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84화 (184/275)

제184화

이번엔 다른 회차의 삶이 아니었다. 오큘라의 기억에도 있는 일이었다.

“예? 약한 수인들의 가문 목록을 모으란 말입니까?”

멸치는 드물게도 오큘라의 말에 반문했다. 저건 지금으로부터 약 십여 년 전쯤의 일이었다.

피에르의 부인이 딸을 낳았다.

그 해, 오큘라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변덕으로 참모진들을 불러들였다.

“예? 투……표 아니, 후계자를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요?”

한 가지 제도를 만들었다.

몇몇 범고래 방계 가문과 약하지만 특이하거나 대단한 특기를 가진 약한 수인들의 가문.

이들에게 은밀하게 후계 투표권을 준 것이다.

일리아가 칼립소에게 설명한 여덟 가문의 투표권이었다.

모인 이들이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 아직도 선연했다.

“……가주님, 저희에게 이런 역할을 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이기는 합니다만. 어째서 이런…… 기회를 주시는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들 여덟 개의 가문 중 일리아가 용기를 내 정중하게 물었다.

그러나 오큘라는 답할 수 없었다.

왜일까?

자신도 답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생각할수록 눈앞에 어떤 편지 같은 것이 어른거리는 듯했다.

병이라도 걸린 것인가 싶었으나, 오큘라는 끝내 변덕을 부린 결정을 물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들에게 이유를 알려 주지도 않았다.

“……대체 이딴 걸 왜.”

오큘라는 슬슬 깨닫기 시작했다.

아니, 조금 전부터 무언가 눈치를 챘지만, 본능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든 것.

칼립소 아콰시아델은 왜 이곳에서 자신에게 적대감 어린 말투를 뱉었는가.

그리고 왜, 어른스러운 그 모습이 불편함 하나 없이 잘 어울렸던가.

……자신은 왜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렸지?

오큘라가 입술을 꽉 깨무는 사이, 누군가 옆으로 살며시 툭 착지했다.

“넌 모두 기억해.”

푸르른 머리를 가진 소년이었다.

졸린 듯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오큘라를 본 순간 아름다운 소년의 눈에 어두운 빛이 돌았다.

“외면할 수 없어.”

용 공작이었다. 소년은 어깨에 푸르른 빛을 내는 신비로운 뱀을 얹고 있었다.

뱀의 눈이 용 공작의 것처럼 요요하게 빛났다.

* * *

-공작님…….

지금으로부터 십 분 전.

에키온은 투스와 함께한 공간에 둥실 떠 있었다.

-정말, 쓰실 거예요?

용은 시간의 틈에 들어오게 되면 거대한 힘을 손에 넣게 된다.

보통은 이 힘으로 성장을 준비하곤 했다.

용은 일정 시간 이내에 성장하지 못하면 존재가 불안정해지는 약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키온은 이 힘을 성장에 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곳에 쓰고 싶어 했다.

-투스, 이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투스는 에키온의 이야기를 듣고 말리느라 바빴다.

그러나 주인을 말리는 것에 실패하고 말았다. 투스는 한숨을 쉬고 싶은 심정이었다.

얼른 칼립소를 찾으러 가도 부족한 시간에, 에키온은 칼립소가 아닌 오큘라를 이곳에 먼저 불러들였다.

그러고는 시간을 골라 보여 주기까지 했다. 그 의도가 명확했다.

‘칼립소, 아마 원하는 시간에 도착했을 텐데……. 다른 시간으로 날아가기 전에 데리러 가야 하는데…….’

투스가 끙끙댔다.

그 사이 에키온이 오큘라 옆에 내려섰다.

에키온은 감정을 배웠다.

배우면서 알게 된 것이 있었다.

사람은 자기 것임에도 자기 마음을 알지 못하기도 하며, 때론 잘 알면서 스스로를 속이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어리석게도.

그래서 에키온은 행하기로 했다.

“도망, 못 쳐.”

자기 과거를 지켜본 오큘라가 억지로 외면했던 진실을 알려 주기로.

아니, 언젠가의 ‘오큘라’가 느꼈지만 외면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건 보기 좋게 성공했다.

“…….”

용의 차가운 눈동자가 오큘라를 향했다. 오큘라는 머릿속에 마구 떠오르는 가정에 당혹스러웠다.

칼립소의 태도, 유달리도 현실적인 눈앞의 장면들, 그리고…….

진실은 눈앞에 있었다.

“용 공작은 시공간을 다루지.”

“…….”

“여긴 그저 어느 날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진실 앞에서 오큘라는 당혹감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폭탄 터지듯 기억이 샘솟았다.

과거 ‘오큘라’는 손녀의 죽음에서 난생처음 ‘죄책감’을 느꼈다.

고작 그 편지 따위에 마음이 동요한 것을 숨기고 싶었다.

미안함? 후회? 자신이 감히 이따위 감정을?

강한 가주인 자신이 그따위 감정을 느낀 것이 창피했다.

