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귓구멍이 꽉 죄이는 느낌이었다. 에키온의 목소리였지만, 에키온의 것이 아닌 듯 느껴졌다.
3회차, 나는 폭주해 세상을 멸망시키던 용 공작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으나.
그가 말했다면 마치 이런 느낌의 목소리일 것만 같았다.
부드럽게 종용하는 목소리였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아는 에키온은, 나를 맹목적으로 바라보던 순진한 소년이었으니까.
“너 누구야?”
시선이 마주쳤다.
에키온의 눈은 여전히 초점이 없었다. 차갑고 섬뜩하고 서늘할 뿐.
폭주의 경계에 서 있단 투스의 말을 이해했다.
에키온이 천천히 고개를 갸웃했다.
“싫어?”
“…….”
“너, 저거 싫어했잖아?”
깨달았다.
가주를 향해 ‘저거’라고 말하는 에키온은…….
“너, 에키온이 아니구나. 그렇지?”
“으응?”
“에키온은 나를 ‘너’라고 부르지 않아.”
그러자 에키온이 빙긋 웃었다. 마치 정답이라는 듯이.
등골이 오싹했다. 잠시 대치하듯 경계 어린 침묵을 유지했다.
그 순간 어깨가 잡아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놀라 고개를 들었을 땐, 뒤에 서 있던 할머니가 온데간데없었다.
“뭐야…….”
털썩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
본능과도 같이 아빠와 아틀란이 있던 곳을 보았다.
“야! 가주님!”
“공녀님!!”
아빠를 둥실 띄운 아틀란과 손을 뻗은 레바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쳐 들렸다.
아빠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동시에 훌쩍 다가온 구멍이 나를 삼켰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칼립소! 공작님 목소리 들어! 쫓아가야 해!
마지막으로 투스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린 것 같았다.
무슨 영문인진 몰라도 저 시간의 틈에 휘말렸단 건 분명했다.
할머니 역시 이미 휘말린 게 분명했고.
‘투스가 분명 이 폭주를 힘을 쓰는 걸로 바꿔야 한댔지?’
단순히 입맞춤으로는 안 됐던 걸까?
한편으로 생각했다.
힘을 쓰는 걸로 바꾼다는 건, 아빠의 재료를 구할 수 있단 소리겠지?
천천히 눈을 떴을 때 낯선 곳에 서 있었다.
새까만 공간이었다.
마지막으로 투스의 목소리를 기억했다.
에키온의 목소리를 들으라는 말.
솔직히 좀 막막했다.
‘우리 용용이…… 눈깔이 아예 돌아 있던데, 나를 부를 수 있긴 해?’
결국 그 시간의 틈인가 뭔가에 나도 휘말린 것 같은데.
살아서 나갈 수나 있는 건가 싶었다.
상황이 촉박했던 터라 설명을 거의 듣지 못했으니 말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미리 물어보고 설명이나 들어 둘걸.’
얼굴을 문지르며 주변을 살폈다.
‘그나저나 여긴 뭐 하는 곳이야?’
“여긴 어디냐.”
이렇게 생각한 순간 마치 내 생각을 알아차린 듯한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돌아보니 할머니가 앉은 채로 머리를 쓸어 올리고 있었다.
저쪽에서도 나를 발견해서 물어본 듯했다.
나는 살짝 찌푸렸다.
‘저 인간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순조롭게 아빠를 위한 재료를 찾으러 떠났을 거고.
위험하게 시간의 틈에 휘말릴 일도 없었을 거였다.
‘트롤이 따로 없네. 젠장.’
나는 자리에서 툭툭 일어났다.
가주의 말을 무시한 채 주변을 꼼꼼히 살폈다.
어두워서 몰랐는데, 어둠이 눈에 좀 익자 대충 보였다.
거대한 복도였다.
‘회랑인가?’
벽에는 액자가 걸려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액자 안쪽엔 아무것도 없었다. 새까만 종이뿐이었다.
‘뭔 공포게임에 나오는 저택 복도 같네.’
어딘가 섬뜩한 느낌이 가득했지만. 귀신이나 유령을 딱히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어 본 인간이 그런 게 두렵겠나.
그리고 여기, 나처럼 이런 것쯤은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성가신 인간이 함께 있었다.
“내 질문을 무시하는 게냐.”
“그래. 무시 중이니까. 말 걸지 마.”
“허?”
내 반말에 기가 막혔는지, 할머니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투스는 내게 분명 힌트를 줬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야.’
투스는 안 된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분명 여기 어딘가에서 아빠 병을 치료할 재료를 구할 수 있으며, 또 에키온을 만나서 돌아갈 방법이 있는 거야.
이런 중요한 일을 하는데, 저 성가시기만 한 할머니 목소리가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조금 뒤 어둠이 완전히 눈에 익었을 때, 나는 문을 발견했다.
‘문이 여러 개…….’
이 복도에는 문이 총 세 개 있었다.
이 문 중에 하나를 열어야 할까?
‘아니면…… 이대로 앉아서 기다려야 할까.’
미아가 됐을 땐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서 구조를 기다리는 게 최고란 말을 들었다.
하지만 하염없이 기다리기엔 아빠가 영 마음에 걸리는 상황.
여기까지 생각하면서 나는 자연스럽게 한 걸음 옆으로 옮겼다.
내가 있던 자리로 할머니의 손이 스쳤다.
