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86화 (186/275)

제186화

나는 빈방으로 넘어왔고, 웨일도 함께 건너왔다.

사실 웨일을 보내면서 레바이가 불안한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상황이 급하다 보니 붙잡지는 않았다.

나는 텅 빈 방을 돌아보다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여기면 괜찮지? 자. 이제 말해 봐.”

“…….”

나는 적나라하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이야기가 뭔데?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야?”

둘만 이야기하자.

상황이 상황임에도 이리 요청할 만큼 아무도 듣지 않길 바랐을 터.

“응. 맞아.”

나는 반은 심각함, 나머지 반은 우려되는 마음으로 웨일의 말을 경청했다.

“있잖아. 네가 말하기 전에 설마 해서 물어보는 건데. 뭐, 네가 희생하면 방법이 있다……. 이런 얘긴 아니겠지?”

모든 콘텐츠를 통틀어서 치료사, 일명 ‘힐러’들에게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어째서인지 이 힐러들에게만 자신의 무언가를 희생해서 더 큰 능력을 발휘하거나 자신의 역량 이상의 치료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

이 법칙에서 우리 흰수염고래 친구도 벗어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맞아.”

나는 흘러나온 대답을 착잡하게 들었다.

‘이 세계는 역시 글러 먹었어.’

뭔 놈의 어린애들 입에서 이리도 쉽사리 희생 운운하는 말이 나온단 말인가?

꿈과 희망 가득한 육아물? 염병이었다.

내 심정도 모르고 웨일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무뚝뚝한 얼굴로 말했다.

“레바이 형은 나한테서 ‘희생’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굉장히 안 좋아해서…….”

“…….”

내 침묵을 왜 굳이 둘만 남아서 이런 이야기를 하냐는 의문으로 받아들였는지.

웨일의 개인사가 흘러나왔다.

“엄마가 남을 돕다가 돌아가셨거든…….”

웨일의 모친은 레바이의 스승이었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칼립소, 시간이 급하니까 나도 얼른 핵심만 말할게.”

“그래, 내가 지금 정말 급하긴 한데, 그렇다고 네가 해 준 얘기를 가볍게 여기는 건 아니야.”

“어?”

“우선 쉽게 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을 텐데 얘기해 줘서 고마워.”

“…….”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웨일이 잠시 망설였다.

사실 자신도 이걸 남한테 정확히 설명해 본 적이 없고, 설명할 자신도 없다고.

양해를 먼저 구했다.

그러고서 흘러나온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이러했다.

“그러니까, 네가 쓰는 치료의 힘은 반드시 요구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만, 너만은 이런 규칙에서 유일하게 예외라고?”

“응.”

웨일이 끄덕였다.

“그리고 정말 주요한 재료가 아니면 힘을 사용하는 내 쪽에서 대가를 지불하고 치료를 시작할 수 있어. 어때?”

나도 웨일의 설명을 전부 이해한 건 아니라 이해한 바만 늘어놓자면.

웨일의 부탁을 들어주고 치료를 해 주는 어떠한 힘 혹은 존재가 있다고 했을 때.

이 힘은 웨일만은 아껴, 웨일 자신의 일에 힘을 쓸 때는 대가를 줄여 준다고.

자신이나 자신의 가족을 치료하거나 하는 일 등 말이다.

여기까지 말한 웨일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토로했다.

“사실 나, 용의 도시에서 돌아온 뒤로 네 몰래 피에르 님을 다시 ‘진단’했어.”

“뭐?”

아빠도 동의했고, 함께 비밀을 공유했단 말에 깜짝 놀랐다.

“일단 피에르 님의 치료에서 주요한 재료는 레바이 형과 네가 이번에 가져온 재료가 맞아. 하지만…… 칼립소, 재료가 늘었어.”

“…….”

“피에르 님, 상태가 더욱 안 좋아졌다는 소리야. 어쩌면 이 기회를 놓치면 이번에야말로 정말 구할 수 없는 재료가 나올지도 몰라.”

그게 의사가 살릴 수 없는 환자를 목도했을 때의 기분. 치료 능력을 가진 웨일 자신이 알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느끼는 방식이라고 했다.

“치료할 수 있는 게 지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고.”

“……그러면서 아빠는 내게 태연하게 굴었다 이거지.”

“어어?”

“아냐. 계속해.”

웨일은 내 눈치를 보면서도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잘 알아들었다.

“그래서 모자란 재료는 네가 대가를 치러서 지금 바로 치료를 시작하겠다?”

“바로 그거지.”

“미안하지만 레바이뿐만 아니야. 나도 희생이란 말 정말 싫어해.”

“칼립소?”

“나는 네가 다치지 않길 바라. 네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알아?”

아빠의 불치병을 치료할 수 있단 것만으로 평생의 은인이다.

웨일의 얼굴이 어째서인지 조금 붉게 물들었다.

“걱정해 줘서 고마운데, 칼립소. 그 대가란 게 목숨을 위협하는 정도는 아니야. 음, 그냥 불편함을 감수하는 정도? 이 정도야.”

“어떤 불편함?”

“가령 수명이 준다거나.”

“기각할게. 못 들은 걸로 해.”

