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2화
“됐습니다. 앓느니 죽지. 젠장.”
곧이어 밖으로 나가 버릴 때까지, 레바이는 제대로 빡친 표정이었다. 나는 허허, 어색하게 바라보는 한편.
3회차의 ‘나’는 키득키득 웃기 바빴다.
“놀리는 맛이 있다니까.”
붕대를 둘둘 감은 채 나른하게 웃는 내 모습을 보며 심경이 살짝 복잡해졌다.
‘아무래도 저거, 상어놈들 찾아서 조질 때인 것 같은데.’
육지놈들과 전쟁을 선포하기 직전의 일이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 범고래들과 수중 동물 수인들에겐 한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었다.
바로 수중 동물 수인들 사이에서 악성 종양과 같은 존재인 상어들을 처단하고 그들의 악행을 뿌리 뽑는 일이었다.
그들을 정리하지 않고서 전쟁을 치르는 건 아주 위험했으니까.
상어들은 호시탐탐 수중 동물 수인들의 수장 자리를 노렸다.
이들도 여러 종이 나뉘어 있었지만.
오직 범고래를 죽이기 위해 육지 거북처럼 하나의 단체로 모였다.
마치 지구의 종교 테러단체처럼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모인 뒤,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전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 바이얀 놈이 하던 것처럼 약한 수인들을 괴롭히거나 약탈했고.
이를 통해 획득한 물자를 기반으로 범고래들을 공격했다.
‘오래전 상어들에게 제대로 된 수장이 있을 땐 괜찮더니만. 그 수장이 죽고 다른 놈이 올라서며 완전히 달라졌지?’
아콰시아델이 한창 후계 전쟁으로 바쁠 때 상어들은 저들끼리 연합해 야금야금 세력을 늘렸고.
결국 내가 수장이 된 뒤로 긴 술래잡기를 해야 했다.
단체전으로, 정면으로 붙으면 범고래들이 압도적이었다.
당연히 상어들도 이를 알았다.
그리하여 상어들은 강력한 공격능력과 개개인의 능력이 뛰어난 점을 살려 치고 빠지며 내가 세운 주요 사업들을 망쳤고.
나는 이놈들을 뿌리 뽑겠답시고 쫓다가 무너진 건물에 이렇게 다친 상황일 거다.
‘덕분에 상어들은 거의 초박살 냈던 기억이 있네.’
3회차의 ‘나’는 꽤 상쾌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고는 한 손에 윗옷을 대충 든 채 문을 나섰다.
“가주님!”
“미친, 가주님 꼴이 이게 뭡니까, 괜찮으십니까?”
“아이고, 그러게 조금만 기다리자니까요!”
“오냐오냐, 송사리들아. 좀 조용히 해 봐. 귀 아파.”
‘나’는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수하들에게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래, 이게 내 일상이었지.’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누군가는 나처럼 붕대를 감고 낄낄대고 있었으며, 영광의 상처라며 자신의 상처를 내보인 채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왜 이번 생을 시작할 때는 떠올리지 못했을까.
‘당연하지. 뭐 좋은 끝이었다고 기억해.’
나는 지그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눈을 감아 원한을 가렸다.
“가주님.”
툭툭 대답을 던져 주거나 어깨를 톡 두드리며 가던 ‘내’가 걸음을 멈췄다.
그곳엔 어두운 남색 머리를 가진 남자가 서 있었다.
탄탄한 덩치와 더불어 앞머리가 길어 눈을 살짝 가린 생김새였다.
그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내’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살아 있었네?”
“네…….”
“너 항상 이렇게 치대는 것 좀 고쳐.”
‘나’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다른 수하들에게 했던 것처럼 부담스럽지 않은 손짓이었다.
저놈은 혹등고래 수인.
수하들 중에서 압도적인 전투 능력을 자랑했지만, 유달리 애정결핍이 심했던 놈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을 쭉 훑던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지나간 삶이었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없다고는 할 순 없었다.
무수히 많은 시간 중에 그나마 행복했다고 할 수 있던 때였으니까.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난 지금도 행복하니까.’
기억을 흘려보내는 이 순간이 그리 서럽지도 서운하지도 않았다.
여기 보이는 수하들은 여전히 살아 있을 것이고, 이번엔 그저 개죽음이 되도록 두지 않을 테니까.
“또 보자.”
어차피 이번 생에서도 상어들을 정리하려면 이들이 다시 한번 필요할 테니.
‘우선 내가 가주가 된 뒤에 일이겠지만.’
천천히 눈을 깜빡이는 사이, 애정결핍이 심했던 혹등고래놈을 포함해 하나둘씩 수하들의 모습이 퍼즐 조각처럼 깨지며 사라졌다.
동시에 내가 잡고 있던 문이 스르륵 열렸다.
‘뭐지? 이번엔 열렸잖아?’
일단 여기엔 에키온이 없으니 들어가는 쪽이 맞을 듯했다.
들어가려고 주변을 살펴보는데,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허? 가주는 어디 갔어?”
함께 있던 가주가 어디에도 없었다. 어쩐지 3회차 삶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는데도 아무 말 없다 싶더라니.
그냥 짜증 난 채로 구경이나 하고 있나 했지.
‘어떡한다.’
고민하는 사이 문 너머에서 끊겼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칼립소…….
에키온의 목소리였다.
