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96화 (196/275)

제196화

“어디 갔냐니까?”

아틀란이 찔끔 눈을 피했다.

……죄지은 것도 없는데 쫄았다.

‘아니, 얜 또 왜 이래?’

무려 현 가주를 이 나이에 이겨 놓고서 기쁘거나 뿌듯해하기는커녕 왜 분노에 가득 찼단 말인가?

아틀란은 이 표정을 잘 알았다.

‘저거 나나 아게노르, 저 형놈이 사고 쳤을 때 보이던 표정이잖아?’

보아하니, 그 용 공작 새끼가 뭔가 해서 칼립소를 분노하게 만든 모양인데.

‘뭔진 몰라도 자수해서 광명 찾아라…….’

전직 제일 자주 털려 본 입장에서 아틀란이 해 줄 수 있는 조언이었다.

애석하게도 용 공작에게 전달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글쎄다, 같이 있었으니 저기에…….”

다행스럽게도 칼립소의 화를 조금 식혀 줄 사람이 등장했다.

“축하한다. 편법이긴 하나 결국엔 원하는 것을 얻었군.”

피에르였다. 피에르의 말에 칼립소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더니, 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아…….”

마치 잊고 있다가 막 떠올렸다는 표정이었다.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그래, 엄, 그렇지? 이겼지 참…….”

“왜 그래? 그 사실도 까먹을 만큼 중요한 일이 있었냐?”

“…….”

칼립소는 눈을 깜빡였다. 이내 그저 웃었다.

아틀란은 그 모습에 잠시 자신이 조금 전 칼립소의 싸움에서 보았던 걸 떠올렸다.

‘얜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사실 결투 시작과 동시에 칼립소가 물의 힘을 꺼냈을 때.

정확히는 망치를 손에 구현했을 때 일이다.

칼립소의 뒤로 웬 물그림자 같은 것이 일렁거렸다.

성인 크기였는데, 자세히 보면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아틀란은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건, 3회차 칼립소의 뒷모습이었다. 아틀란이 진심으로 따랐던 주군이자 가주 말이다.

어째서 그 모습이 보인 건진 알 수 없었다.

중요한 건 자신뿐만 아니라 함께 있던 모든 사람이 보았다는 것이니까.

특히나 흘끗 보았던 피에르의 표정이 아주 묘했다.

아틀란은 그저, 훗날 보게 될 칼립소의 모습을 다시 보게 되어 기쁜 한편.

감회가 새로웠다.

이 애가, 다시 한번 가주가 되는 거구나 싶어서.

‘그런데 계획상으론 이런 결투는 계획에 없었던 걸로 아는데.’

칼립소는 장기 계획을 설명하면서 분명 열다섯 살이 넘어서야 가주가 되는 걸로 설명했었다.

‘그 계획 한번 철저하고 처절하던데.’

그래, 현 가주를 처절하게 나락으로 빠트리는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칼립소는 가주가 될 수 있는 쉽고 빠른 방법이 있음에도 이런 먼 길을 택했으니까.

이전 생에서도 그러했다.

칼립소는 늘 오큘라 아콰시아델을 향해 변함없는 증오를 보였다.

아마도 가주가 피에르의 집 앞에 나타난 것 때문에 계획이 많이 바뀐 것 같지만.

좋은 게 좋은 것 아니겠는가.

그사이 피에르와 무슨 이야기를 나눈 것인지, 칼립소는 조금 후련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빠, 그럼 부탁할게.”

“…….”

“아빠.”

“……그래. 다녀오도록.”

피에르는 무슨 말을 들은 것인지 상당히 못마땅하다 못해 살벌한 표정이었다.

한편 칼립소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기어이 에키온을 발견하더니, 두두두 뛰어가는 게 아닌가.

곧 칼립소가 에키온의 손을 잡고 뛰어갔다.

손목을 잡고 뛰어가는 장면이 마치 한편의 청춘 소설 속 한 장면 같았다.

그래서 더더욱 아틀란은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저 새끼가 곱게 키운(?) 우리 가주님을…….’

칼립소가 들었다면 ‘이 또라이가 뭐라고 하는 거야? 누굴 키워? 다시 흙 속으로 들어가고 싶냐.’ 하며 주먹을 들었을 생각이었다.

아틀란이 못마땅하게 눈살을 찌푸리며 슬쩍 피에르에게 물었다.

“거, 스승님. 칼립소가 뭐라고 했습니까?”

“……수습을 부탁하더군.”

피에르가 조용히 대답했다.

의외였다.

그저 수습을 부탁한 거라면 이 스승님이 이토록 조용히 분노하진 않을 듯한데 말이지.

분명 무언가 더 있는 듯한데, 아틀란은 피에르의 무자비한 훈련을 떠올리며 여기서 호기심을 얌전히 접기로 했다.

그러고는 돌아서려는데 옆에 있던 쪼그만 놈과 눈이 마주쳤다.

웨일이었다.

꼬맹이들 중에선 가장 크지만, 그래 봐야 훌쩍 큰 아틀란 눈엔 꼬맹이였다.

