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94화 (194/275)

제194화

3일 뒤.

가주와 약조한 내기 날이 밝았다.

내기 장소는 아콰시아델의 실내 연무장이 되었다.

이전 생에서도 가 본 적이 있는 곳이다.

이곳엔 결투를 위한 무대 같은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검투장처럼 경기를 할 수 있게끔 만들어진 대련장이었다.

저곳에서 싸우게 될 것이다.

‘3회차에서는 후계 싸움으로 인해 엄청 부서진 곳이기도 했지만.’

멀쩡한 연무장 건물은 나도 처음 본다는 얘기다.

실내 연무장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는데, 거대한 문에는 아콰시아델 가문의 것답게 커다란 범고래가 그려져 있었다.

범고래 이마에 흉터가 새겨져 있었는데, 초대 용 공작과 싸워서 생긴 상처라나.

선조들부터 싸움을 즐겨 왔다는, 깡패 같은 면모가 아주 오래된 전통임을 증명한다.

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나는 조금 놀랐다.

‘뭐야.’

어찌 됐든 걸려 있는 것이 터무니없이 큰 내기였다.

‘분명 사람이 와글와글 몰려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할머니 뒤로 사람이 전혀 없었다.

아니, 단 한 사람뿐이었다.

왜 사람이 많을 거라 짐작했느냐.

‘가주는 자신이 질 거라 생각하지 않을 테니까.’

가주의 눈에 나는 여덟 살 어린애일 뿐이었다. 아빠를 대리로 내세우지 않은 한 이길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내가 에키온을 통해 3회차의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테니까.

‘그래. 그러니까 사람을 잔뜩 모아서 망신 줄 생각에 들뜨지 않았나 싶었는데.’

텅 빈 연무장은 내게 작은 당황을 안겨 주었다. 뭘까.

가주의 뒤가 휑한 것에 비해 내 뒤로는 사람이 꽤 있었다. 내 세력에서 중요한 이들은 모두 참석한 터였다.

‘이 내기를 장난처럼 여기는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

나는 딴지를 거는 대신 조용히 대련장 위로 올라섰다.

“조촐하게 오셨네요?”

가주는 며칠 사이 조금 더 살이 내린 모습이었다.

그런데 맥아리 없거나 야윈 것처럼 보이기는커녕 더욱 날카로운 맹수 같았다.

가주는 웃지 않았다.

“왜, 이 내기를 우습게 여긴 것처럼 보이느냐?”

“…….”

그렇게 묻진 않았는데?

“사람이 많아 봐야 광대놀음밖에 더 될까. 진지하게 임한 것이란다.”

차분한 말에 나는 흘끗 가주의 뒤에 서 있는 자를 응시했다.

‘어라, 그냥 넘어갔는데 저 사람…….’

뜻밖의 인물이었다.

“결투에는 입회자가 필요하지. 내 쪽 입회자는 저놈이다.”

현 방계 가문에서 가장 강한 가문의 가주였다.

가문의 이름은 ‘키플로’.

가주의 행동 대장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긴말은 필요 없겠지?”

저쪽 입회자가 저 방계 가문 가주라면, 우리 쪽은 아빠였다.

결투는 입회자들의 증언으로 시작되었다.

이 결투의 증인으로 나서며 자신들이 목격자로서 결과에 대해 진실만을 선언할 거다, 뭐 이런 일을 하는 거였다.

거짓을 말할 수 없도록 바다의 맹세로 이루어지는 일이기도 했다.

“별로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어머니의 말은 진실일 거다.”

증인 선언을 끝낸 아빠가 내게 다가와 속삭였다. 할머니가 진지하게 임하는 게 맞다고.

아빠가 인정하니 기분이 묘했다.

“칼립소.”

아빠의 옆에는 에키온이 서 있었다. 어느새 이토록 가까이 다가온 걸까.

얼굴을 숨기기 위해 망토 모자를 꾹 눌러쓴 모습이었는데, 내게 찰싹 붙더니 손을 살포시 잡았다.

물의 힘을 쓰는 데엔 시간 제한이 있으므로 증인 선언이 끝난 뒤에 에키온이 나서서 힘을 사용한다.

약속된 내용이었다.

“이마를 맞대야 한다고 했지?”

“응.”

“그리고 입을 맞추라고?”

“……응.”

이미 에키온이 밝힌 방법을 확인차 읊고 있는데, 관자놀이가 따가웠다.

흘끗 보니, 옆에서 아빠가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하……. 얼른 할까?”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에키온을 잡아당겼다.

“고마워.”

과정이 끝나고서 나는 에키온의 귀에 속삭였다.

곧이어 결투의 당사자들이 자리에 섰다.

나와 가주가 마주 보는 자세로 시선을 부딪쳤다.

‘근데 진짜 된 건가? 내가 3회차의 힘을 쓸 수 있는 게 맞는 건지…….’

용의 도시에서 몇 분간 물의 힘을 쓸 수 있었을 때는 에키온의 힘을 통해 내 힘을 전해 받은 그 순간부터 몸에서 힘이 넘쳐나는 느낌이었는데.

이번엔 조금 달랐다.

‘오히려 몸에 아무것도 없는 느낌…….’

나는 곧 깨달았다.

그래, 그랬지.

