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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188화 (188/275)

제188화

웨일이 일으킨 빛은 신기하게도 창문 하나 열리지 않은 방에 바람을 불러왔다.

방 안 가득 거대하게 펼친 바닷속에서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움직였으니.

그래서 눈에 띄었던 걸지도 몰랐다.

“음, 내 리본은 웨일에게 줬어.”

“……왜?”

신기했다.

평소엔 오로지 나 아니면 나와 자신의 관계 외엔 관심이 없던 에키온이 나와 다른 이의 관계에 대해 궁금해하다니.

“웨일에게 줘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거든.”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아빠나 레바이에게 먼저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괜찮겠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에키온인걸.

“웨일을 평생 책임져야 하니까.”

이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든 순간, 나는 쿵! 어깨에 거대한 쇳덩어리를 얹은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실제로 물리적인 충격을 받은 게 아니었다.

그저 에키온이, 마치 세상을 잃은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평생?”

이상했다.

에키온이 내 옆에서 내가 수하를 받아들이는 걸 보는 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텐데.

왜 그때와는 다르게 반응하는 걸까?

내가 만약 유치원 선생이라도 지금까지 눈물 한번 보이지 않던 애가 울면 더 집중이 된다고.

안 그러던 애가 절박하게 바라보니 내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어어?”

에키온의 손은 여전히 나를 붙잡고 있었다.

웨일은 계속해서 기도 중이었고 거대한 빛은 우리 사이를 감돌고 있었다.

“칼립소는, 자기 거 주는 사람 아니잖아.”

“……어, 음, 나를 그렇게 잘 알아?”

“칼립소의 것을 궁금해하면, 차라리 새 걸 사 줄 거잖아.”

“…….”

음, 잘 아는구나. 멍청한 질문이었단 건 뱉고서야 알아차렸다.

그나저나 어떻게 알았을까?

고작해야 내 리본을 웨일에게 준 것만으로, 에키온은 지금까지와는 뭔가 다르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용들이 눈치가 빨랐던가?

그렇다기엔 처음 보여 주는 모습이었다.

나는 망설이다가 조금 웃었다.

“지금은 조금 봐주라, 에키온.”

“…….”

“나, 아빠가 다시 눈을 뜰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기로에 선 이 순간에 네게 집중하고 있어.”

“…….”

나는 가만히 생각하다가 말했다.

“만약 다른 사람이 너처럼 지금 말을 걸었다면 누가 됐든 무시했을 거야.”

내가 살짝 웃었다.

“지금은 이걸로 안 될까?”

아빠를 흘끗 보고 웨일까지 보았다. 아직 치료 중인지 둘 다 미동도 없었다.

에키온이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성큼 다가왔다.

평소처럼 다가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에키온의 홍채가 선명하게 느껴질 정도로 가까워지고서야 알았다.

가깝다.

“칼립소, 가르쳤어.”

“…….”

“유일무이한 것.”

감정이 실리지 않은 아이의 목소리가 귀로 송곳처럼 쿡쿡 박혀 왔다.

보석같이 아름다운 눈동자가 맹목적으로 나를 향한 채 일렁거렸다.

나를 향한 맹목은 지겹도록 보아 왔지만 조금 다르게 느낀 건 역시 에키온이 용이기 때문인가?

네 언어는 보통 사람들과 달라서 좀 더 집중하게 만들곤 했다.

“책에서 봤어. 「구원엔 책임이 따른다.」”

“……우리 용용이,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알아?”

“칼립소 나 전부 가져.”

이 용용이는 가끔 사람 헷갈릴 말을 많이 한다.

처음 언어를 배웠기에 구분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청혼을 듣고 난 뒤라 내가 달리 듣는 걸지도 모르고.

“나한테 너무 아까운 걸 주는데.”

나는 고민하다가 양손을 펼쳤다. 옆방에 있을 할망구가 자극해서 폭주할 뻔한 에키온을 이렇게 끌어안았던 기억이 있어서.

“너무 소중하고 무거운 거라서 네가 좀 더 생각해 보면 좋겠는데.”

혹시 불안을 느끼는 거라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에키온이 다가와 폭 안겼다.

“네가 원하는 만큼 내 옆에 있다가 가.”

“…….”

나는 커다란 고래를 안듯이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었다. 진정하라는 듯이.

내게 애착 관계를 형성한 에키온이니, 웨일이 이 관계에 방해가 된다고 느낀 걸지도 몰랐다.

에키온이 내 목에 머리를 살짝 비비며 작게 속삭였다.

“……칼립소, 책에서 또 읽었어. 좋은 말.”

“응. 그걸 마지막으로 하고 나머지는 다음에 이야기하자. 괜찮아?”

대답은 없었지만 에키온이 고개를 끄덕이는 게 느껴졌다.

“책에서…….”

곧이어 아이의 목소리가 귀를 나직하게 울렸다.

“「구해서 얻은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구하지 않고 얻은 것은 더 좋은 것이다.」”

마치 보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필요해 웨일의 청혼을 수락했고.

내가 바라지 않았던 자신의 애정이 그 청혼보다 더 좋은 것이라는 양.

‘……의도치 않게 인기 폭발이네. 나.’

아마도 에키온이 웨일처럼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니겠지만.

이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세 시간 뒤.

모든 치료가 완료되었다.

“치료는, 끝났어.”

그리고 웨일은 치료가 끝난 동시에 쓰러졌다.

* * *

커다란 방.

침대에는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 채 커다란 남자가 누워 있었다.

새카만 머리카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쿡쿡 찍힌 하얀 머리카락이 범고래임을 알려 주었다.