그것도 건방지게 칼립소에게 청혼한 꼬맹이.

“뭘 보냐?”

아틀란이 비딱하게 물었음에도 웨일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오히려 무뚝뚝한 얼굴 가득 시무룩함을 보였다. 아틀란이 잠시 당황했다.

‘뭐야, 왜 울려고 그래?’

레바이를 찾았으나, 레바이는 어느새 피에르와 함께 저 멀리서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러다 자신이 웨일을 울렸다는 오해가 생겨 칼립소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곤란했다.

“야, 너 우냐?”

“……안 웁니다.”

무뚝뚝한 얼굴만큼이나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다만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웨일이 고개를 들어 아틀란을 빤히 보더니, 슬쩍 물었다.

“형님.”

“……누가 네 형님이야?”

“하지만, 이 호칭이 맞다고…….”

“콱, 다시 한번 그렇게 부르기만 해 봐. 그래서 뭐, 용건이 뭔데?”

웨일은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틀란이 눈을 끔뻑였다.

그도 그럴 게, 그는…….

곧 아틀란이 당당하게, 그리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몰라. 내가 어떻게 아냐?”

한 번도 안 해 봤는데.

그는 전생에 싸움과 결혼한 몸, 다시 말해 모태 솔로였다.

“……그렇군요. 하지만 형님께서는 이렇게 멋지시니 당연히 아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뭐?”

“멋있다고 했습니다. 물의 힘을 쓰시는 모습은 특히나요. 저도 그런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뭐야, 그 아부는.”

아틀란이 작게 헛기침했다.

“내게 그딴 게 통할 것 같냐? 뭐…… 사실이긴 하지만.”

그리고 웨일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형님부터 공략 중이었다.

* * *

“그래서, 너는 잘못이 없다?”

한적한 공터.

이곳 아콰시아델 저택은 더럽게 넓은 만큼 조용히 이야기할 만한 곳을 찾기가 아주 쉬웠다.

나는 에키온을 이 중 한 곳에 데려오면서 정찰 중이던 기사들을 내쫓았다.

다행스럽게 에키온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서 얼굴이 가려진 상태였다.

나는 기사를 내쫓고 조용해진 즉시 에키온을 추궁했다.

그러나 에키온은 움츠러들기는커녕 나를 빤히 보더니…… 활짝 웃었다.

“안 아까워.”

한 점 아쉬운 게 없다는 듯 맑은 미소에다 덧붙여 말하기까지 했다.

“칼립소, 소원 들어줬어.”

“누가 네 힘 깎아 가면서까지 이루어 달래? 내가 전에 말했지. 네 목숨 위협하면서까지 이루지 않아도, 나 혼자서도 충분히 잘 할 수 있다고.”

“하지만 칼립소, 필요했잖아?”

나는 눈을 부릅떴다.

“그래서?”

둘째나 셋째놈이 보았다면 분명 찔끔했을 모습이었다.

내가 이런 표정을 하면 살기가 느껴진다나.

에키온은 그제야 상황을 눈치챈 아이처럼 내 눈치를 보더니 끙끙대기 시작했다.

어째, 끙끙대는 모습이 투스랑 판박이였다. 하기야 투스가 권속인 데다가 똑같은 모습이니 당연하겠지만.

“……잘못했어.”

“됐다.”

어린애를 데리고 뭘 하겠어.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써 버린 힘은 되돌릴 수 없는 거지?”

“응.”

“뭘 또 그렇게 해맑게 대답하고 있어…….”

나는 한 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으며 다른 한 손으로는 오늘 속을 썩인 이 용용이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일단 사고가 일어나 버렸으니, 어쩌겠나. 수습해야지.

“성장할 힘을 얻으려면 어떡해야 하는데? 잃을 수 있다면, 다시 얻을 수도 있을 거 아니야.”

“맞아. 힘은…….”

에키온이 머뭇거렸다.

“……시간의 틈으로 다시 한번 가야 해.”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황금색 눈동자가 눈치를 보느라 내게서 떨어지는 순간 나는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 쟤 눈이 떨어진 순간 떨떠름함이 드는 걸까.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그래? 그럼 다녀오면 되잖아?”

“싫어.”

“음? 웬일이래…… 네가 단호하게 거절도 하고.”

처음 듣는 확고한 거절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웬만하면 내 말은 모두 오케이 하는 아이였으니까.

에키온의 말인즉 이러했다.

“가면, 칼립소 볼 수 없잖아…….”

이에 나는 산뜻하게 대답했다.

“……? 그럼 같이 가면 되지?”

처음엔 에키온만 보내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쟤가 아빠의 저택에 가도 아예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자 다시 기분이 묘해졌다.

뭐지.

……분리불안증인가?

“어차피 나도 가야 했어.”

그리고 재차 생각해 보니 어차피 시간의 틈엔 같이 가야 했다.

내 수하 중엔 아빠와 똑같은 병을 앓는 아이가 있지 않던가.

“리리벨을 치료할 재료가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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