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3화
나는 이렇게 도발적으로 던지면서도 머리 한구석은 냉정하게 가라앉혔다.
당연하겠지만 갑자기 열혈 바보가 돼서 이런 도발을 던진 게 아니다.
만약 내가 여덟 살 몸 그대로라면 절대 던지지 않았을 수였다.
‘에키온 덕분에 가능해진 수지.’
정말이지 복덩이라니까.
물론, 이렇게 던진다고 한들 가주가 흔쾌히 받아들일 거란 생각은 안 한…….
“좋다.”
응? 안 했는데?
의외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가주는 본인이 언제 취했냐는 양 명료한 얼굴이었다.
하기야 범고래들은 대체로 술고래들이니, 저 정도 양으로 취할 리가 없다곤 생각했지만.
나는 눈을 끔뻑였다.
‘진심인가?’
아니면 또 다른 덫? 내가 눈을 가늘게 좁혔다.
본래라면 이 도발은 당연히 거절당할 거라 생각했다.
‘만약 거절하면 이보다 덜한 제안을 건네면서 여기서는 꼭 체결할 생각이었는데…….’
그런데 코웃음 치며 ‘어디서 그딴 소릴 지껄이느냐’며 분노해야 했을 가주의 반응이.
뭔가 이상했다.
정상적이지가 않았다.
‘뭐지, 설마 시간의 틈에 다녀온 뒤로 정신에 이상이라도 생겼나?’
잠시 생각하느라 침묵하는 사이에도 가주의 시선은 갈고리처럼 나를 날카롭게 응시했다.
왜 저리 씹어 먹을 것 같은 원수처럼 보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노려보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뭐 내가 알게 뭐람.
“그리도 이 자리가 갖고 싶으냐?”
“입 아픈 소릴 계속하시네요. 혹시 노망나셨나?”
대답하면서도 생각하기 바빴다.
이런 소리에도 가주는 분노하는 대신 빤히 보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 하. 참으로 웃기지. 결국 날 가장 닮은 게 너라니 말이다.”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래, 깜찍한 손녀야. 어디 한번 묻자꾸나.”
잠을 자지 못한 듯 예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네 속 보이는 도발을 들어준다면. 그 내기에서 내가 이기면, 넌 내 말에 무엇이든 따를 것이냐?”
“내가 내건 건 싸움이지 내기가 아닌데요?”
“서로 바라는 욕망을 두고 싸우면 그게 뭐가 다르겠느냐?”
뭐, 용어야 어떻게 됐든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왜 갑자기 순순히 들어주는 척이죠?”
불쾌하게.
“그러면, 내가 받아주지 않으면 너는 어떻게 하려 했지? 아콰시아델을 떠나려 했느냐?”
이 할망구가 그건 어떻게 알았대. 사실이긴 했다.
나는 상대가 만든 판에 올라갈 생각은 없었다.
굳이 아콰시아델 내부에서 세력을 키울 필요도 없는 데다가 한계가 있을 테니까.
“떠나든 말든 이제 와 무슨 상관이죠? 어차피 내가 후계자 되는 건 글러 먹었는데.”
그래서 그냥 과정 따위 건너뛰고 바로 가주가 되기로 결심했을 뿐이다.
“더는 당신 아래 있을 생각은 없어요.”
“…….”
“하지만 그래요, 내기라고 한다면.”
판은 내가 만든다.
“내기로 하되 패자는 승자에게 절대 어길 수 없는 걸 들어주는 걸로 하죠.”
그러자 웃기다는 듯 비웃음이 돌아왔다.
“네가 이기면, 가주 자리를 내놓는 걸로 모자라 네 명령까지 하나 들어주란 얘기냐?”
“이해력은 정상이네?”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쫄리면 물러서시든가요. 난 아쉬울 거 없는데.”
저 가주가 순순히 내기를 받아들이다니. 내가 왜 이 이상함을 받아들인단 말인가.
내가 유리한 판이 아니라면 차라리 판을 깨트리는 게 나을 터.
한동안 나를 음침하게 보던 가주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해 주마.”
