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나는 몸을 고무시키는 힘에 흥겨웠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려 왔던가.
물의 힘은 내게 주어진 또 하나의 팔이자 다리였다.
지금 되찾고 나서야 알았다.
이번 생에 태어나 줄곧 사지 하나를 잃은 것 같은 빈곤과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하늘을 향해 치솟은 해일, 내가 수없이 써 왔던 능력이 눈앞에 펼쳐진 순간이 짜릿했다.
나는 파도 위에 넘실거리는 또 다른 물결을 탄 채로 아래를 응시했다.
할머니가 개미처럼 보인다.
이 얼마나 등골 저릿한 일인지. 쾌감이 온몸을 적셨다.
뇌하수체가 고장 난 것처럼 짜르르한 흥분이 온몸을 잠식했다.
“넌 타고나길 싸움꾼이구나.”
아주 오래전, 처음 물의 힘을 배울 적의 일이다. 3회차에서 만난 스승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습지도 않은 일이라 생각했다.
1, 2회차 죽도록 고생한 데다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죽은 내가 타고난 싸움꾼이라니?
하지만 곧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간들이 쌓여 축적된 분노가 결국 나를 구성한 모든 요소를 바꿔 놓았음을.
그래, 나는 싸움꾼이었다.
그것도 더럽게 호승심 강한.
승리를 위해서라면 눈이 돌아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이기적인 싸움꾼.
거대한 해일이 대련장 전체를 적셨다. 보통 적이 숨도 쉬지 못하고 휩쓸리는 공격이었다.
나는 휩쓸리는 가주를 보면서 발등까지 저르르한 감각을 느꼈다.
내가 일으키는 해일은 좀 더 특별했다.
물의 염분 농도가 높다.
보통 물이 짤수록 사람을 물속에 둥실 띄워 버린다.
그러나 내가 일으킨 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사지를 고정하는 역할을 했다.
게다가 해일 속에서 일어난 소용돌이와 물줄기가 연신 공격하니 벗어나기 힘든 거대한 덫이나 마찬가지.
물에 갇힌 가주의 몸 위로 선명한 방어막이 형성되었지만 형편없이 깨졌다.
‘더, 더, 맞아 봐. 더.’
내 몸이 파도 속에 녹아들었다.
그럼에도 물에 전혀 젖지 않는다. 그사이 내가 든 망치는 크기를 달리했다.
휘두른 순간 막대가 주우욱 늘어난다.
콰아앙!
물에 잔뜩 젖은 가주가 그대로 맞고 뒤로 날아갔다.
“하하, 재밌다.”
살다 보니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당신을 다 보네?
“이거 하나 못 막고 실망이에요. 꼴딱 젖었네. 아하하하.”
물의 힘을 사용하는 범고래들에게 ‘젖는다’는 건, 비상 상황이다. 상대의 힘을 막지 못했단 소리기에.
수치스러운 일이다.
상대와 나의 격차를 보여 주는 일이기도 하다.
“퉤.”
할머니가 짠물을 뱉어 냈다.
“미친 게냐? 자신 있을 만한 실력은 되는구나.”
나는 생긋 웃었다.
“허세는.”
내 망치가 다시 한번 커다래지며 가주의 얼굴을 후려쳤다.
“피하고 부리셔야죠. 할머니.”
할머니가 앞을 보았을 때, 난 거기 없었다. 시야에서 벗어나 뒤를 노렸다.
‘목!’
시선이 번뜩이는 동시에 카앙! 날카로운 것이 내 망치를 막아섰다.
‘검이네.’
의외였다. 이 할망구 무기가 검이었나?
검과 도끼가 팽팽하게 맞섰다.
이번 회차에 다시 태어났을 때.
한번쯤 생각해 보았다.
내가 3회차의 모든 능력을 되찾으면 저 할머니보다 강할까?
비등하거나 내가 약간이나마 우세할 거라 짐작했다.
하지만 물의 힘을 사용하지 못한 상태로 가늠했기에 틀렸던 거다.
이젠 알 수 있다.
내 웃음이 진해지는 동시에 물로 된 가주의 검이 쩌적, 쩌쩍. 금이 가더니.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내가 더 강하다.
“아하하. 더 발버둥 쳐 봐요.”
할머니의 소름 돋은 얼굴이라.
흥미로웠다. 재밌었다.
더, 더. 더한 쾌감을 느끼고 싶어. 나는 그래도 되잖아?
내 손에서 작아진 망치가 빙그르르 돌았다.
할머니의 주변으로 내가 가진 망치와 똑같이 생긴 망치들이 떠올랐다.
콰앙!
망치가 일시에 한 사람을 구타했다. 박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에이, 좀 더 발악해 주셔야 재밌지?”
나는 생글생글 웃으며 망치를 양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손잡이를 붙잡아 다시 한번 휘두르는 순간이었다.
- 칼립소!
귀를 쨍하게 울리는 목소리에 멈칫했다.
‘투스?’
속으로 중얼거렸건만 이게 들린 건지 투스가 말을 걸었다.
지금 왜?
나는 살짝 뒤로 물러났다.
물줄기가 뻗어 나와 가주의 사지를 꾹 죄었다.
물론 가주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 곧 끊어질 것이다.
잠시의 시간을 번 틈을 타 투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투스, 망설였어……. 하지만 꼭 얘기해야 해!
‘왜? 뭔데? 무슨 일이야?’
그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내가 예전 가주일 때처럼 미친놈처럼 싸웠구나 싶었다.
‘설마, 에키온에게 무슨 일 있어?’
- …….
예리한 질문이었던 것인지, 망설이는 듯한 투스의 숨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뭐야?
예감이 좋지 않았다.
곧 투스의 목소리가 귀로 들려 왔다. 설명하는 것을 듣는 동안 내 손이 잠시 떨렸다.