어처구니없었다.

지난 결정을 번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다니.

강하고 사는 동안 모든 결정을 옳은 것으로 만든 자신이.

후회해도 변하지 않을, 아니, 바꿀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 기억해.”

나지막하게 툭 떨어지는 말은 선고였다.

이와 동시에 에키온이 자신을 툭 건드린 순간 오큘라의 머릿속으로는 낯선 기억이 쏟아졌다.

칼립소가 고통을 느낀 기억뿐이었다.

“네 것도, 칼립소의 시간도 기억해.”

차가운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자신의 머리를 주무르는 듯한 기억에 오큘라는 참지 못하고 신음을 뱉었다.

“누구 맘대로, 감히 이 몸에게……!!”

오큘라의 몸에서 거대하고 사나운 물의 힘이 솟았지만.

이곳은 시간의 틈이었다.

흔적 없이 흩어진 힘 사이에서 에키온이 핏줄기를 흘렸다.

“넌, 칼립소한테 말할 수 없어.”

오큘라에게 전생의 기억과 칼립소의 고통스러운 삶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이를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게끔 금제를 건다.

“이해받지 마.”

에키온은 아틀란이 과거를 기억한다는 것만으로 칼립소의 유일무이한 무언가가 되는 장면을 보았다.

칼립소는 가주가 과거를 기억해 내면 결국은 잘해 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만으로도 고요한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그저, 후회하기만을 바랐다.

이러다 정신이 무너져도,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벌이야.”

용은 회귀자를 대신하여 끔찍한 벌을 내렸다.

어차피 현재 오큘라가 가진 모든 것은 칼립소가 빼앗을 테니.

이 벌은 자신이 내려줄 것이다.

칼립소가 칭찬해 줄까?

소년은 무구하게 생각하며 툭 오큘라의 이마를 짚었다.

“잠들면 시간이 반복될 거야.”

칼립소가 괴로워한 모든 시간들은 이제 오큘라의 것이다.

오큘라 아콰시아델은 칼립소와 다르게, 누구에게도 이를 말할 수 없다.

에키온이 세상 아름답게 웃었다.

“죽는 건 안 돼.”

죽어도 칼립소의 손에.

복수는 칼립소의 것이다.

“하…….”

모든 것을 알게 된 오큘라가 하, 웃음을 토해냈다.

공허한 웃음이었다.

“하하, 하하하하.”

빈공간에 범고래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패배라.”

그러나 그녀를 돕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오큘라는 깨달았다.

“그렇다면 너는 가해자를 용서할 것이냐?”

생애 처음으로 마치 자신의 이상적인 자식을 그린 듯 마음에 든 손녀가 세상 그 누구보다 자신을 증오하는 존재였다.

그저 복수 하나만으로 만들어진 극에 자신이 주인공이었다.

이 사실이 자신이 뒤집을 수 없는 과거의 잘못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당신 참 멍청해. 질문이 잘못됐잖아.”

……너는 그렇게 웃었구나.

“용서할 거냐가 아니지. 사과를 해야지. 가해자가.”

완벽하게 절망감을 안겨 주었음을.

에키온의 마지막 선물. 아니, 벌이 도착했다.

눈앞으로 한 장면이 펼쳐졌다.

책상에 구겨진 종이가 펼쳐진다. 1회차의 ‘오큘라’는 칼립소의 편지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여전히 약자는 도태되어 마땅하다는 생각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틀리지도 않았다.

평생, 이 생각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래, 만약 다시 만난다면야.”

부질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이유를 그때는 알지 못했다.

“예외로 쳐 주지.”

예외가 생긴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알지 못한 채.

그녀는 2회차에도 3회차에도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렇게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일을 만들어 버렸다.

오큘라의 허탈한 웃음이 커져 갔다. 마치 미친 사람의 웃음처럼.

* * *

나는 끙끙대며 초원을 왔다 갔다 걸어 다니기 바빴다.

‘아이 씨, 진짜 더럽게 크네?’

이를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이렇게 찾아 헤맸다가는 평생 걸어도 에키온을 찾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아니, 여기 있긴 해?’

에키온의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고.

절대 못 찾을 것 같은 재료를 찾으면 뭐 하나! 내가 돌아가야지 아빠에게 쓸 텐데.

가슴이 초조함으로 꽉 채워졌다.

찰랑 고인 다급함에 넘어질 것만 같았다.

어떡하지?

게다가 이대로 여기서 무한정 시간을 소비하는 것도 문제였다.

아빠가 눈을 감고 있게 둬선 안 됐다.

‘아니면 아까 내 삶을 보여 주다 말고 공간이 막 깨지기도 하던데. 여기도 공간이니까 허공을 마구 때리다 보면 부서지거나 할까?’

엉뚱한 생각마저 하는 순간이었다.

금색이 뒤섞인 푸르른 빛이 내 앞으로 내려앉았다.

저 빛은…….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들었다.

누군가 허공에서 살포시 내려왔다.

“칼립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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