……뭐야, 이 인간 대체 무슨 꿍꿍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할수록 내게 유리한 내기인 거니까.
“들어주기로 한 거, 한 개가 아니라 두 개로 거세요. 그럼 수락해 드리죠.”
“뭐, 그래 주마.”
내가 더 유리하게 바꿔야지.
마지막까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가주를 보면서 찝찝함을 지우지 못했으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한 채로 대화를 마무리했다.
* * *
당연하겠지만 내가 내건 내기를 알게 된 우리 쪽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내기? 왜 그런 걸 제의한 것이지?”
그중에서도 가장 못마땅한 기색을 보인 건 단연 아빠였다.
이제는 자신의 병이 낫고 모든 힘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데, 대체 그런 내기가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말이었다.
“네가 그런 게 필요하다면야…….”
아빠의 말에서 ‘그런 게’가 ‘그딴 게’로 들리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아빠는 강하지. 난 강한 사람 동경해. 싫어하지도 않고. 하지만…… 그 자리는 내가 직접 차지해야 의미가 있지 않을까?”
다른 자리도 아니고 가주 자리인데.
아빠는 내 말이 옳다는 듯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이런 못마땅함이 아빠가 걱정하는 방식이란 걸 알기에 나는 그저 웃음으로 화답했다.
내기는 3일 뒤에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그렇게 내기 쪽 일이 일단락되어서 한숨 돌렸을 때.
슬쩍 미뤘던 일을 처리할 때가 왔다.
조금만 뒤에 이야기해야지, 하고 미룬 이야기. 에키온이 내게 각인한 일을 말하는 것 말이다.
‘아니, 영원히 비밀로 할 수는 없잖아?’
뺨을 긁적였다. 아빠의 반응이 심상치 않을 거라곤 예상했는데.
‘나 아빠가 뒷목 잡는 거, 처음 봤어…….’
드라마처럼 목과 얼굴을 부여잡고 넘어갈 줄이야.
……생각도 못 했다.
철없이 사고를 친 딸이 된 기분이었다고 할까.
그치만, 내가 친 사고가 아닌데…….’
어쨌거나 아빠는 기어이 저택을 날릴 뻔했지만.
웬일인지 웨일 때와 다르게 급격하게 차분해지더니 내게 침착하게 물었다.
“……그래서, 내겐 망할 사위 새끼들이 둘이나 되는 건가.”
음, 정정한다.
하나도 차분하지도, 침착하지도 않은 것 같다……!
문제는 이번에 이 소식을 들은 건 아빠뿐만이 아니란 점이었다.
이 자리엔 하필 가족들뿐이었다.
둘째와 셋째는 물론이고 이번에 나를 도와준 동시에 완전히 내 아래로 들어오기로 한 첫째도 함께 있었는데.
누가 아들들 아니랄까 봐.
‘셋째 빼고는 그다지 아빠랑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거야 원, 저 차갑고 살벌한 표정이 아주 그냥 판박이였다.
“지금 그래서 나한테 매제가 둘이나 생겼다는 미친 소릴 하는 거냐?”
“그게 왜 미친 소리냐?”
“그거야, 너 지난, 악! 아악!”
아틀란놈은 말을 잇자마자 바닥에 쓰러졌다. 고통에 끄악대며 바닥을 쾅쾅 쳤다.
“그래그래, 둘째야. 할 말 못 할 말은 구분했어야지.”
나는 태연하게 아틀란의 팔을 비틀며 몸무게로 꾹 누르곤 말했다.
아마 이놈이 하려던 말은 ‘지난 생에선 아무도 안 만났으면서 왜 지금은 둘씩이나 다리를 걸쳤냐! 미쳤냐!’ 뭐 이런 이야기일 것이다.
“나 참, 여동생을 이렇게 사랑하면 곤란해, 오빠. 우린 이루어질 수 없다고.”
“누우가, 너 같은 바다 마녀랑, 악! 아악!”
“그래그래. 둘째의 혓바닥은 참 정직했지, 참?”
나는 아틀란을 꾹꾹 응징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생긋 웃었다.
“셋째야, 너도 할 말이 많아 보이네?”