예전 지구에서 잠깐 보던 무협지에서는 이런 말이 있었다.

어떤 높은 경지에 이르면 그 사람은 겉으론 일반인과 다를 바 없이 보인다고.

물의 힘도 그랬다.

수없이 경지를 쌓아 올려 마침내 정점에 다다랐을 땐 물의 힘을 사용하지 못할 때와 다를 바 없이 보였던 것이다.

‘와, 이런 상태가 정말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어.’

나는 손을 쥐었다가 폈다.

‘이런 거라면 오랜만이라도 힘쓰는 덴 무리가 없겠는데?’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태산 같은 여자가 내 앞에 서 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에는 세월을 알려 주듯 새어 버린 은빛 머리카락이 섞여 있다.

항상 더럽게 커 보였던 사람.

이 순간.

더는 크게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내 몸 안에 차오른 거대한 힘 때문일 것이다.

잠시 잊고 있었던, 몸속을 휘휘 도는 물의 힘. 그 감각에 집중했다.

3회차 때 나를 정점으로 끌어올린 나의 힘.

‘물의 힘.’

내 손에서 천천히 회오리치듯 물이 흘러나왔다.

“……!”

할머니가 놀란 얼굴을 하더니, 이내 픽 웃었다.

“허, 각성했느냐?”

대답하지 않았다.

답할 의무는 없다.

대신 내 몸에서 용솟음치는 힘을 가만히 느꼈다.

점차 할머니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대체.”

얼빠진 목소리를 비웃을 시간도 없었다.

‘얼마 만이지. 이렇게 충만한 기분은.’

곧 거대한 물의 힘이 일어나며 내 손에 그 형상을 나타냈다.

마침내 내 손에 들린 무기는 거대한 도끼였다.

3회차,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후계 싸움을 정리했던 무기였다.

“이제 싸움이 재밌겠다, 그죠?”

나는 거대한 도끼를 붕붕 흔들었다.

성인 몸에 맞춰진 무기라 약간의 어색함은 있을 줄 알았는데.

무리 없이 움직였다.

‘이건 아빠 덕분인가. 과거 신나게 굴려 주신 아빠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는 발을 뒤로 물렀다.

“하하하, 재밌겠다. 정말로.”

내기는 잠시 머릿속에서 사라지고.

오래전 내가 순수하게 바라왔던 소원이 하나 떠올랐다.

그래. 3회차의 내가 얼마나 바라 왔던가.

‘할머니를 내 손으로 두들겨 패 보고 싶었어!’

그래서 나는 몰랐다.

이때부터 내 눈이 슬슬 맛이 가고 있음을.

* * *

“맛이 갔네.”

뒤에서 가만히 칼립소의 싸움을 지켜보던 아틀란이 중얼거렸다.

“그러네.”

벨루스가 차가운 목소리로 아틀란의 목소리를 받았다.

아틀란은 이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그리고 여기에 사나운 표정을 더해 쳐다봤다.

“뭐야, 이젠 숨길 생각도 없는 거냐, 새끼야?”

“형한테 새끼가 뭐니.”

아틀란은 날아오는 물의 힘을 맨팔로 받아내고는 이를 갈았다.

이 새끼, 형은 개뿔이.

자신보다 뒤늦게 기억을 떠올리더니만은 인정 못 하겠답시고 칼립소 주변만 뱅뱅 돌았던 주제에.

이딴 놈을 어떻게 형으로 인정하란 말인가?

“나는 형 없어.”

덜떨어진 자식은 인정할 수 없다!

벨루스는 그저 서늘한 표정으로 쳐다볼 뿐이었다.

“그럼 얻어터지든가.”

아틀란은 자신 또한 인정부정기(?)가 있었던 주제에 자신이 했던 행동을 까맣게 잊은 채로 벨루스를 탓했다.

“해보자는 거냐?”

아틀란이 주먹을 꽉 쥐는 동시에 연한 색을 띤 물의 송곳이 벨루스를 향했다.

그 순간 벨루스가 펼친 물의 검도 아틀란의 송곳도 거대한 물의 힘에 묻혀 사라져 버렸다.

“조용히 하도록.”

피에르의 힘이었다.

“칼립소의 숨소리가 안 들리잖나.”

조용히 말했지만 ‘조용히 안 해 새끼들아?’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벨루스와 아틀란이 조용히 주먹을 내렸다.

‘아니, 저 인간은 뭐 하는 인간이길래…….’

아틀란은 황당했고 억울했다.

‘회귀자보다 더 센 건데?’

제아무리 자신이 성인이 되기 전의 몸이라지만, 3회차의 전성기였더라도.

피에르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어쩌다 병에 걸려서 죽어 버린 것인지.

늘 가주가 병 걸린 제 아비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건만.

처음으로 그 욕심이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흘끗 보자니, 제 형인 벨루스도 비슷한 생각을 한 듯했다.

두 형제가 딴생각을 할 새는 더는 없었다.

콰앙!

돌아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려 퍼졌으니까.

대련장으로 얼른 고개를 돌린 직후, 아틀란은 거대한 파도를 보았다.

‘와, 저걸 다시 보네.’

저 높은 천장에 닿을 듯 사납게 솟아오른 오묘한 푸른색의 파도.

이전 생, 칼립소를 가주로 만들었던 주특기였다.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해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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