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애석하게도 아빠를 치료하면서 가지고 있던 재료의 대부분을 소진했다.
게다가 시간의 틈에서만 구할 수 있던 재료는 모두 써 버렸다.
‘처음부터 리리벨한테까지 쓰려고 많이 모았던 건데, 생각보다 많은 양이 필요했지?’
하지만 이번엔 아빠를 치료하면서 소모되는 양을 파악했으니, 괜찮을 거다.
정확하게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에키온은 나를 바라보며 입을 달싹였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아기 새처럼 입만 뻥긋뻥긋했다.
“왜 그래?”
“칼립소…… 정말 같이 갈 거야?”
“……? 응. 내가 뭐하러 거짓말을 하겠어?”
입 아프게.
그럼에도 내 말이 믿기지 않는 건지, 아니면 뭔가 걸리는 게 있는 것인지.
에키온은 이 귀엽고 예쁜 얼굴로 한참을 끙끙댔다.
처음엔 귀엽다고 구경했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이 좀 흐르자 답답했다.
결국 참지 못하고 손을 휙 잡아당긴 쪽은 내 쪽이었다.
“대체 뭔데 그래?”
“칼립소, 설명, 하고 싶은데…… 어려워.”
“음? 그럼 투스 불러.”
곧이어 우리가 있는 곳으로 투스가 짜잔, 하고 나타났다.
원하면 서로가 있는 곳으로 손쉽게 이동할 수 있다니 다시 봐도 좋은 능력이었다.
일정 거리에 있어야 사용할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좋아 보인다.
‘나도 에키온이나 웨일이나. 아, 레바이도 있겠네.’
아틀란이나 아게노르같이 제 앞가림할 만한 놈들은 제외하고.
호위가 필요한 아이들을 떠올리며 부러움을 느꼈다.
“요, 용 공작님?”
불려 온 투스는 아무래도 내게 사실을 고한 것 때문에 에키온이 화를 내거나 자신을 미워할까 두려워하는 눈치였다.
그런 투스를 어르고 달랜 뒤 설명을 들었다.
“아……! 맞아, 소실된 힘을 보충하러 시간의 틈에 가야 해!”
원래라면 시간의 틈에 한 번만 다녀와도 될 것을 두 번 가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칼립소, 제아무리 용 공작님이라지만 두 번이나 들어가는 건 쉽지 않아.”
다만 두 번째로 가게 된 만큼 ‘패널티’ 같은 게 존재한다나.
“좀 더…… 오래 있어야 해.”
“얼마나?”
투스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아니, 에키온 눈치를 보는 건가?
나는 슬쩍 에키온을 등지며 투스의 시야에서 가려 주었다.
입 모양으로 괜찮다고 말해 주자, 투스가 살짝 표정을 펴며 말했다.
“……3, 3년!”
음, 가려 준 게 무색하게 그다지 좋은 소식은 아니었지만.
“3년이나? 그렇게 오래 있어야 해?”
“으응. 두, 두 번째라서…….”
“만약 이대로 가지 않으면 어떻게 돼?”
에키온에게 함께 가겠다고 이미 말한 뒤였다. 하지만 3년이라니.
그 시간 동안 자릴 비우기는 어렵다고 생각했다.
‘지금부터가 제일 어수선해질 시기인데.’
가주와의 결투 결과가 빠르게 알려질 것이다. 당연히 이후에는 가문 전체가 혼란스러워질 터이고.
어쩌면 3회차에 내가 막 가문에 돌아왔을 때 겪었던 혼돈을 다시 한번 맞이할지도 몰랐다.
“가지 않으면…….”
투스는 말을 하기 어려워했다.
투스가 이러는 이유는 한 가지밖에 없었다.
‘에키온에게 많이 안 좋구나.’
오래전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에키온이 힘들거나 아프다는 걸 가장 말하기 어려워했으니까.
“……칼립소.”
설명이 끝날 무렵 에키온이 뒤에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언제나 나를 잡을 때 이런 식이었다.
손이든 옷자락이든 언제든 내가 뿌리치면 힘없이 튕겨 나갈 상황을 예견하고 있는 것처럼 잡았다.
세상 강한 용 주제에.
앞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가 될 거면서.
“나, 안 갈래…….”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뭘 안 가. 다녀와야지.”
“하지만, 칼립소 같이, 안 갈 거잖아…….”
진실을 꿰뚫는 말이었다.
