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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177화 (177/275)

제177화

내 질문에 릴리는 잠시 망설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이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럼 우리 아빠를 깨울 수 있을까?”

“그곤, 할 수 있을 것 같아여.”

화색이 돌며 대답한 릴리는 이어서 잠깐 머뭇거렸다.

“……엉니, 제가 졍말 할 수 있을까요?”

“응. 네가 할 수 있다고 느꼈다면. 넌 할 수 있어.”

릴리의 힘은 단순히 치료뿐만 아니라 기력을 주는 것도 가능했다. 원작에서 탈진한 흑표범을 생생하게 만들기도 했으니까.

레바이가 릴리의 말에 이어서 말했다.

“이번에 아콰시아델 창고에서 가져온 재료를 정리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레바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소년을 물끄러미 보았다.

“저는 아무래도 아콰시아델의 저력을 얕잡아 보았던 모양입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이야?”

“아콰시아델 가주님께서 열어 주신 창고에서 실로 수많은 재료를 얻었단 소리입니다.”

레바이가 천천히 손으로 꼽았다. 현재 없는 재료들.

나는 눈을 빛냈다.

“2년은 걸릴 거라며.”

“예, 용의 도시에서 이렇게 얻을 수 있을 줄은 몰랐고. 아콰시아델의 창고에도 이렇게 방대한 약재가 있을 줄은 몰랐으니까요.”

할머니가 그렇게 많은 약재를 가지고 있었다고? 순간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럴 때가 아니었다.

“현재 구하지 못하는 재료 빼고는 얼추 완성이 될 것 같은데, 한번 해 보시겠습니까?”

“구하지 못하는 재료는 역시 그거지? 멸종한 동물.”

레바이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아니 정확히는 두 소년을 향했다.

에키온과 투스.

“에키온, 미안한데…… 아까 말했던 거, 오늘 당장 가능하겠어?”

의원의 말로는 아빠는 쓰러진 순간부터 막대한 힘을 소모한다고 했다.

그러니 시간을 끌어 봐야 아빠의 생명에 좋지 않다는 것.

‘누구 맘대로 죽어.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못 죽어.’

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후, 하고 숨을 내쉬었다.

“칼립소, 원하면. 다 할 수 있어.”

“칼립소! 용 공작님 그거 몰라!”

“내가 같이 갈게.”

“네?”

레바이가 놀라 반문했다.

“결국 에키온이 지금 필요한 희귀 동물을 못 봐서 문제라는 거잖아? 나는 봤어. 내가 같이 가면 되지?”

“외람되지만 공녀님, 이미 멸종된 동물을 언제 봤다는 겁니까?”

“박제를 봤어.”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흑표범 저택에서 본 것이었으니까.

그 집 셋째 취미가 박제를 모으는 거였다.

물론 재료는 진짜 동물이 아니라 생긴 것만 정교하게 만든 가짜라서 그 박제를 떼 오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에키온, 지금 바로 해도 괜찮겠어?”

“응. 지금 바로 해도 괜찮아.”

“응. 너는 내가 바라는 시간을 보여 준 적 있지? 그때처럼 이마를 맞대면 돼?”

그러자 투스가 고개를 갸웃하는 것 같았다.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아니.”

에키온이 고개를 저었다.

“칼립소 입, 맞춰야 돼.”

투스가 화들짝 놀라며 에키온을 응시했다. 왜 저러지?

“그래야, 힘, 나.”

“그렇구나.”

나는 에키온에게 성큼 다가갔다.

“너만 괜찮으면 지금 당장 하자. 어디에 하면 돼?”

투스가 무어라 하려다가 곧 입을 꾹 다물었다. 에키온이 쳐다본 것 같았지만 상황이 급했으므로 일단 넘겼다.

“잠깐, 잠깐만요. 공녀님!”

아틀란도 아게노르도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레바이는 여기서 브레이크를 걸 만한 사람은 자신밖에 없다고 여긴 것 같았다.

“지금 너무 성급하신 것 같습니다. 일단은 상황을 좀 더 두고 보신 뒤에 하시더라도…….”

“레바이. 아빠가 쓰러졌는데 내가 제정신이겠어?”

“…….”

내가 차분하게 광기에 가까운 무언가를 보이자, 레바이도 입을 꾹 다물었다.

웨일이 레바이와 나를 번갈아 보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꼭, 입을 맞춰야 하는 거야?”

내가 쳐다보자 웨일은 창백한 얼굴로 움찔하더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다.

약간의 실랑이 끝에 준비가 끝났다. 아틀란과 아게노르가 돌아오면 설명은 레바이가 맡기로 했다.

“……어려운 일만 맡기고 가시는군요.”

나는 작게 웃었다.

“얼른 돌아올게.”

