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웨일과 나의 시선이 교차했다.
웨일이 시선을 피할 거라 생각했지만……. 웨일은 단풍처럼 물들인 채로도 끝내 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미안해. 하지만…… 말했듯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가 가족이 되는 방식은 이것밖에 없었어.”
나는 그제야 진정했다.
“일단, 네가 미안하다고 할 일은 아니지. 미안할 일은 아니잖아.”
날 위해 소중한, 아니, 얜 소중한 걸 몇 개나 거는 거야?
‘흰수염고래가 다른 생물에게 친절하단 건 알지만, 그, 호구라는 이야기는 들은 적이 없는데?’
당황한 나머지 생각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정신 차리자.
하긴 가족에게만 해당되는 규칙이라고 했으니, 완벽한 타인이 가족이 되는 수는 이것밖에 없긴 했다.
“근데 이런 식으로 청혼한다고 우리가 가족이 돼?”
“네가 받아들이면 힘이 우릴 묶어 줄 거야.”
“그렇구나.”
나는 생각보다 태연하게 상황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아니다.
생각해 보니까, 정말 결혼밖에 없는 건가?
타인이 가족으로 묶이는 방법.
“……저기 있잖아, 웨일. 만약 가족으로 묶여야 한다면 꼭 결혼이 아니더라도 다른 방법도 있지 않아? 그러니까 음…… 입양은 어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웨일이 잠시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일단 입양으로 진행한 사례가 전혀 없단다.
긴 시간 동안 이 방법을 떠올린 게 우리뿐이 아닐 테니, 불가능한 것 같다고.
“이런.”
“무엇보다 칼립소. 입양을 한다고 하더라도 당사자가 일어나서 승인해야 할 텐데, 그분이 눈을 뜨지 못하고 있잖아.”
차분한 반박에 나는 수긍하고 끄덕였다.
인정해야 했다.
“웨일, 정말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상관없어.”
“…….”
“너랑 결혼을 하든 부부가 되든 딱히 상관없다는 말이야. 근데 그거…… 이혼 가능한 거야?”
“……아니.”
웨일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우린 평생 한 명의 짝만 바라보는데…….”
“그래? 우린 달라.”
사실 눈 딱 감고 웨일의 삶이야 어찌 됐든 그저 호의만 받아들이는 수도 있지만.
이미 날 위해 소중한 일부를 희생하겠다고 나선 애한테 어찌 그런단 말인가?
“날 위해서 나서 준 건 정말 고마워. 이렇게 청혼해 준 것도 말이야. 그런데 웨일. 우리 범고래들은 사실 이성적인 부분에서 그렇게 도덕을 찾지 않는 수인들이야. 알고 있어?”
자연에서 범고래는 딱히 일처일부가 아니었다. 이건 우리 수인들에게도 반영되었다.
“나는 가주가 될 거고 우리 가문은 가주가 남편을 몇이나 두든 상관없는 곳이야. 우리 할머니도 남편이 많았어.”
“…….”
“그런데 너희 흰수염고래 수인들의 문화는 우리와 많이 다르잖아.”
내가 뭐 문란하게 남편을 몇이나 두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도 이런 사실만으로 기분이 나쁠 수 있었다.
웨일은 말없이 차분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리 급하다지만 누군가의 평생을 저당 잡을 정도는 아니야. 너도 네가 좋아하지 않는 사람과 이런 식으로 맺어지는 건 아닌 것 같아. 차라리 내가…….”
“안 좋아하는 거, 아닌데?”
“어?”
“왜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
이번엔 내가 말이 없어질 차례였다.
“나랑 레바이 형을 구해 준 게 너잖아.”
나는 눈을 깜빡였다.
“……삶을, 구원해 준 상대를 좋아할 수도 있는 거잖아.”
회색 눈 안에서 나로서는 짐작 못 할 것이 일렁이고 있었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해……?”
나직한 목소리, 이것과 반대로 흐려지는 얼굴에 나는 조금 당황했다.
뭐야, 얘 우는 거 아니지? 설마. 설마!
머릿속에선 레바이가 ‘웨일은 덩치가 클 뿐 보이는 것보다 어리다’고 하던 말이 떠올랐다.
어린애를 울리고 싶지 않다고!
“칼립소, 나는 늘 내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만큼 우릴 쫓아오는 상어의 추격은 매서웠으니까.”
나는 기분이 묘해졌다.
웨일은 자신의 죽음을 확신하는 말투였고, 이는 앞선 회차에서 실제로 그의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러니 나는 본래라면 이 시점에 죽었을 아이와 대화 중인 거다.
“그래서인지, 나는 가끔 지금 살아가는 삶이 여분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그것참 너무 쓸데없는 소리네. 여분의 삶이란 게 어딨어?”
“응. 너라면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웨일의 얼굴로 다정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너는 선하지 않은데, 그렇다고 누군가를 버리지도 않는 것 같아서.”
덤덤한 얼굴에 핀 작은 꽃 같다.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그러니까, 네가 구해 준 삶…… 네가 날 데려가 주면 안 돼?”
“……얘가 레바이 뒷목 잡는 소릴 하네.”
레바이가 동생 키우듯, 과장해서 자식 키우듯 애틋하게 웨일을 챙기는 걸 봤다.
그런데 내가 홀랑 결혼?
‘아니, 데려가겠다고 하면 죽이려 드는 거 아니야?’
하지만 역시나,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동안 침묵 끝에 하아, 숨을 내쉬었다.
“언젠가 네 결정을 후회하게 될지도 몰라.”
웨일이 좋아한다고 했던 말. 그래,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어려.’
나는 이 말이 그저 좋은 친구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감정이라 생각했다.
“…….”
