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90화 (190/275)

제190화

레바이가 방법이 없다고 한 이상 정말 없는 거라고 봐야겠지만.

세상은 넓고 나 또한 앞선 회차에서는 몰랐던 웨일 같은 존재가 있었듯.

또 어떤 방법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 방법을 발견할 즈음엔 우리도 꽤 성장해 있지 않을까.

정확히는 웨일이. 지금보다는 성숙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아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누가 이렇게 손해 보면서까지 도와주겠어.’

나는 웨일에게 고마웠고, 훗날 웨일이 후회하지 않길 바랐다.

‘뭐, 나야 남편이야 평생 있든 없든 상관없단 생각이기도 하고.’

그렇기에 웨일이 추후에 정말 우리를 묶은 힘이 사라진 뒤에도 내가 좋다고 한다면.

그때에 내게도 죽고 못 사는 누군가가 없다면 그대로 같이 살아도 좋았다.

“…….”

아빠는 대답이 없었지만, 나는 알았다. 이 침묵이 긍정의 침묵이었으며.

아빠는 여전히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이야, 아빠가 얼마나 나를 사랑하는지 알아서 기분이 좋은걸.”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빠는 서늘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미래의 일이야 어떻게 되었든 지금은, 나는 나보다 약한 사위를 받아들일 마음 따위 없다.”

웨일에게는 별로 좋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어째서인지 웨일은 화색을 띤 얼굴이었다.

* * *

어찌 저찌 상황이 일단락되었다.

뭐 완전히 봉합된 건 아니지만.

한고비를 넘긴 기분이랄까.

‘다만, 앞으로 웨일은 두고두고 힘들 것 같은데…….’

이거 괜찮은 건가?

아빠의 방 앞에서 나는 머뭇거렸다. 아빠가 웨일과 할 이야기가 있다고 나가 보라고 하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상태였다.

레바이는 나랑 같이 쫓겨났는데,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다.

“저, 공녀님.”

레바이가 내게 말을 건 순간, 누군가 동시에 나를 불렀다.

“칼립소!”

돌아보면, 푸른 머리를 가진 소년이 폴짝 내게 뛰어왔다.

나는 얼떨결에 어깨를 잡아 주며 고개를 갸웃했다.

“투스?”

에키온과 똑같이 생겼지만 나보다 키가 작으니. 투스였다.

“칼립소! 투스 할 이야기 있어. 꼭 해야 돼! 중요해.”

“어엄, 지금?”

“꼭 해야 해! 공작님 관한 일이야!”

나는 레바이를 한번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일인진 몰라도 조금 뒤에 이야기해도 괜찮아?”

“……예, 괜찮습니다. 공녀님.”

레바이는 복잡한 표정을 하면서도 흔쾌히 수긍해 주었고, 나는 투스와 함께 이 저택에서의 내 방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야, 투스?”

“…….”

그런데 웬걸, 투스는 힘차게 나를 찾아와 놓고서는 막상 판을 깔아 주자 우물쭈물하는 모습이었다.

마치 내 눈치를 보듯이.

“칼립소, 투스 공작님 부를 수 있어. 여기 불러도 돼……?”

“응? 당연히 괜찮지.”

곧 투스의 몸에서 푸르른 빛이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에키온이 내 방에 짜잔 하고 나타났다.

꽤 신기한 광경이었다.

투스의 능력인 건지, 에키온의 능력인 건지 몰라도. 꽤 편해 보이는데?

‘나중에 원리가 어떻게 되냐고 물어봐야겠다.’

나는 에키온이 나를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내 옆으로 올 거라 생각했다.

“……칼립소.”

“응, 어서 와. 에키온. 신기하게 나타났네?”

그러나 왜인지, 에키온은 투스 옆에 섰다.

미묘한 아쉬움과 허탈감이 들었다. 음? 허탈감?

에키온이 유독 껌딱지처럼 내 옆에 붙어 있긴 했었지. 가볍게 넘기고는 투스를 응시했다.

“투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에키온에 관한 이야기라며?”

그러나 왜인지 투스는 여전히 말을 떼지 못하고 슬쩍 에키온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에키온은 나를 보기는커녕 투스를 빤히 응시했다.

이상하게도 뭔가 압박이라도 하는 것처럼…….

“끄응, 투스, 그냥 이야기할래.”

“……? 이야기해. 뭔데 그래?”

“칼립소, 결혼했어?”

“어? 어어. 뭐. 음…… 애매하긴 한데 맞냐 아니냐를 따지자면 그렇긴 한데.”

