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0화
‘시간의 틈이라더니. 별걸 다 보게 됐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눈앞에 펼쳐진 장면을 보았다.
내가 겪어 온 삶이라지만 그리 큰 감흥은 없었다.
트라우마라거나, 상처라기엔.
지긋지긋하게 악몽을 꾼 데다 더는 충격받을 일도 없던 탓이다.
게다가 바로 직전 3회차는 세상이 멸망해서 그렇지, 목표했던 가주 자리도 차지해 본 터라.
새삼 1회차의 ‘나’를 마주한다고 충격받을 일은 없었다.
다만 조금 불쾌하긴 했다.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 작았구나.’
나를 3인칭으로, 객관적으로 볼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할무니! 하, 할무니!”
싸늘하게 무시당한 주제에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쪼르르 가주를 쫓아갔다.
아, 생각난다.
이때의 나는 육아물에 빙의했으니까. 내게도 육아물 주인공과 같은 일이 일어날 거라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말이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지구에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고.
나를 사랑하지 않는 가족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내가 입양아라는 콤플렉스에 괴로워하는 것과 별개로 말이다.
가족이라서.
가족이니까.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할 줄 알았다.
“성가시다. 멸치야, 쟤 데려가서 가둬 놔.”
“……예, 가주님.”
나는 할머니의 옷자락을 죽을힘을 다해 잡은 조그마한 ‘나’를 빤히 보았다.
너는 참 필사적이었구나.
“거, 건물에 있눈 사람이 개롭혀요! 도, 도와주떼여!”
“…….”
“하, 할무니잖아여. 도, 도와주떼요. 뎨발…….”
그렇지. 처음엔 나처럼 예쁜 아기가 웃으며 애교를 부리면 나를 사랑해 줄 줄 알았고.
다음엔 처절하게 울며 빌기라도 하면 도와줄 줄 알았다.
“약한 것은 도태될 뿐이다.”
“…….”
“살아남아, 알아서.”
저벅저벅. 멀어지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느릿하게 하품하며 목뒤를 슬쩍 긁었다.
‘이거 언제까지 봐야 돼? 설마하니 죽을 때까지 봐야 하는 건 아니겠지?’
지루한데.
나는 혹시나 다른 문은 없나 두리번거렸다.
지금 아빠의 일이 한시가 급한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를 꾹 물었다.
다행히 정말 1회차를 끝까지 다 봐야 하는 건 아닌지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엔 열 살이다. 아니, 아홉 살인가?
내가 흑표범 집안에 팔려 가던 날이다.
‘원작대로 이어져서 큰 충격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고.’
1회차의 ‘나’는 울적하고 소심한 낯이었다. 기사들이 다가오는 걸로도 움츠러들었다.
복어 수인 뤼미의 학대에 길들여진 거다.
나는 범고래 기사들 손에 붙잡힌 채, 한 번 더 처절하게 울었다.
“졔발, 여기서 살게만, 사, 살게만 해 주세요!”
“덜떨어졌군. 아직도 발음을 저는 거냐?”
“고, 고칠게여! 고치겠듭니다, 그러니까 제발…….”
커다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 할머니! 할머니! 가주님, 쓸모 있는 사람이 될게여, 그, 그로니까.”
우습게도 학대당하는 주제에 나는 여길 집이라고 여겼다.
조금만, 조금만 더 살게 되면 언젠가는 누군가 나를 사랑해 줄 거라 생각했다.
이 세상에도 지구의 엄마와 아빠 같은 사람이 있을 거라고.
“태워라.”
“가주님, 제발!! 보내지 마세요!”
정말 열심히 빌었던 것 같은데, 기어이 보내 버렸지. 망할 할망구.
이때의 나는 흑표범과 성사된 거래의 상징으로 팔려 간 걸 터다.
아마 아콰시아델은 거래에서 꽤 이득을 봤겠지.
“…….”
왜 말이 없나 싶었는데, 가주는 1회차 장면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시간은 조금 더 흘러 장면이 바뀌었다. 익숙한 흑표범의 저택이었다.
촤아악.
흩뿌려진 물에 그저 덜덜 떨기만 하는 모습이 보였다.
열일곱 살의 나다.
더 움츠러들고, 겁 많고 가녀리며 나약한 내 모습.
‘지금 같으면 저 새끼들 머리털을 다 쥐어뜯어 버릴 텐데.’
머리털만 쥐어뜯을까. 물어뜯어서라도 응징했다.
“키득.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 물이라고.”
“야, 그래도 걸레 빤 물은 심하지 않냐?”
“왜, 쟤들은 더러운 물에 살잖아.”
“아, 하긴.”
남은 물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핥아 먹어 봐. 너희는 이런 거나 먹고살아서.”
“…….”
“비린내 나는 거 아니야?”
쟤네가 누구더라. 아, 흑표범네 셋째놈의 친구들이었을 거다.
“어머나, 영식. 너무 심하시네요.”
“윽…… 하지만 비린내는 참기 힘드네요.”
“아스엘 님은 언제까지 저걸 데리고 있을 생각이신 거죠?”
“하는 수 없잖아요. 릴리 님이 감싸신다고 하니…….”
“쯧쯔, 불쌍한 것들끼리 보듬는 거려나요? 릴리 님을 아끼는 분들만 안타깝게 되었어요.”
누군가는 교양 있는 척 우아하게 위악을 떨었고. 누군가는 직접 손을 썼다.
