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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176화 (176/275)

제176화

쓰러진 아빠를 보면서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눈앞으로 무수히 많은 죽음이 스쳐 지나간다.

“가십시오! 행복하셔야 합니다, 가주님.”

“젠장, 반드시, 반드시 살아남으세요, 가주님!!”

나의 무운과 행운을 빌어 주며 죽어 간 내 수하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내 탈출만을 빌며 날 대신해서 죽었던 세 오빠.

숨이 막혔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그제야 알았다.

줄곧 느껴 온 내 감이 맞았다는 걸.

아빠의 몸은 정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칼립소 님! 죄송하지만 이때는 함부로 건드시면 안 됩니다!”

어느새 나는 아빠에게 손을 뻗고 있었다. 내 손은 차가운 손에 잡혀 있었다.

라일라가 내 손을 잡은 채 침착하게 말했다.

“이렇게 쓰러지셨을 땐…… 미약하지만 물의 힘이 몸을 보호하면서 적아를 가리지 않으니, 절대 칼립소 님께서 건드시지 말게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라일라를 응시했다. 거울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내게서 타오르는 듯한 분노가 흘러 나가고 있다는 것을.

“……라일라, 당신은 알고 있었어? 아빠가 쓰러질걸?”

라일라는 움찔했다. 내 분기를 온몸으로 고스란히 받아 파들파들 떨면서도 꿋꿋하게 말했다.

“아뇨, 저도 처음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될 걸 먼저 아셨는지 이번에 절 불러 모든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아빠는 지난주부터 라일라를 불러 조금씩 알려 주었다고.

그제야 나는 아빠가 그간 보이지 않았던 이유를 알았다.

바쁜 게 아니었다.

‘쓰러질 때를 대비하고 있던 거였어.’

현재 내 세력 관련 일들은 내가 성인이 아니란 이유로 아빠가 전면에 나서서 해결하고 있었다.

언더커버. 아빠와 내가 모두 동의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아빠가 자리를 비우더라도 이전처럼 그저 바쁜 일이 있겠거니 생각했다.

대신에 언제든 돌아오면 불러 둔 의원을 데려와 꼭 진료받게 하자고.

그렇게 결심했는데…….

그녀를 보면서 분노하고 당황한 동시에 한편으로 깨달았다.

“…….”

당신은 이렇게 쓰러진 적이 처음이 아니었으며.

이 외딴 저택은,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라는 것을.

고작 이 하나를 숨기기 위해 오랫동안 외롭게 사는 것을 택했다는 사실을.

라일라가 입을 꾹 깨물었다.

“피에르 님께서는 가장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칼립소 님께서 알지 못하시길 바라셨습니다.”

“…….”

“칼립소 님께서 마음 아파하실 것 같다고…….”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쩜.”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내 옆에는, 늘 이런 머저리 같은 인간들만 모일까?”

날 위해 희생했던 수하들.

나를 위해 죽어 간 오빠들이 똑같이 말했다.

너는 내 죽음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쓰러지는 걸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지 같은 소리다.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아빠가 뭐라고 했지?”

화만 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나는 미간을 꾹꾹 누르며 냉철하게 속을 가라앉혔다.

“……쓰러지는 건 처음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건 나도 방금 들었어. 그리고?”

라일라가 진땀을 흘리며 찬찬히 말했다. 정보 공유였다.

아빠가 이렇게 한번 쓰러지면 평균 3일에서 열흘 정도는 정신을 잃는다는 것.

그 사이에 아빠의 몸을 지키는 물의 힘이 몸을 휘감고 있으니 절대 직접 손을 대지 말 것.

사람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힘이라고 했다.

“물의 힘으로 옮기는 것은 가능하다고…….”

이어서 열이 심하게 끓어도 놀라지 말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피에르 님께서는 본인이 이끄는 모든 인원에게 직접 찾아가 명령하셨습니다.”

“…….”

“자신이 없을 땐 칼립소 님의 명을 따르라고.”

나는 입술을 비틀었다.

“……누가 그딴 게 필요하다고 했나.”

그다지 쓸모없는 정보뿐이었다. 쓰러진 경우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떡하면 아빠가 눈을 뜨는지 알려 줘야 할 거 아니야!

한편으로 알았다. 본인도 모르기 때문에 알리지 않았다는 걸.

나는 손등으로 뺨을 꾹꾹 눌렀다.

“라일라……. 당장 아틀란, 아게노르. 레바이. 아니, 모두를 데려와.”

라일라가 서둘러 나간 사이, 누군가 다가와 손을 살며시 잡았다.

에키온이었다.

그 작은 체온이 사실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는 못하겠다.

“……칼립소, 소원, 있어?”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곧 라일라와 함께 아틀란이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이뿐 아니라 함께 들어온 이들도 쓰러진 아빠를 보고 믿지 못하겠다는 눈이었다.

“아틀란 아콰시아델. 너는 지금 밖으로 달려가서 내가 말하는 의원을 데려와.”

“…….”

“무슨 수를 써서든 데려와.”

“……알겠다.”

아틀란은 상황의 심각성을 안듯 평소와 같은 불만도 투덜거림도 없이 얌전히 떠났다.

그날 저녁. 무슨 수를 쓴 건진 몰라도 정말로 의원이 왔다.

