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2화
처음엔 아게노르의 말이 대체 무슨 말인가 싶었다.
포위?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이?
“음?”
셋째가 적의 가득한 낯으로 이어 말했다.
“가주가 널 지목해 찾고 있어. 어떡할까?”
내가 신호만 하면 당장이라도 달려갈 듯한 얼굴이었다.
나도 모르게 놈의 머리로 손을 뻗으려다가 이젠 까치발을 들어도 닿지 않는단 사실을 인식했다.
셋째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뒤늦게 내 행동의 이유를 아, 하고 깨닫고 고개를 슬쩍 숙여 주었다.
‘본래 내가 자기에게 손만 뻗으면 조건 반사처럼 머리를 착 숙여 주던 놈이었지. 착각했어.’
새삼스럽게 셋째는 기억이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3회차를 기억하는 아틀란, 기억이 없는데도 가끔 착각할 만큼 이전 생과 비슷한 언행을 하는 레바이.
내가 회귀자인 알고 자연스럽게 행동하는 에키온과 투스까지…….
이런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니, 가끔 셋째놈한테서나 깨닫고 마는 것이다.
지금처럼.
얕은 밀물처럼 밀려오는 감정을 갈무리하며 나는 고개를 들었다.
“뭐, 지금쯤 오리라 생각했어.”
“엥, 가려고?”
“그럼, 내부 전쟁이라도 일으키리?”
셋째놈이 눈에 띄게 불만 어린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내가 맞서 싸우기라도 할 줄 안 모양이었다.
딱히 당장 반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는데, 대체 왜?
“스승님, 아니 아버지가 이제 회복했잖아? 눈치 볼 거 있어?”
아.
“음, 그건 그렇지?”
“그치?? 내가 당장 가서 한 놈 모가지를 따 버릴까?”
“오, 그건 좀 둘째놈 같은 말이네.”
“이씨, 그렇게 말하지 마. 아니면 조용히 암살이라도 해?”
그래, 이번엔 네놈다운 말이네.
나는 작게 피식 웃었다.
아직도 내 손길을 기다리듯 내게 정수리를 내민 채로 열심히 말하는 셋째가 조금 웃겼던 탓이다.
나는 들이밀어진 정수리를 한 번 쓰다듬고는 쭉 밀었다.
“대규모 전투나 내부 반란으로 쟁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데. 별로야. 현 가주가 주요 방계 가문들에게 지지를 받는 현시점에선 부작용이 꽤 커서.”
“뭐 어때, 어차피 다들 결국은 네 힘을 납득할 거잖아?”
“그렇지. 센 놈이 다 먹는다는 기조라면…….”
당장 아빠가 병을 극복했음을 널리 알리고 아빠의 힘을 내세워서 사람을 모으면 충분할 것이다.
그리고 내부 반란을 일으키면 아마 반반.
‘아니다, 육 대 사쯤 되려나?’
그렇지만 결국 우리가 이길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 봐야 결국 여기 사는 모든 이들에게는 폭군을 내치고 또 다른 예비 폭군이 앉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을걸.
“셋째야, 너 지금 가주가 내부 반란으로 가주가 된 거 알고 있냐?”
“어어? 아니, 몰랐는데. 그랬어?”
할머니와 똑같은 방식으로 그 자리를 가지고 싶지 않다.
셋째놈에게 무어라 더 설명을 하려는데 손에 또 다른 감촉이 느껴졌다.
조금 놀라 슬쩍 시선을 돌렸다.
에키온이 내 손을 붙잡고 자기 머리 위에 올리고 있었다.
나는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보드라운 푸른 머리를 만져 주다 말고 창문을 응시했다.
“걱정하지 마. 다 생각이 있으니까.”
* * *
‘와, 많이도 끌고 왔네.’
나는 저택 앞에 모여 있는 이들을 보며 속으로 혀를 쯧 찼다.
“다시 묻지. 정말 가려는 건가?”
“응. 걱정하지 마. 아빠.”
아직 누워 있어야 하는 환자가 내 뒤를 졸졸 쫓아왔다.
사실 아빠는 이제 환자라고도 할 수 없지만.
웨일의 치료는 실로 완벽했고 아빠 저택에 상주하던 의원도 인정한 바였다.
그래도 딸내미 입장에선, 아팠으니 좀 푹 쉬었으면 하는 마음 아니겠나.