어느 쪽이든 최악인 건 매한가지지.
나는 덤덤하게 보았다.
‘이거 언제까지 보지? 아마 이후에 곧 죽을 건데.’
새삼 되새기니 빨리 죽긴 했다. 스무 살 즈음에 죽었던가.
“치워라.”
릴리에게 줄 꽃다발을 품에 든 판테리온 공작이 싸늘하게 말한다.
“넌 말 하나 똑바로 못하는 건가?”
아스엘 놈의 낯짝이 보였다. 경멸과 멸시 가득한 시선.
“아버지께서 한 번만 더 릴리에게 피해를 준다면 지하로 내쫓겠다고 하셨다.”
“…….”
“너흰 캄캄한 해저 따위에서나 살던 동물이니 어울릴지도 모르겠군.”
그때였다.
옆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면, 턱이 호두처럼 들어간 채 분노로 떠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새파란 투기와 살기가 느껴졌다. 마치 저 환상에 가까운 아스엘과 판테리온 공작을 찢어 버리고 싶다는 듯이.
나는 심드렁하게 가주를 보았다.
지금 가주는 내가 겪은 일이라서 화를 내는 게 아니다.
그저.
“감히, 범고래에게…….”
‘범고래’가 육지 동물 수인에게, 흑표범에게 이런 취급을 받는 것에 대한 공분을 느끼는 거겠지.
봐라, 흑표범이 나타나고 나서야 분노하는 저 모습을.
우스웠다.
내가 작게 키득 웃자, 무시무시한 시선이 나를 응시했다.
“대체, 이건 뭐지?”
아, 이 질문 언제 하나 싶었다.
“보면 몰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할머니의 표정이 더욱 험악해지자 나는 적선하듯 오만하게 턱을 들어 올렸다.
“용 공작은 시공간을 다루지.”
“…….”
“여긴 그저 어느 날에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야.”
저 할머니에게 회귀자라고 말할 생각 전혀 없다.
‘누구 좋으라고?’
말을 놓기 시작한 나를 경계하고 있을 텐데.
여기서 더 경계심이 커졌다간 돌아가서 괜히 가주가 되는 것만 귀찮아진다.
나는 감정의 동요 없이 무덤덤하게 판단했다.
“실제로 나는 당신의 애정을 받기 위해 저렇게 행동하지도 않았고. 똑똑하기 짝이 없는 손녀였지.”
“…….”
“용의 신부가 되었지만, 돌연 흑표범들에게 팔려 가지도 않았잖아?”
당신은 지금도 눈앞에 펼쳐진 장면 속 저 모습과 다르지 않겠지.
“…….”
“그러니 있었을지도 모를 일인 거겠지. 이건.”
나는 고개를 돌렸다.
“칼립소라고 했나? 귀찮게 굴어서 죽는 거야. 넌.”
원작 남주가 웃는 모습이 보였다. 독을 토해 가며 천천히 쓰러지는 내 모습도.
책 속 악역의 죽음이다. 물론 내가 책 속 악역처럼 굴었던 적은 없던 것 같지만.
“네 약혼자도 알아서 처리하라던데, 너를.”
그리고 아무도 없는 낡은 마차에서 ‘내’가 가물가물 눈을 깜빡였다.
외로운 죽음이었다.
나는 차분하고 평온하게 눈앞의 장면을 평가했다.
“아, 죽었네.”
드디어 1회차가 끝나려는 모양이었다. 지루했다.
이대로 2회차를 보여 주는 건 아니겠지? 귀찮게.
“…….”
고개를 돌리면, 멍하니 나를 보는 가주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싱긋 웃었다.
“뭘 봐?”
애석하게도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회차 죽음 뒤로 공간이 부서지더니 재조립되었다.
새롭게 나타난 곳은, 다시 한번 익숙한 공간이었다.
흑표범 저택.
그나마 다행인 점은, 2회차는 오래 보지 않아도 되었단 점이다.
파상풍으로 죽어 가는 내 모습이 보였다.
‘저땐 차라리 빨리 죽게 해 달라고 신에게 빌었던 것 같은데.’
한 번에 죽는 게 낫겠다 싶을 만큼 아프고 불편했다.
‘그래도 1회차보다는 덜 힘들었지.’
고통스럽게 죽는 내 모습을 보며 무덤덤하게 생각했다.
‘어차피 다음 생이 있다면 차라리 더 빨리 죽는 게 나았어.’
근데 2회차도 그렇고 언제까지 이걸 보여 줄 요량이지?
에키온이 보고 싶었다.
아까 들었던 에키온 목소리도 더는 들리지 않았고 말이다.
“시시한 죽음이네.”
“……이게 현실이 아니란 말이더냐?”
“현실이면 내가 당신 앞에 서 있겠어?”
보통 사람이 그러하듯 가주 또한 회귀를 떠올리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곧이어 작정하고 내 삶을 전부 구경이라도 하라는 듯.
3회차가 펼쳐졌다.
‘아, 그나마 이건 볼만하겠네.’
무심하게 평가하며 눈앞에 펼쳐진 공간을 훑었다.
‘어라?’
……지금까지와는 달랐다.
늘 내 모습을 보여 주었던 것과 다르게 이번엔 풍경을 먼저 보여 주었다.
“……아콰시아델?”
가주와 내가 뻔히 아는 아콰시아델 저택의 풍경이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면.
반파되고, 엉망이 된 모습이었으며. 곳곳에 죽은 자들이 널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