‘뭐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쓰는 이 힘이 원래는 에키온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힘이라고?’
투스의 전언이란 이러했다.
에키온이 자신이 성장할 힘을 내게 나눠 줘서 3회차의 내가 쓰던 힘을 끌어와 준 것이라고.
그렇지 않아도 성장하는 데 힘이 부족한 상태이며.
싸움을 길게 이을수록 에키온은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잃는다고.
투스의 목소리는 숫제 울먹이고 있었다.
에키온이, 내가 이걸 알길 바라지 않았다고.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 손에서 망치가 스르륵 사라졌다.
‘뭐 그런, 멍청이가 다 있어?!’
처음으로 용용이에게, 아니 이 미련한 용 공작에게 화가 치솟았다.
‘누가 그런 희생까지 치르면서 소원 이루고 싶대?!’
내 분노에 반응한 주변의 물이 마구 진동했다. 나는 사나움을 담아 할머니를 노려보았다.
‘그래 알았어.’
놀 때가 아니라는 거지?
‘알려 줘서 고마워. 조금 뒤에 다시 얘기하자.’
이미 승부는 났다. 나는 그저 울분을 풀고 싶었을 뿐이다.
‘금방, 끝낼 테니까.’
과거의 원한을 가지고, 이번 생에도 마찬가지의 태도를 유지한 저 할머니에게.
하지만 이것이 내 소중한 이의 삶을 가로챌 만큼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무엇이 중요하겠어.
‘과거의 원한보다는 지금의 영광과 행복이 중요한 거지.’
싸움을 빨리 끝내는 법?
간단하다.
내 뒤로 물들이 한데 모이기 시작했다.
그사이 묶어 둔 물줄기를 벗어난 할머니가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콰아앙!
내 앞에 형성된 물의 장벽과 할머니의 주먹이 부딪혔다.
나는 반투명한 벽 너머 할머니의 주먹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아하.”
알았다는 듯 눈을 살짝 접었다.
“주먹이 주특기 맞죠? 이상하다고 생각했지.”
“……뭐가 말이냐.”
“왜 익숙하지도 않은 검을 들고 덤벼요.”
“…….”
“누가 보면 일부러 맞아 주는 줄 알겠네.”
나는 피식 웃었다. 곧 내 얼굴로 예쁜 미소가 어렸다.
머릿속으로는 오래전 할머니의 말이 스쳐 지나간다.
“약한 쓰레기가.”
“약한 놈이, 불쾌하게.”
맞아 주는 듯한 행태를 취하면 기분 더럽지. 안 그래요?
한 손을 위로 들어 올렸다.
내 뒤로 모인 물이 내 손짓에 따라 긴 띠를 이루었다.
물결처럼 흐물흐물하게 움직인 물의 띠가 가주의 주변을 에워싼다.
할머니는 대항하기 위해 주먹도 물줄기도 휘둘렀지만 소용없었다.
물은 잠시 흩어졌다가 다시 모일 뿐.
“애초에 시간 끌 일이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
무슨 미련이 남았다고.
내가 다시 한번 손짓하자, 할머니를 휘감은 물의 형태가 흩어지며 모습을 달리했다.
곧이어 거대한 고치가 등장했다.
그것도 안쪽 벽엔 가시가 솟아났을 뿐만 아니라, 모든 가시가 할머니의 온몸을 향하는 형태.
고치가 닫히면 가시는 할머니를 찌를 것이다.
“잘 가세요.”
처음 한 격을 주고받을 때, 이미 힘의 격차를 느꼈다.
나는 이 사람보다 강했고.
이렇게 할 수 있었다.
“가주직은 잘 받아 가죠.”
나는 양 손바닥을 쾅 부딪쳤다. 동시에 쩌억 갈라진 고치가 닫혔다.
* * *
칼립소는 ‘고치’라고 표현했으나 대련장에 만들어진 형태는 거대한 관이나 다름없었다.
그것도 안쪽에 가시가 빼곡한.
‘저거, 아게노르 놈 주특기인데.’
지켜보던 아틀란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과거 3회차에서 아게노르는 첩보와 암살 등의 일을 주로 맡았기에, 아게노르의 물의 힘은 빠르고 효과적인 응용에 치중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금 나타난 저 관 형태는 구성하기 까다롭다.
게다가 가시 형태 하나하나 구현해야 하다 보니 컨트롤 하기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라.
과거 형제 중 응용 능력 하나는 가장 뛰어났던 아게노르만 가능했던 일이었다.
남의 최종 필살기를 한 치의 힘듦 없이 구현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그것도 막 물의 힘을 되찾은 인간이.
‘……가주님, 아니 칼립소가 질 거라곤 생각 안 했지만.’
아틀란이 본 건 상상 그 이상이었다.
저 ‘오큘라 아콰시아델’을 거대한 힘으로 압살하듯 이겨 버렸으니까.
그렇다고 오큘라 아콰시아델이 쉬운 상대였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괜히 강한 가주로 불리던 조모가 아니었다.
자신의 전성기를 생각했을 때, 그보다는 강한 사람이었다.
관이 다시 벌어지며 사람을 토해 냈을 때, 한쪽 무릎을 꿇은 오큘라 아콰시아델이 나타났다.
그러나 칼립소는 피투성이에다가 엉망이 된 오큘라는 쳐다도 보지 않았다.
자신의 승리를 확신하듯, 아니. 더는 관심 없다는 듯 심드렁하게 몸을 돌렸다.
“승리 선언 안 해?”
곧이어 칼립소의 승리를 알리는 깃발이 올라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칼립소가 자신의 사람들에게로 돌아왔다.
“야, 너…….”
아틀란이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칼립소가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키온 어디 갔어?”
왜인지, 분노 가득한 표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