“……하하하, 여동생님. 제가 감히 무슨 말을?”
셋째는 요령 좋게 웃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웃는 저놈의 눈이 어딘가 음침하게 반짝거리고 있다는 것을.
“마치 뒤에서 모가지 따 버리면 뭐 어쩌겠어, 하는 표정이네?”
“…….”
내가 널 모르냐, 셋째야.
지난 생에서도 내 눈에 조금이라도 거슬린 적은 쥐도 새도 모르게 암살하던 게 바로 이 아게노르였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죽여 버려서 곤란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건드리면 토끼뜀으로 연무장의 모래를 전부 다 청소해 버릴 수 있는지 경험하게 될 거야.”
“…….”
셋째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기는 하는데, 어째 포기하지 않은 시선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이번에 합류한 첫째는.
“……처음 보는 새끼가, 왜?”
“뭐?”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긴. 나는 벨루스의 말을 곰곰이 곱씹어 보았다.
제 딴에는 작게 말했다지만 내 오감을 피해 가진 못했으니까.
잠시만. ……처음 보는 새끼?
게다가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벨루스의 여러 행적이 스쳐 지나갔다.
마지막으로 내 밑에 깔려 신음하는 아틀란.
분명 도움을 줄 놈을 부르겠다면서 벨루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
왜? 지금은 3회차가 아닌데, 어째서 확신을 가지고 도움을 청했을까?
나는 결론을 내렸다.
“야, 둘째야.”
밑에 깔려 있던 아틀란과 눈을 마주했다.
설마 했지만. 나는 입 모양으로 말했다.
‘설마 저놈도 기억하냐?’
아틀란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슬쩍 끄덕였다.
……미친. 저놈도라니? 이번 생에는 대체 뭐가 있길래 너도나도 신나게 지난 생을 기억하는 건데?
‘뭐 좋은 거라고?’
나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티를 내지 않았다. 여긴 아게노르도 아빠도 있었으니까.
‘하는 수 없지.’
맥락으로 봐서는 아틀란 이놈은 미리 눈치챘던 것 같은데. 이런 중요한 사실을 이제야 공유해?
“넌 나중에 보자.”
“…….”
나는 아틀란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탁탁 털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에키온과 웨일은 내게 필요한 사람이야. 내가 아빠도 아니고 너희 셋의 허락을 받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한 번은 설명해 두겠어.”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감정적으로 설득하는 건 글렀으니, 나는 이성적으로 두 사람이 내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로 했다.
“우선 물의 힘을 각성하지 못한 지금, 에키온은 내가 물의 힘을 쓸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어.”
마치 오디션 프로에서 심사위원 넷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참가자가 된 기분이었다.
……왜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싸움이 있을지 모르는데, 웨일은 어떤 상처든 치료할 수 있어. 게다가 아빠의 병을 치료하기도 했지. 이런 능력이 흔한 줄 알아?”
내가 사납게 세 형제를 바라보자, 벨루스를 제외하고 슬쩍 시선을 피했다.
벨루스만이 잠시 고민하더니 끄덕였다.
“그러니까 하나는 네 보조제고 다른 하나는 네 치료제라는 거군.”
“……넌 또 무슨 비인간적인 묘사를 하고 있어?”
이렇게 말했지만 벨루스의 말이 남은 세 가족에게도 나름의 긍정적인 효과를 불러온 것 같았다.
“그러네? 다 필요하다는 거지?”
“뭐, 그런 거라면야……. 당장 죽을 필요는 없겠고.”
어처구니없이 둘째와 셋째를 바라보다 말고 희망을 걸듯 아빠를 응시했다.
“나보다 약한 놈은 용납할 수 없다.”
아빠는 나보고 평생 혼자 살라는 말을 돌려 말했다.
“후보. 이렇게 가되 훈련부터 시켜 보겠다. 동의하나?”
“……왜 그렇게까지. 음, 어. 대신에 죽거나 신체에 해가 되지 않게 하는 거지?”
결국 이렇게 합의(?)하긴 했지만 나로선 의문이었다. 아빠의 훈련을 통과할 수 있기나 해?
……아니, 에키온은 통과할 수 있으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