유치원에서 선생님으로 일하다 말고 조그마한 꼬맹이에게 결혼하자는 소리를 듣고 설득하는 게 이런 기분일까.
“미안한데, 웨일. 나는 태어나서 누굴 이성적으로 사랑해 본 적 없어.”
60년이 넘도록 한 번도 없었다.
“괜찮아. 나도 네가 처음이야.”
“나는 아니란 소리야.”
나는 웨일의 멱살을 쥐어 그대로 훅 잡아당겼다.
우리의 얼굴이 가까워졌고, 나는 웨일을 빤히 응시했다.
“나한테 사랑을 바라지는 마. 웨일.”
이건 웨일을 위해서였다.
내가 60여 년을 살면서 깨닫지 못한 감정을 새삼 지금이라고 알게 될 것 같진 않아서.
“대신 나랑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도록, 널 행복하겐 해 줄게.”
나는 손을 뻗어 웨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였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넌 정말 나로 괜찮겠어?”
웨일이 가까워진 앞에서 천천히 끄덕였다.
“……응, 괜찮아.”
……결심으로 빛나는 눈이다.
아이고 성인이고 할 것 없이 나는 이런 눈을 좋아하지 않는다.
날 위해 죽은 자들이 마지막까지 이런 눈을 했으므로.
이런 눈을 하면 더는 설득할 수 없다는 소리기도 했다.
……뭔 결혼을 이렇게 얼렁뚱땅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신랑 맞이를.
나중에 물의 힘을 되찾으면 이거 물릴 수 있는지 살펴볼까.
“……그래. 잘 부탁해. 이젠 뭘 하면 돼?”
“내가 널 정할 거고, 힘이 우릴 묶어 버릴 거야.”
“그래.”
곧 웨일에게서 웨일을 닮은 부드러운 빛이 흘러나오더니 내 팔을 휘감았다.
손가락을 감싼 형태가 마치 반지 같다고 생각한 순간 손끝부터 손등, 팔까지 휘감은 빛이 사라졌다.
“된 거야?”
“어어…….”
손에는 아무런 흔적이 남지 않았다. 아니, 안 남았나? 손에 희미하게 뭔가 새겨진 것 같아 살펴보려 했지만.
시간이 시간인지라 일단 나중으로 미뤘다.
“칼립소, 가자. 시간이 없어.”
“어……. 그래. 근데 잠깐만.”
나는 손을 뻗어 머리를 묶고 있던 리본을 풀었다.
“급한 대로 이거라도 하고 있어.”
나는 웨일의 손에 푸른 리본을 묶어 주었다. 리본에 달랑 매달린 보석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웨일은 주춤한 모습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데?”
“예물.”
“……어?”
“나랑 결혼하는 놈은 무조건 데릴사위행이야.”
“…….”
“뭐 반쯤은 농담이고, 그래도 네가 큰 결심 했는데, 뭐라도 줘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나는 생긋 웃었다.
“미안, 같은 감정이 아니어서.”
“…….”
“다음엔 더 좋은 걸 줄게.”
이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웨일이 내가 준 리본을 조심스럽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레바이 형이…… 이런 말 한 적 있는데.”
“응?”
“이, 이런 거 유죄라고…….”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내가 죄인이라고?”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도 웨일의 손을 잡고 얼른 아빠가 있는 방으로 돌아왔다.
“문제를 해결했어. 바로 치료 시작할 거야.”
레바이는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는 내 말을 듣고 몹시도 미심쩍은 표정이었다.
“재료가 어디서 솟아났다는 겁니까……?”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섣불리 묻지는 못했다.
웨일을 슬쩍 데려가 뭔갈 묻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레바이가 웨일에게 어깨동무한 모습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다가온 둘째에게 물었다.
“가주는 어디 갔어?”
“내가 옆방에 던져 놨는데?”
“셋째가 안 보이는데, 설마 감시로 붙여 뒀어?”
“어.”
“순순히 갔다고?”
“아니, 던져 버렸는데.”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
“넌 나중에 셋째한테 칼 맞아도 할 말이 없겠어.”
“새삼스럽게.”
나는 힘에 밀려 졸지에 또 감시역이 된 셋째 놈에게 잠시 애도를 표하고는 소파 근처로 다가갔다.
레바이와 웨일 또한 짧은 대화가 끝난 것인지. 레바이는 몹시도 묘한 표정이었다.
웨일이 뭐라고 했길래.
“시작할게.”
곧 웨일이 기도하듯이 손을 모아 쥐었다. 이제까지는 전혀 하지 않던 동작이었다.
곧이어 웨일에게서 폭발적인 빛이 쏟아졌다. 이 또한 지금까지는 없던,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마치 바닷속을 통째로 옮겨 둔 듯한 거대한 바다가 이 방 가득 펼쳐진다.
투스를 치료할 때처럼 느긋하게 보진 못했다. 바다에 내가 그토록 좋아하는 거대한 흰수염고래가 둥실 떠 있었음에도.
나는 아빠만을 응시했다.
‘……눈을 뜨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을 하며 간절히 응시하고 있는데, 손목에서 미약한 체온이 느껴졌다.
조금 서늘한 체온이었다.
돌아보니, 에키온이었다. 금색 눈동자가 나를 빤히 응시했다.
“칼립소.”
“응?”
정신없는 와중에도 에키온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나 스스로도 신기한 기분이었다.
“머리끈, 어디 갔어?”
서늘한 손이 손목을 살포시 훑다가 살며시 잡았다.
왜일까.
순간이지만 손목을 줄로 꽉 묶인 기분이었다.
아니, 거대한 발톱이 달린 발이 나를 붙잡은 기분.
“머리, 풀어졌어.”
이리 말하는 에키온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기도하며 눈 감은 웨일을 향해 있었다.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