나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그러나 발을 몇 걸음 떼지도 않아 돌아서야 했다.

웨일이 다급하게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손이 퍽 따뜻했다.

“그, 수명 대신 다른 걸 선택할 수도 있어! 이건 평생 시력이 조금 저하되는 정도야. 아! 아니면 손가락 하나를 못 쓴다거나!”

“그걸 말이라고 하냐! 그냥 누워 있고 싶으면 지금 말해. 아주 한 10년을 이 바닥에 누워서 못 일어나게 해 줄 테니까.”

나는 으르릉거리며 웨일의 손을 거칠게 놓았다.

아니, 놓으려 했다.

“하지만 넌 네 아버지를 살리고 싶은 거잖아?”

“…….”

재를 품은 듯 깊은 회색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부모님을 잃는 기분, 나는 알아.”

“…….”

“칼립소, 그리고 우린 고래 중에 수명이 제일 길어.”

무슨 소리냐고 반박하려 했지만 웨일의 어깨 너머로 시계가 보인 순간 무어라 말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0년 정도는 괜찮아. 줄어 봐야,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 거야, 칼립소.”

“…….”

나는 무뚝뚝한 얼굴 위로 떠오른 침착하면서도 어딘가 절박한 표정을 빤히 바라보다 물었다.

“너는, 만약 그 대가를 치러 주는 대신에 뭘 바라는데?”

“음, 그거 말이야. 일단 네가 꼭 내 부탁을 들어줘야 하긴 해.”

“뭐?”

“아까 말한, 내가 치를 대가를 최소한으로 줄이려면 이 치료를 ‘나의 일’로 만들어야 해.”

만에 하나 웨일이 대신 대가를 치른다면 당연히 평생 은혜를 갚아도 모자랐다.

소원 정도야 당연히 들어줄 수 있었다.

“아까 말했지? 내가 쓰는 힘은 내게만은 예외라고.”

“그래서?”

“그리고 이 예외적 규칙은 내 가족을 치료하는 힘까지만 예외로 허용돼.”

“그런데?”

좀처럼 핵심이 잡히지 않는 소리였다. 웨일의 표정으로 묘한 얼굴이 떠올랐다.

“우리 흰수염고래 수인들은, 흰수염고래 수인끼리도 부부의 연을 맺었지만, 그 외로는 어떤 수인과 가장 많이 연을 맺었는지 알아?”

“어?”

“환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미안해. 이런 식으로 말하게 되어서. 하지만 우리가 가족이 되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웨일이 내 손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 따뜻한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손 전체를 휘어 감았다.

웨일의 목 끝에서, 귀 끝에서, 턱에서. 누가 툭 토마토 소스를 실수로 떨어트린 것처럼 새빨간 색이 번졌다.

붙잡힌 손에서 넘어오는 온기가 따뜻하다 못해 뜨거울 지경이었다.

웨일이 손을 파들 떨고 있었다.

곧 나보다 머리 하나에서 하나 반 정도나 훌쩍 큰 소년이 고개를 푹 숙였다.

“내 신부가 되어 줘.”

……단언컨대, 이건 내 모든 삶을 통틀어 가장 풋풋하고 당황스러운 청혼이었다.

* * *

“결혼해 주십시오.”

무려 3회차씩이나 살아오면서 청혼을 안 들어 본 건 아니었다.

물론 아스엘 그 거지발싸개 같은 놈과 한 약혼을 제외한다면 3회차에서 들은 것밖에 없겠지만.

“웬 미친 소리냐.”

그리고 애정결핍이 심했던 혹등고래놈이 이런 헛소리의 대부분을 차지하곤 했다.

“요 앞, 마을 빵집에 부부가 가면 할인을 해 준다고 합니다.”

“네 청혼은 고작 빵값이냐?”

“그렇습니다.”

“이야, 빵 때문에 결혼을? 축하합니다, 가주님!”

“오잉? 헉, 축하합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결혼하신다구요?”

“아, 너 이제 막 들어왔냐? 가주님 드디어 결혼하신대! 부케는 빵이랍신다!”

“안 해! 미친 것들. 저리 안 꺼져?! 너도 헛소리하지 말고 가라? 밀가루로 무덤을 만들어 주기 전에.”

당연하겠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들어준 적도, 그렇다고 받아 준 적도 없었다.

생각해 보면 누구와도 진지하게 이성적 감정을 교류한 적은 없었지.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가주님은 무겁게 말한 진심은, 싫어하실 거잖습니까.”

혹등고래놈의 음침한 듯 묵직한 목소리가 머리를 툭 치고 스쳐 지나갔다.

“가주님,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올 겁니다.”

“시끄러워.”

다시 고개를 들면, 3회차의 기억은 사라지고 울긋불긋해진 소년이 눈앞에 있었다.

웨일은 울긋불긋해진 채로도 무뚝뚝하고 덤덤한 표정이었다.

“웨일, 아무래도 내가 지금 너무 급해서 귀가 고장 났나 본데.”

“고장, 아니야.”

“…….”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생생하게 들린다.

조금 떨림 섞인 목소리가 다시 한번 같은 말을 반복했다.

“내 신부가 되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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