌다.

단단한 아이였다.

하지만 피에르는 알았다.

단단한 나무라 하여도 때로 하잘것없는 작은 벌레나 곰팡이에 어이없이 죽기도 한다는 사실을.

늘 의연하고 강인한 모습이 무너졌다 재조립된 것이라면.

무너진 균열의 흔적은 늘 존재해 왔단 소리다.

지금까지 자신이 딸아이에게 느낀 위태로움이 이러한 것이라면.

어설픈 사과는 해선 안 된다.

용서는, 딸아이의 몫이었다.

“사과는 안 해도 돼.”

“…….”

“난 이미 아빠를 용서했거든.”

비밀을 모두 토로했기 때문일까? 웃는 칼립소의 얼굴이 후련하게 보였다.

“이렇게 쉽게 믿을 줄은 몰랐어. 난 아빠의 그런 의연함이 참 좋은가 봐.”

“…….”

“호들갑 떠는 건 별로거든.”

소란스러움을 좋아하지 않는 네 성정은 자신을 닮은 걸까.

“미안하지만 아빠, 내가 이걸 토로한 건 사실 아빠한테 미안한 부탁들 하기 위함이야.”

칼립소는 싱글싱글 웃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빠한테 제대로 아빠 노릇을 해 줄 때까지 수십 년을 기다려 준 거야. 그렇지?”

칼립소가 뻔뻔히 말했다. 피에르는 홀린 듯 끄덕였다.

“그러니까 아빠는 이거보다 아주 짧은 시간만 기다려 주라.”

칼립소는 짤막하게 자신의 계획을 말했다.

“이번에 가주와의 싸움에서 말도 안 되는 능력을 발휘한 건, 모든 잠재력을 끌어다 쓴 거였고, 이 때문에 한 3년만 잠들었다고 하자.”

“……그동안에 넌 볼일을 보고 오겠다는 건가?”

“응.”

칼립소는 잠시 창문을 응시했다.

“이번 생은 달라진 것들을 더 소중히 여기고 싶어, 아빠.”

생각해 보면 칼립소는 3회차를 너무 바쁘게 살아왔다. 이번 생도 비슷하게 살려 했지만 생각이 바뀌었다.

“사실…… 이 계획은 내 뒤를 든든히 바쳐 줄, 나를 대신할 자리를 맡겨도 전혀 불안하지 않을 사람이 있어야 가능한 계획이야.”

“…….”

“아빠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사람을 믿지 않는다던 딸아이가 활짝 웃었다.

“해 줄 거지, 아빠?”

이번에야말로 그늘 하나 없는 미소였다.

피에르는 알았다.

세 살 때 짓던 미소보다 지금 저 미소가 좀 더 아이답다는 것을.

칼립소가 회귀자라면, 세 살에 짓던 그 미소야말로 이전 삶의 흔적이 남은 얼굴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자신과의 시간이 칼립소에게도 무언가를 남겼다면.

눈앞의 싱그러운 순수함이길 바랐다.

그래서 그는 치사하게도 애교스럽게 웃는 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네가 바란다면 뭐든지.”

그것이 그가 모르는 시간 동안 딸아이를 무정한 생에 내팽개친 벌이었으며 속죄하는 길이자.

앞으로 가족으로서 함께 걸어가는 길의 든든한 길잡이가 되는 일일 테니.

“해 주마.”

며칠 뒤, 아콰시아델엔 결투 결과가 알려지면서 이전 가주가 갑자기 자리에 내려왔다.

뒤를 이어 새로운 가주가 자리에 올랐다.

새로운 가주의 이름은 피에르 아콰시아델.

그러나 그는 분명히 말했다.

자신은 ‘임시’ 가주이노라고.

* * *

그로부터 또 일주일 뒤.

리리벨 아콰시아델은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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