그럼에도 넘어가는 걸 잠시 망설이는 사이, 문 안쪽에서 흘러나온 빛이 나를 붙잡더니 그대로 끌어당겼다.
“……잠, 깐!”
부지불식간에 인력에 붙잡혀 흡수되었다.
“끄응…….”
내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다시 일어났을 때는 새로운 공간에 서 있었다.
드넓은 초원이었다.
‘뭔 티비에서 보던 아프리카 초원 같은 풍경이네.’
나는 두리번거리며 여긴 어딘가 파악하기 바빴다.
내 지난 생에는 이런 공간에 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엔 내 삶과는 상관없는 곳 아닐까?
에키온의 목소리는 다시 들리지 않았다.
가주가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일단 잠시 미뤄 두고 내가 처한 상황부터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시간의 틈이랬으니, 사실 뭐가 나오더라도 이상하진 않지.’
투스의 말을 되새기자면 반드시 에키온을 만나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두두두두두!
끼리릭! 끼에에엑!
고개를 돌리다 말고 깜짝 놀랐다.
‘뭐야?’
휙 점프해 고공에서 내려다보는 사이 내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무언가가 돌진해 지나갔다.
끼익, 멈춰서 드래프트를……. 아니, 잠깐만.
‘하얀…… 코끼리잖아?’
하얀 코끼리였다. 아빠의 재료 중 하나! 하지만 이제는 멸종된 동물!
이번에 재료를 얻기 위해 조사했다.
오래전에 존재했던 ‘하얀 코끼리’는 일반 코끼리와 다르게 성격이 매우 난폭했다.
보이는 것마다 때려 부수고 다니던 동물이었단다.
나는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거대한 초원이 새삼 다시 보였다.
‘설마 이거, 에키온이 날 여기로 데려다 놓은 건가?’
눈을 깜빡였다.
에키온이 어딘가에 있는 건가 싶어 휙휙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봤지만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일단 무슨 영문인지 몰라도 저 성난 코끼리부터…….
때려잡자!
아무래도 차려 준 밥상 같은데 걷어차진 말아야지.
못 먹어도 고다! 당연히 못 먹을 리는 없지만.
“끙, 미안하게 됐어. 코끼리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콰아앙!
간만에 온 힘을 다한 주먹을 휘둘러 크게 한 방 먹였다.
거대한 몸체를 가진 코끼리가 붕, 하고 허공으로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우직. 줄기가 대단히 굵은 나무를 부러뜨리고서야 멈췄다.
나는 바닥에 선 채 잼잼 하듯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한 방 더 필요한가? 아니, 그렇진 않은 것 같은데.
혀를 빼물고 쓰러진 코끼리를 보자니 이대로 끝인 듯했다.
나는 몸을 더듬다가 짧은 칼날을 꺼냈다. 투스가 종이를 잘라 달래서 가지고 있던 칼이었는데…….
‘상아를 이걸로 자를 수 있으려나?’
별수 있겠나. 해 봐야지.
안 되도 되게 만들면 된다. 암.
그러나 나는 상아를 자르러 가다 말고 발걸음을 멈췄다.
이번엔 나무에서 삑삑 우는 새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새는 하얀 코끼리가 부딪친 나무에 있었던 것인지 코끼리를 향해 삑삑 화를 내고 있었다.
놀랍게도 파랑새였다.
‘……웬 떡이냐?’
꼬리털이 필요했는데!
“……음, 근데 쟤도 한 성깔 한다더니”
제아무리 안 움직인다지만 제 몸보다 수십 배는 큰 코끼리를 미친 듯이 쪼고 있었다.
나는 살금살금 기척을 낮추고 다가가는 쪽을 택했다.
곧이어 날렵하게 뛰어 올라 한 손에 파랑새를 잡는 데 성공했다.
“으윽, 귀야.”
삐이이이이익-! 울어대는 새가 어찌나 시끄럽던지, 고막 공격이 이런 건가 싶었다.
실제로 돌고래들이 사용하는 초음파에 가까운 소리를 내뿜는 새기도 하니.
육체가 강건하지 않으면 필시 고막이 터졌을 터였다.
‘몇백 년 전 수인들은 강인하게 컸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시에 손은 바지런히 움직여 새가 펄럭 다시 날아갈 즈음엔 내 손엔 넉넉하게 뽑힌 꼬리털이 놓여 있었다.
‘드디어……!’
가장 문제가 됐던 재료들을 모았다.
안도감부터 느껴졌다.
이젠 아빠를 살릴 수 있다는 희망감이 차올랐으니까.
문제는.
‘……제대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말이지.’
그 뒤로도 무슨 영문인진 모르겠지만 초원을 돌아다니며 100년쯤 묵은 늪이라거나 마찬가지로 몇백 년은 산 듯한 참나물을 발견한 건 덤이었다.
이곳은 노다지였다.
‘와, 진짜 ‘심봤다’네.’
까다로운 재료들을 챙겼을 무렵 들고 있던 작은 손가방이나 내 손은 한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거대한 초원을 바라보며 막막한 심경을 느꼈다.
‘이젠 어떻게 돌아간담.’
설마 여기 어딘가에 에키온이 있는 걸까?
드넓은 곳에서 소년 하나를 찾으라니.
차라리 회귀 후 가주를 세 번 하는 게 쉽겠다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