“투스 인간 세상 공부했어. 책, 많이 읽었어.”

맞는 말이었다. 투스는 생각보다 박식했다.

여기서 며칠 동안 투스가 에키온에게 책을 읽어 주는 동안 나도 옆에서 같이 들었는데.

예상보다 많은 걸 알고 있더라고.

“결혼은 반려를 선택해서 평생 함께 사는 거야. 칼립소, 투스 말 맞아?”

“응, 그렇지?”

내겐 ‘반려’라는 단어보다는 ‘배우자’라는 단어가 익숙하긴 하지만.

여긴 수인들의 세상이다 보니 반려라는 말을 많이 쓰는 것 같았다.

“투스, 언젠가 칼립소한테 이야기한 적 있어. 공작님 가장 먼저 유대감을 가진 인간에게 ‘감정’을 배운다고.”

“어, 으음. 네가 준 기록에서 봤어. 똑똑히 기억해.”

그래서 에키온은 내게서 감정을 배웠다. 이 사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게 뭐 어떻다는 거지?

“투스는 그 기록에, 한 가지를 적어 두지 않았어. 너무너무 중요해서 적지 않은 거야.”

“으음?”

“용 공작님, 처음 유대감을 가진 인간에게 감정을 배우고, 선택할 수 있어.”

“……선택?”

투스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나와 에키온을 번갈아 보다가 이내 울상을 지으며 한숨 쉬었다.

“투스, 용 공작님 약점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어…….”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칼립소, 용은, 출산을 통해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살아가는 방식 또한 일반 수인과는 달라.”

투스는 강조하고 싶은 건지, 양손을 확 펼쳐 ‘이마아안큼 중요해’ 하고 말했다.

“그래서 만들어진 게 각인과 반려였어. 용 공작님은 ‘각인’이라는 걸 해야 해.”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용은 평생 살아가면서 자신을 숨 쉬고 살아가게 해 줄 단 한 명의 반려를 필요로 해.”

“저기, 투스? 좀 알아듣게 설명을…….”

“투스는, 언젠가는 용 공작님이 칼립소를 반려로 택할 거라고 생각은 했어!”

투스가 결국은 울먹이다 못해 훌쩍이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당황해 투스의 손을 잡아 주었다.

이렇게 보여도 이쪽도 아직 어린 아기 뱀이 아니었던가.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아니, 그래서 왜? 내가 반려로 탈락했어?”

“아니, 칼립소, 용 공작님은…….”

투스가 내게 안긴 채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미 칼립소에게 일방 각인을 해 버렸어…….”

“으응?”

뭐가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아주 중요한 각인이란 걸 나한테 해 버렸고.

그, 엄…… 그러니까.

“무를 수 없어?”

“없어…….”

맥락상 그 각인이 용 공작에겐 치명적인 약점이란 소리 같은데.

나는 눈이 팽팽 돌 것 같은 혼란 속에서 최대한 차분함을 유지했다.

정리해 보자.

우리 용용이가 내게 뭔갈 했다. 근데 그게 중요한 거다.

어느 정도냐면 앞으로 에키온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못해 빼놓을 수 없을 정도로.

심지어 약점이란다.

그런데 무를 수가 없다……?

에키온은 언제 투스를 쳐다봤느냐는 듯 이제는 나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어쩐지 그 시선에서 잃어버린 것을 찾은 듯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지만.

이와 별개로 아득해졌다.

‘뭐야, 그러니까…….’

사고는 쳤는데 수습이 안 되면 어쩌란 말이지.

모든 생각 정리가 끝이 났을 때, 내게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마치 예쁜 금붕어가 이리저리 사고를 쳐 놓고 본인은 유유하게 헤엄치는 걸 보고 있노라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그걸 대체 언제 한 건데?”

“……마차에서.”

대답은 투스가 아니라 에키온에게서 들려 왔다.

“칼립소가, 어떤 시간을 보여 달라고 할 때, 했어.”

그 말에 나는 떠올렸다.

세 살, 용의 도시에서 아콰시아델로 돌아가던 길.

에키온이 내게 지구에서의 부모님을 보여 주던 날을.

그리고 그날로부터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칼립소, 좋아하면 목줄 줘야 한댔어.”

“……그 말은 나중에야 했잖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저 예쁘고 귀한 용 공작님의 목줄을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에키온이 내 앞에서 활짝, 예쁘게 웃었다.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환하게.

“처음부터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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