여기까지 오는 데 며칠은 걸린다고 하던 자였다. 의원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아빠를 진찰하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보다 쇠약해지셨습니다.”

나는 무표정하게 모든 사실을 들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간 심신에 큰 충격이 있으셨습니까?”

무슨 일이라. 나는 지난 일들을 떠올렸다.

훈련.

용의 도시.

무엇부터 말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물의 힘을 자주 쓰면 쓰러지게 되나?”

“확신할 순 없지만 단순히 쓰는 정도로는 이렇게까지 무리가 오진 않습니다……. 하지만.”

데려온 의원 또한 범고래였다. 그렇기에 범고래를 잘 안다는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만약 커다란 힘을 여러 번 썼다면 치명적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렇게 말하며, 아빠의 병은 불치병인데다 여전히 알려진 게 없어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을 반복했다.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이미 의원이 오기 전, 웨일에게 부탁했다. 다시 한번 진단을 해 달라고.

그리고 나온 결과는…….

“……공녀님, 정말 죄송하지만 재료가…… 늘었습니다.”

아빠가 죽음에 성큼 가까워졌다는 결과였다.

아빠의 상태가 왜 위태로워졌는가?

모든 것이 내 탓이었다.

내 탓일 수밖에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럼 우리 아빠는 이르게 죽어?”

“…….”

의원은 한참 동안이나 말을 하지 못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것 또한 확신할 수는 없으나…… 중요한 건 지금 이 상태에서 눈을 뜨지 못하시면 위험합니다.”

아빠의 병에서 가장 위험한 건 이렇게 의식을 잃은 상태라고.

아빠의 몸을 휘감은 저 힘이 연신 아빠의 기력을 앗아 갈 거라고.

“……날 때부터 매우 강한 힘을 가지셨기 때문에, 지금까지 잘 버티시고 이번에도 버티신 겁니다.”

의원은 이리 말한 뒤에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일단 나가 있겠다는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원이 나간 뒤 나는 아게노르를 응시했다.

“아게노르, 저 의원 가둬 두고 감시해.”

“…….”

아빠가 쓰러졌다는 사실은 여기 있는 이들 말고 그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

라일라 또한 수긍한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나는 괜찮다. 괜찮아야만 한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아빠가 죽은 것도 아니다. 그러니 뭐가 문제겠는가.

그러니까…….

“……저, 있잖아. 여동생님.”

내 앞으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들면, 아게노르였다.

“그, 화내면 안 돼? 때리지도 말고.”

“뭐?”

내가 무어라 반문하기도 전에 폭, 조금 폭신한 듯 딱딱한 게 코에 닿았다.

아게노르는 나를 한번 끌어안고는 떨어졌다.

“으음, 그냥. 꼭 이렇게 한번 해야 할 것 같았어. 그리고 말이야…… 스승님은.”

아게노르가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아버지는 네가 자책하길 절대 바라지 않았을 것 같아. 똑똑한 사람이잖아. 이렇게 될 걸 몰랐을까?”

“…….”

“내가 너를 따르기로 결정했듯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네 수하가 되었듯이.”

“…….”

“아버지의 결정이었을 뿐이야.”

아게노르는 그렇게 말하고는 명령을 따르겠다며 방을 나갔다.

잠시 멍하게 있는 사이에 다시 한번 몸이 끌어당겨졌다.

하아, 위에서 거친 한숨 소리가 들렸다. 한심해하는 소리 같기도 했다.

“야, 이번엔 저 멍청한 셋째놈 말이 맞다. 아버지가 네가 땅 파고 있는 걸 좋아하겠냐?”

이번엔 아틀란이었다.

“네가 해야 할 일은 해결하는 일이야. 그렇게 울지도 못한 얼굴을 하는 게 아니라, 가주님.”

뒤로 갈수록 내게만 들릴 듯 작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말할까 말까 망설였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놈이 있는데 하나 불러 둘게. 상관없지?”

내가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아틀란은 내 어깨를 꾹 껴안고는 떨어졌다.

나는 피식 웃었다.

“이전엔 오빠 노릇도 안 하던 인간들이…….”

우습지도 않았다. 하지만 도움이 되긴 했다.

아틀란 말이 맞았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해결이었다.

“아틀란, 물의 힘으로 아빠 얼른 옮겨 줘.”

“그래.”

아틀란의 물이 아빠의 몸을 둥실 들어 올렸다.

다행히 아빠의 힘은 반발하지 않았고, 아틀란은 다녀오겠다며 그대로 아빠를 든 채 복도로 나갔다.

라일라 또한 정리할 것이 있다며 나갔으므로 남은 인원은 몇 되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레바이를 바라보았다.

정확히는 레바이의 품에 안겨 있는 조그마한 여자아이를.

남은 인원은 레바이, 에키온, 안색이 좋지 않은 웨일.

마지막으로 릴리.

어떡해야 할까.

입이 무거웠다. 내가 무어라 하기도 전에 릴리 쪽에서 손을 번쩍 들었다.

“엉니.”

조그맣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릴리가 도아도 돼요……?”

“릴리, 나도 묻고 싶은데.”

레바이가 눈치 빠르게 릴리를 내려 주었다.

“네가 우리 아빠를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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