그리고 침대 밑에 앉아 있는 내 발치에는 푸른 머리의 소년이 담요를 덮고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에키온이 나와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이리 불편히 잠든 것이었다.

돌아보면 깜깜한 밤이었다.

눈이 뻑뻑해서 마구 문질렀다.

“치료는 잘 되었습니다.”

모든 치료가 끝난 뒤 쓰러진 웨일은, 이틀이 지난 지금에도 아직 일어나지 못했다.

웨일의 능력을 잘 알고 있는 레바이가 대신 전해 주었을 뿐이었다.

그 뒤로 레바이는 정성껏 웨일을 간병했고, 나는 아빠의 옆을 지켰다.

이미 나는 세 살에 거대한 양의 빨래와 청소를 아무렇지 않게 해치웠다.

여덟 살인 지금 쓰러진 사람을 간병하는 일이 어려울 리 없었다.

‘일어난다더니 대체 언제 일어나는 거야?’

모든 것을 뒤로 미룬 채였다.

에키온과의 대화도, 웨일과의 일을 레바이에게 털어놓는 것도.

나를 찾는 아틀란과 아게노르, 일리아와 라일라의 방문을 허락하는 것도.

그저 눈앞의 가족이, 아빠가 눈을 뜨기만을 바랐다.

“……나는 더는 누군가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조용한 방 안, 어떻게 지나간 것인지 모를 이틀이었다. 오랜 침묵 끝에 진심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이었다.

꽉 닫힌 새하얀 눈꺼풀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아래로 늘어트린 속눈썹은 길고 풍성하여 성인 남성의 것 같지 않았다.

섬세하게 느껴지는 속눈썹과 다르게 어딘가 피로하고 퇴폐적인 얼굴이었다.

아빠의 눈꺼풀이 다시 한번 진동하더니…….

이윽고 스르륵 벌어졌다.

나는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모를 얼굴로 인사했다.

“일어났어?”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소감이 어때.

이 멍청한 아빠야.

“…….”

아빠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다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 가지만 알려 주면 좋겠군.”

“뭘?”

“천국인가?”

나는 울상인 얼굴로 결국 웃고 말았다.

“……아빠는 천국 못 가. 하나뿐인 딸 속을 더럽게 썩여서.”

“그것참. 마음에 들면서도, 들지 않는 죄명인데.”

“…….”

아빠가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앞으로 잘해야겠군.”

“그래, 잘해야 할 거야.”

나는 아빠의 손을 꾹 잡으며 눈을 비볐다.

“기어이 아빠의 병을 고쳐 놨으니까. 앞으로는 오래오래 살아. 나보다 더 오래 살란 말이야.”

아빠가 멈칫했다.

그대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꿈결에 내 말을 듣기라도 한 양.

얼떨떨한 표정의 아빠라니.

참으로 희귀한 표정이었다.

내가 참지 못하고 웃는 동안 아빠의 입이 떨어졌다.

“그……런가. 그렇게 된 거군.”

“응. 맞아.”

가볍게 응수해 주기 무섭게 내 몸이 둥실 떠올랐다. 익숙한 부유감에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다.

나는 흘끗 아래에 곤히 잠든 에키온을 바라보다가, 에키온이 여전히 새근새근 잠든 걸 확인하고는 손을 휙 뻗었다.

곧 아빠가 나를 꼬옥 껴안았다.

여느 때보다도 꼬옥 껴안은 채로 속삭였다.

“……고생했겠어.”

“뭐, 고생은…….”

시간 여행 한번 했고, 가주에게도 대들어서 지금까지 쌓은 좋은 이미지가 싹 날아가 버렸지만.

뭐 어때.

행복엔 값을 따지지 않는 거다.

“살아 있으면 됐지. 이제 아플 일 없으면 된 거야.”

이제, 아빠는 적어도 자신을 지긋지긋하게 괴롭힌 병으로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빠.”

괴로울 일도 없을 것이고, 힘을 쓸 때 내가 얼마나 더 살 수 있을까 생각하며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나는 아빠에게 떨어져 활짝 웃었다.

“족쇄에서 자유로워진 기분이 어때?”

아빠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웃었다. 그 어느 때보다 기쁘고 환하게.

“글쎄, 지금은 네 얼굴을 다시 보는 것이 가장 기쁜데.”

“어우, 닭살.”

“딸을 잘 둔 게 이런 기분인가?”

“호들갑.”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빠의 품에서 기쁨을 가득 담은 낭랑한 웃음소리를 토해 냈다.

그렇게 한동안 둘이서 기쁨의 해후를 펼쳤다.

아빠는 어떻게 자신의 치료가 가능했는지, 왜 빠르게 치료할 수밖에 없었는지 등.

자신의 상태를 궁금해할 거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물어보는 질문은 다 나와 관련된 질문이었다.

어떻게 지냈는지.

무얼 했는지 등등.

나는 하나하나 답해 주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손뼉을 쳤다.

“아, 그러고 보니 아빠.”

“음?”

“깜빡했는데, 꼭 알아야 할 게 있어.”

아빠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니, 내내 곁에 있느라 경황이 없어서 레바이에게도 말을 못했는데 말이지.

“음, 듣고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네.”

“……? 새삼스럽군. 넌 용의 성도 박살 내달라고 태연히 말하지 않았나?”

“그게 뭐 놀랄 일이야?”

“아무튼 간에 듣고 판단하지.”

나는 끄덕였다.

음, 그렇게 큰 충격은 아니겠지?

“아빠가 잠든 사이에 나 음, 결혼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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