“…….”
할머니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 하자는 거냐.”
나야말로 묻고 싶다. 뭐 하자는 거지?
사실 이곳에 함께 휘말려 들어온 순간부터 나는 결정했다.
이 가주에게 잘 보이는 건 그만하겠다고. 그러니 예의 차리는 것은 끝이다.
‘이렇게 되면 돌아가서 많은 길을 돌아가게 되겠지만.’
상관없다. 어렵기는 해도 가주 위를 뺏을 자신이 있었다.
‘모든 건 시간 문제지.’
내가 이 할머니의 인정을 받아 후계자로서 가주 자리를 빼앗는 건 어디까지나 이쪽을 더 치욕적으로 느낄 거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사실 방법이 이것밖에 없겠는가?
나는 사나우면서도 차분하게 읊조렸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갇혔잖아. 당신이 쓸데없이 에키온을 자극해서.”
“……말버릇이 고약해졌구나. 죽고 싶냐?”
“둘 다 죽을지 모를 마당에 태평하게 그런 말이 나와? 멍청한 건 덤인가?”
“…….”
할머니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아빠와 비슷한 저 습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보아하니 용에 대해서 모르지 않는 듯하니. 멍청한 가주님께 한 가지 친절을 베풀어 드리지.”
나도 모르게 3회차의 가주였을 때의 말버릇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긴 당신 때문에 폭주 직전에 다다른 용 공작이 만든 공간이고, 여차하면 나란히 죽을 예정이지. 당신과 나.”
초조하다는 증거기도 했고, 분노가 임계점에 다다랐다는 소리기도 했다.
더는 숨길 생각은 없었다.
한편으로, 투스가 여기서 탈출할 실마리를 주었지만 이를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죽음의 두려움이나 곱씹으라지.
내 얼굴로 차디찬 비웃음이 스쳤다.
“예상이 안 돼?”
표정에서 이젠 숨길 수 없는, 적나라한 적대감이 드러났으리라.
“이대로라면 아콰시아델은 가주와 후계자를 모두 잃을 거란 거야.”
“…….”
나는 툭툭 내 머리를 두드렸다.
어딘가 멍한 할머니의 얼굴을 차게 바라보면서.
“당신의 아콰시아델이 엉망이 되는 꼴 보기 싫으면 얌전히 협조하든가, 이게 싫으면 닥치고 가만히 있기나 해.”
포기하고 적대하니 마음이야 편했다. 억지로 좋아하는 척, 잘 보이는 척 이제 할 필요 없으니.
그 순간이었다.
-칼……립소.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할머니를 차게 쳐다보는 것도 멈추고 고개를 휙 돌렸다.
에키온의 목소리!
투스가 힌트를 준 그대로였다. 에키온의 목소리가 들리면 쫓아가라고 했지?
다시 한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면 복도의 저 문. 세 개의 문 중 하나였다.
내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문.
첫 번째 문이다.
저 뒤에 무엇이 있을진 알 수 없지만…….
-칼립소, 어디…… 있어?
나를 찾는 목소리를 좇아 나섰다. 그러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어딜 봐도 애새끼의 말투와 위압은 아니구나.”
“…….”
“위악을 떨 줄 아는 게. 한두 번 해 본 솜씨도 아니고 말이다.”
할머니가 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고갯짓했다.
“시끄럽고.”
“…….”
“오큘라 아콰시아델.”
나는 달려가 첫 번째 문을 확 열었다.
“살고 싶으면 쫓아오든가.”
문으로 망설임 없이 들어간 순간 뒤에서 따라오는 기척을 느꼈다.
그러나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 뛰어갔다.
* * *
마침내 문 안으로 완전히 들어갔을 때,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문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환한 빛에 눈을 가늘게 뜨던 찰나.
눈을 깜빡인 짧은 순간에 공간이 뒤바뀌었다.
‘뭐지 여긴?’
바깥이었다. 어두운 복도에 있었다 보니, 적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찬찬히 주변을 훑었다.
잎새가 찬란한 여름날, 그리고 하늘에서 내리쬐는 기분 좋은 햇살.
조금 더울 법도 했다.
하지만 내게는 계절도 온도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눈앞의 공간을 영화 보듯 보는 느낌이었다.
나는 이 공간을 파악하고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할무니!”
달려가는 조그마한 어린아이.
아주 어린 소녀는 예쁘장한 얼굴에 새까만 머리카락, 그리고 범고래의 상징인 흰머리가 섞여 있었다.
푸른 눈동자. 범고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순한 저 얼굴은…….
나였다.
“할무니!”
‘내’가 달려가 누군가의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이 공간이 어디인지, 어떤 상황인지 파악했다.
허, 헛숨이 흘러나왔다.
“뭐야.”
어린 여자아이 앞에서 석상처럼 굳건히 선 사람. 차갑게 뇌까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은 아마도 여기에 함께 있을 내 할머니였고.
어린 ‘나’는 움츠러들면서도 애써 활짝 밝게 웃었다.
“할무니, 뎨가 할무니 손뇨예요!”
안아 달라는 듯 펼친 자그마한 손.
나는 차갑게 웃었다.
“뭐라는 거냐. 이 조그만 쓰레기가.”
이건 내가 이 세계에서 당한 최초의 거절.
그리고……. 단 한 순간이라도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던 그 순간.
내 1회차의 삶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