“함께 가고 싶은데.”
아빠는 생각이 다른 것 같지만.
“아냐, 내가 직접 가서 들어야 할 말이 있어.”
아빠는 고민하더니 말했다.
“30분. 네가 이 시간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내가 데리러 가겠다.”
“응? 응.”
“그리고 이리될 시, 절대 평화로운 마중이 아닐 거다.”
옅게 흘러나오는 무시무시한 물의 힘에 나는 어색하게 웃었다.
이야, 먼치킨 아빠를 둔 기분이 이런 기분이구나.
사실 이전 생을 포함해 3회차 가주였던 나보다 강하거나 나랑 비슷한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해서 묘한 기분이었다.
이 회차에는 둘이나 있으니 말이다.
나는 아빠한테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함께 쫓아온 에키온을 응시했다.
“에키온, 혹시나 해서 확인차 묻는 건데. 네가 말해 준 거, 사실이지? 내 소원 들어주는 거 말이야.”
“응.”
좋아. 나는 손을 쥐었다 펴며 저택을 출발했다.
저택 앞에 모여 있는 무리는 가주를 따르는 범고래 기사들과 범고래 방계들의 병력이었다.
우리가 시간의 틈에 있는 동안 이삼 일 정도가 흘렀단다.
우리가 돌아온 뒤, 내가 아빠의 치료로 바쁜 동안 할머니는 시간의 틈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에 눈을 떴다.
투스는 꽤 대단한 거라고 했다.
일반 수인이 시간의 틈에 휘말렸다가 살아 돌아오면 보통 일주일에서 한 달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나.
‘썩어도 준치라는 거지.’
아무튼 간에 고작 며칠이지만 가주가 이 저택에 들어가서 나타나질 않았다.
게다가 아빠의 저택에서 나온 가주가 영 심기가 불편해 보이니.
옳다구나, 싸움이 발발하겠다 싶어 알아서 여길 포위한 거였다.
할머니가 직접 지시한 건 아니라지만.
“멍청하기 짝이 없네.”
“가주가 옷이 찢어진 채로 이 저택 밖으로 나갔다면서. 가주는 자신에게 해를 끼친 수인을 절대 가만두지 않으니까.”
놀랍게도 당장이라도 이 저택을 뒤집어 버리려던 세력을 진정시킨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마음껏 날뛸 수 있다 생각하고 신이 난 거겠지.”
지금 내 옆에서 함께 걷는 인물. 바로 내 첫째 오빠인 벨루스였으니까.
우리가 시간의 틈에 들어간 지 반나절쯤 지났을 때, 저택에 방계들이 몰려왔고.
아틀란은 벨루스를 불렀단다.
“그 시점에서 제일 수습을 잘할 놈이잖아.”
뭘 믿고 부른 건지.
첫째는 셋째처럼 내게 충성을 맹세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아틀란은 그냥 느껴지는 게 있었다나. 벨루스를 부른 게 썩 유쾌하진 않은 얼굴로 말했다.
“그 새낀 내가 제일 잘 알아.”
감으로 사는 놈이니,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벨루스는 상황을 정리하는 걸로도 모자라 며칠 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미뤄 주었다.
첫째놈은 가주의 부름에 뻔뻔하게도 내가 아프다고 거짓말을 했단다.
“저도 칼립소 아콰시아델에게 결투를 신청하려 찾아갔지만, 아파서 싸우지 못했습니다. 아쉽게도.”
평소 벨루스와 내 사이가 냉랭하다는 걸 아는 할머니가 별말 안 하고 넘겼다나?
‘사실 미뤄 주지 않았다면 아빠가 눈을 뜨는 걸 못 보고 갈 뻔했지. 게다가 날뛰는 놈들 수습도 성가셨을 거고.’
게다가 아빠 저택 앞에서 싸울 기회만 호시탐탐 노리는 놈들도 처리해 주었고.
‘이게 바로 잠재적 아군인가.’
나는 곧 가주의 집무실 앞에 멈춰 섰다.
함께 온 첫째가 나를 흘끗 보더니 나지막하게 경고했다.
“……가주님이 뭔가 이상한 것 같더라.”
이상하다고? 하긴 뭐, 나랑 시간의 틈에서 별의별 걸 봤으니.