이에 나는 부정하는 대신 느슨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용용이가 언제부터 이렇게 눈치가 빨라졌을까.’
이상하게도 에키온이 연약한 손으로 나를 붙잡는 순간 곤란함 대신에…… 희미한 만족스러움을 느끼는 내가 있었기에.
순간 고민이 들었다.
‘이대로 이 앨 보내게 되면 3년을 보지 못한다.’
생각해 보면 에키온이 잠시 길게 잠에 빠졌던 때 이외엔 거의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보아 왔다.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손가락 하나를 도려낸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전 생에서 실제로 손가락을 잃어 본 적 있기에, 그 감각은 더없이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순순히 인정하기로 했다.
역시, 분리불안증이로구나.
이것도 병이라면 내가 이런 병을 얻은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찬찬히 돌이켜 보면 이해가 가는 부분들이 있었던 것이다.
“있잖아, 에키온.”
“…….”
“난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기대가 없어.”
내 목소리는 내가 들어도 단조로웠고, 건조했다.
“너무 많은 사람을 만났고, 내 기대를 배신한 사람은 무수히 많았거든.”
약간의 피로감도 느껴졌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고 생각해.”
나는 가만히 이 아콰시아델 성을 보았다.
반쪽짜리라곤 하나 이 거대한 것이 내 손안에 들어왔다.
드디어.
하지만 여러 감정이 충돌했다.
“넌 이미 내가 수많은 시간을 겪었다는 걸 알겠지만. 지금 나를 잘 따르는 내 오빠들은 말이야.”
“…….”
“한때 나를 죽이려 들었어. 당연한 일이었지. 가주 자리는 단 하나였고 다시 만난 우리에게 가족의 정 따윈 없었으니까.”
십몇 년 만에 만나, 훌륭하게 어른 범고래들이 된 남매가 무슨 정이 있을까.
3회차에서는 오빠들과 죽도록 싸우다가 굴복시킨 뒤에.
동지애와 같은 것이 차근차근 싹텄다.
“그리고 아빠는 말이야, 그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얼굴을 못 본 사람이었지.”
나는 지그시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이번 생에서 느낀 가족의 정을 외면하진 않는다.
이들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이들을 아끼고 사랑한다.
그중에서 아빠는 이제 떼려야 뗄 수 없는 내 소중한 가족이었다.
하지만.
“그런데 너와 웨일은 가족도 수하도 아니면서 목숨도, 소중한 것도 아낌없이 내어주는구나.”
이번 생은 무엇이 달라서 이런 인연이 생긴 걸까.
특히나 너와 나는 3회차 멸망의 주요한 피해자였을 터.
네가 아낌없이, 그것도 계산 없이 손쉽게 내어주는 걸 받을 때마다 기분이 묘해지곤 했다.
“구해 준 것엔 책임이 따르지.”
나로 인해 에키온의 생이 얼마나 바뀌었는지 내가 제일 잘 안다.
바뀐 미래가 변화를 만들었고, 책임져야 한다면 마땅히 책임질 것이다.
“너라면 내 바쁜 생에 3년쯤은 그냥 줘도 괜찮을 것 같아.”
말을 할수록 명확해졌다. 나는 내게 동의하듯 끄덕였다.
“응. 그러네. 알겠다.”
“…….”
“너라면 그 정도는 기쁘게 줄 수 있을 것 같네.”
3회차의 내가 보았다면 이 결정을 어리석다고 할까?
“웨일이랑 한번 이야기해 보고…… 같이 가 줄게.”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나는 이번 삶이 썩, 아니 정말로 마음에 들어.
그러니까 이번엔 끝을 보고 싶어.
나와 함께 불운한 죽음을 맞이했던 너랑 본다면 나쁘지 않겠지.
“내가 널 버릴 일은 없을 거야.”
에키온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문득 커다란 황금색 눈동자로 물기가 어리더니 뚝 떨어졌다.
“……어, 그, 왜 울어?”
천사같이 섬세한 생김새의 아이였다. 새하얀 뺨으로 흐르는 눈물이 정말 잘 어울렸지만.
한편으로 당황했다.
“끙, 울지 마. 대체 어디가 울 만한 말이었던 거야?”
에키온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 마지막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더니 자신의 뺨을 만졌다.
눈물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나 참, 아직 애긴 애네.”
“…….”
“그렇게 감동적이었어?”
에키온이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끄덕였다.
“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나는 싱긋 웃었다.
“이럴 땐 고맙다고 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