에키온의 힘을 빌려 지구에 있는 엄마를 만났을 적을 떠올리면,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였다.

마차 안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었으니까.

“그럼 잘 부탁해, 책사님.”

나는 에키온의 손을 잡았다.

“에키온, 그럼 어디에 입 맞추면 돼?”

에키온이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았다. 뭘까. 왜 고민하는 기색이지?

“……뺨.”

“아하.”

투스는 어느새 아기 뱀의 모습으로 에키온의 어깨에 앉아 있었다.

어쩐지 투스가 내 눈치를 열심히 보는 느낌이었지만 조금 전처럼 끝내 무어라 말을 하진 않았다.

“칼립소! 집중 많이 해야 돼! 용 공작님 힘 불안정해. 투스 있어도 불안정하니까. 폭주 조심해야 돼!”

“응, 알았어.”

확실히 투스가 옆에 있으니, 설명을 들을 수 있어 좋았다.

게다가 에키온의 힘을 더 파악할 수 있었고.

내가 막 고개 숙여 에키온에게 다가가자, 에키온의 얼굴로 처음 보는 표정이 어렸다.

음? 긴장?

나 지금 에키온의 긴장한 표정을 처음 보는 건가?

신기해하며 입술을 가져다 대는 순간이었다.

벌컥!

문이 거칠게 열렸다.

“공녀님!”

나는 그대로 입을 맞추려다 말고 멈칫했다. 라일라였다.

그것도 새하얗게 질린 라일라의 모습.

이상했다.

조금 전 아빠가 쓰러질 때조차 침착함을 유지했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 중에 가장 새하얗게 질린 모습이라니?

불안이 등골을 잠식하는 찰나.

“가주님, 가주님께서 이곳에 오셨습니다!”

폭탄이 쿵! 떨어졌다.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가주? 그 할머니가 왜 이 시간에 여길?

아니, 여길 올 리가 없잖아.

아직 아빠를 옮기러 간 아틀란은 돌아오지 않은 시점이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어디까지 왔는데?”

“물어볼 거 없다. 직접 왔으니.”

등골이 섬뜩해졌다.

라일라도 마찬가지였는지, 충격 어린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문 앞에는 한 손을 주머니에 꽂은 채 오만하게 선 가주가 있었으니까.

어깨엔 제복을 입지 않고 걸친 채로. 늘 보아 오던 모습이었지만.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방임에도 물의 힘에 의해 어깨에 걸친 웃옷이 펄럭 흔들렸다.

나는 허공에 둥실 떠 있는 아빠와 치욕스러운 표정으로 붙잡혀 있는 아틀란을 보았다.

아틀란은 입마저 막힌 건지 사나운 표정이었다.

그가 눈짓으로 보내는 의미를 모두 알아차렸다.

‘들켰다고…….’

낭패 어린 표정이 내게 스쳤다.

‘이런, 이렇게 최악의 상황에…….’

나는 냉정하게 판단했다.

아빠의 상태는 모두 들켰다.

자연스럽게 티 나지 않도록 에키온을 가로막으며 앞으로 나섰다.

“할머니를 뵈어요. 어서 오세요.”

내게서 태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위기 상황에 더욱 의연하고 강해지는 건 내 특징이기도 했다.

“허어, 할 말이 있어 왔거늘.”

할머니가 그런 나를 보며 기가 막히다는 듯 쯧 혀를 찼다.

조소가 어린 듯도 했다.

“끝까지 하자가 넘치는 놈이었구나. 강대한 힘을 가지면 뭐하나. 쓸모없는 것을.”

참자. 참아야 한다.

“어쩐 일이신가요, 할머니?”

할머니가 아빠를 쓸모없는 부품 취급해도, 참아야 했다. 지금은.

할머니가 말할 때마다 아빠의 몸이 잘게 흔들렸다.

뒤로 주먹을 꾹 쥐었다.

“왜, 내가 못 올 데를 왔느냐?”

“…….”

할머니가 픽 웃었다.

“칼립소, 아콰시아델. 그것 아느냐. 너는 내 젊은 시절을 아주 많이 닮았어.”

“…….”

“내가 공손한 척 구는 그 눈에서 불경한 반항기 하나 눈치 못 챌 것 같으냐?”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웃어 보였다.

“으응? 무슨 소릴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이런 모습마저 좋아하신 것 아니셨나요?”

“그래, 그랬지.”

할머니가 순순히 끄덕였다. 우리 사이엔 첨예한 긴장이 흘렀다.

할머니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네 뒤에 있는 ‘것’을 본 순간부터 달라졌다만.”

날카로운 선고가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변명할 기회를 주마.”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는 듯. 거대하고 사나운 힘이 이 방에 날뛰기 시작했다.

“대체 왜 내 저택에 용 공작이 있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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