이전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부탁이 있는데, 여기 서 있다가 혹시나 아빠가 여기까지 쳐들어오면 한 5분 정도만 막아 줄래?”
“꼭 싸움이 있을 거라 가정하는 말이네. 게다가 지독히 어려운 요청까지 내밀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해 줄 거잖아?”
아님 말고.
내 시선이 옮겨 가 벨루스의 예쁘장하고도 우아한 낯에 멈췄다.
“나는 어중간한 거 싫어해. 이제 위치 확실하게 해. 나랑 편 먹을지 적이 될지.”
사실 내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도와줬으니, 이쯤 되면 나한테 편승한 거 맞잖아?
나는 문고리를 잡았다. 귀로 아주 작은 숨소리가 스쳤다.
익숙한 웃음소리였다.
“그래, 좋아. 들어줄게.”
나도 모르게 함께 웃음을 매달고는 문을 열었다.
집무실로 들어가면 늘 할머니 옆에 그림자처럼 있던 보좌관, 멸치 수인은 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방 안에 가주 홀로 앉아있었다.
가만히 자리를 지키는 모습이 다른 때보다 좀 더 커 보였다.
가주는 고개를 숙인 채로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커다란 손에는 손에 딱 맞는 컵이 들려 있었다.
‘……술?’
소파 앞 테이블에는 각종 비싼 양주가 늘어져 있었다.
병 하나는 엎어진 채였다.
고급스러운 병들을 보다가, 마지막으로 엎질러져 뚝뚝 떨어지는 금색 술을 보았다.
금색 물방울이 뚝, 떨어진다.
“앉거라.”
나는 이 말을 들었음에도 가만히 있었다.
“용건을 말씀하시죠, 가주님.”
“…….”
그러자 가주가 느릿하게 고개를 들었다.
깊은 바닷속 해초처럼 축 늘어진 머리카락, 그 사이로 형형하게 빛나는 검푸른 눈동자와 마주했다.
“가주님?”
왜일까, 거대하고 위압적으로 앉아 있지만. 작살에 꿰인 고래를 보는 기분이었다.
맹수는 작살에 꿰여도 맹수였다. 오히려 상처 입을수록 더욱 사나워진다.
‘위험한데.’
지금의 가주가 딱 그런 형국이었기에 나는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면서도 슬쩍 다리를 벌렸다.
언제라도 마음먹으면 주먹을 휘두를 수 있도록.
가주가 픽 웃었다.
“그 시건방진 말투는 어디 버렸느냐.”
“바라신다면 드리겠지만, 거기와 여긴 공간이 다르니. 최소한 예의를 차리는 거죠.”
“…….”
“인간이니까 하는 도리.”
가주가 술을 즐겼던가? 뭐, 즐겼든 말든 내가 알 바이던가.
어차피 이젠 내숭도 다 알려진 처지에 나는 뻔뻔하게 섰다.
비록 당장은 힘이 부족하다 해도 이젠 에키온 덕에 좋은 방법이 생기지 않았던가.
그저 이상한 것은 가주의 시선에는 그저 분노만이 있지 않았다. 뭐에 화가 났는지는 몰라도.
‘자기가 통제하지 못한 것이 있단 사실에 화가 난 거겠지.’
저 눈에는 영문 모를 것이 잔뜩 섞여 있었다.
가주는 날 빤히 보더니 툭 말했다.
“아직도 이 자리가 갖고 싶으냐?”
의아한 소리였다. 갑자기?
뭐, 후계자가 되려 애를 썼으니, 자연스럽게 그리 생각했겠지.
“내가 있는 이 자리가 갖고 싶으냔 말이다.”
“왜 굳이 고래가 새우 먹어치우는 소릴 하는지 모를 일이네요. 당연한 것을.”
나는 여전히 한 대 맞은 듯 사나우면서도 예민해 보이는 가주를 쭉 훑다가 툭 입을 열었다.
에키온이 내 소원을 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 바로 떠올린 것.
“나랑 한판 싸웁시다.”
범고래 무리의 주인은 가장 강하고 지혜로운 범고래가 맡는다.
그렇다면 이 가문에서 가장 강하고 지식이 쌓인 이는 누구인가.
바로, 나다.
나는 오만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손을 까딱였다.
다분한 도발이었다.
“내가 이기면 그 자리 내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