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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174화 (174/275)

제174화

나는 눈을 내려 속내를 숨겼다.

“하지만 지금은 긴 여행을 다녀와서 피곤하니, 좀 더 생각해 보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흑표범 놈들의 망신을 즐기고 있으라지.

이번 용의 도시행으로 얻을 걸 모두 얻은 참이었다.

이 할망구는 지금 자신이 즐거워하는 일이 그저 내겐 부산물에 불과하다는 걸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다.

“시간을 달라?”

아니나 다를까. 폭군 같은 가주는 자신의 호의가 바로 받아들여지지 않자 인상부터 찡그렸다.

그러나 기분이 매우 좋았는지 순순히 넘어갔다.

“좋다, 한번 생각해 보도록.”

할머니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다시 한번 인사를 올렸다.

돌아가서 할 일이 남아 있으므로 오늘은 알현을 짧게 끝낼 생각이었다.

“용의 도시에서 넘어오는 이야기들이 꽤나 재미나고 놀랍던데 말이지. 아주 흥미로워.”

“감사해요.”

“모든 게 네 작품이더냐?”

피에르, 내 아빠가 지휘한 건 아니냐고 묻는 듯한 눈이었다.

나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아빠는 제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 들어주세요, 할머니.”

“…….”

“하지만 아빠는 원하는 게 거의 없는 사람이에요.”

확실히 아빠는 내 부탁이 아니었다면 용의 도시에 가지도, 가서도 그 모든 걸 해 주지도 않았을 터다.

“할머니께서 더 잘 아시겠지만요.”

할머니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과연, 답이 되었는지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흐린 정신으로 할머니 질문에 답변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괜찮으시면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될까요?”

“그래, 피곤하겠지. 여독이 풀리면 다시 오거라.”

가주 또한 나를 오래 붙잡을 생각은 없었는지 내가 돌아가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나 왜인지 막 돌아섰을 때 다시 한번 나를 불렀고, 생각지 못한 말을 했다.

“이 건물로 들어오거라.”

“……네?”

“아직 그 허름한 곳에 사는 걸로 알고 있는데. 거기가 집이냐?”

……뭐래. 내가 태어나자마자 거기로 보내 버린 인간이?

나는 짜증 내는 대신 차분하게 가주를 응시했다.

“네가 들어오면 피에르 그놈도 들어올 테지.”

“아뇨……. 아빠는 거처만은 옮기지 않을 거예요, 할머니. 아빠가 거기 사는 이유를 잘 아시잖아요.”

아빠는 멋대로 떠들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귀찮아했다.

제멋대로 동정하는 인간은 더더욱 성가셔했다. 할머니라고 모르지 않을 터였다.

“쯧, 나약한 놈 같으니. 그럼 너라도 들어오거라.”

“…….”

“어차피 네가 목적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하다가 이내 예쁘게 웃었다.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서로를 마주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딸을 갖고 싶었지.”

“…….”

“나를 닮아 건강한 신체와 강력한 힘을 가진 딸을 말이다.”

그렇겠지. 범고래들은 나이 들고 지혜로운 이이자, 가장 강한 암컷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어 이끄는 모계 중심 사회다.

할머니의 숙원이 그러했을 거란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모든 걸 가진 가주가 끝내 가지지 못한 게 그 ‘딸’이라는 것도.

“그래서 손녀라도 얻을 수 있다면 참으로 좋겠다 생각했건만. 웬걸, 모두 아들자식만 줄줄이 낳던데. 못난 놈들.”

세 아들도 아들만 줄줄이 낳았지.

“그나마 낳아 온 손녀는 날 때부터 하자가 있거나 연약했고.”

간신히 태어난 손녀 리리벨은 하필 아빠와 똑같은 병을 앓고 있었다.

“이제 용의 도시에서 벌인 일이 이 땅 널리 퍼지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다. 이렇게 된 이상 너는 네가 어느 자리에 오를지 잘 알고 있겠지.”

할머니가 툭툭 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입술로 강자의 미소가 어렸다.

“내 자리를 갖고 싶으냐?”

오만한 지배자의 얼굴이었다.

“네, 가지고 싶어요. 할머니.”

당신이 물려주는 건 필요 없어. 이 말을 혀에 살포시 품은 채로.

“듣자 하니, 벨루가를 선두에 두고 내가 은밀하게 풀어놓은 히든 카드를 하나씩 가지고 있다지?”

일리아를 통해서 약한 수인들을 포섭하는 것도 알고 있다는 말이었다.

그럼, 이 정도는 알아야지.

그 정도도 모르면 가주 위를 뺏을 맛이 나겠어?

무력이 대단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할머니는 협조성이 떨어지고 약한 자들을 무시할 뿐 머리가 없는 자는 아니었다.

“그래. 한번 독보적인 후계자가 되어 보거라. 이것 또한 내 재미일 테지.”

나는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숙였다.

“칼립소 아콰시아델.”

할머니가 다시 한번 내 이름을 입에 담자, 짜릿함이 몰려왔다.

나는 무엇을 바랐던가.

지난 생에 당신이 이렇게 불러 주기를 바랐나?

우스움이 잠시 몸을 잠식했다.

‘인정이란 건 약자가 강자에게나 받는 것이니. 이젠 내 쪽에서 사양할 일이지.’

할머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다음엔 후계자로서 이 건물로 들어오거라.”

용의 도시는 내게 수많은 승리를 안겨 주었다.

값비싼 호칭도 함께.

나는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또 한번 고개를 숙였다.

* * *

“뭐야, 그럼 여동생님, 너 이사해?!”

다음 날, 내가 돌아온 걸 이제 알았다며 아게노르가 쏜살같이 아빠의 저택으로 쳐들어왔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니, 이사 안 할 건데?”

그러자 내게 물었던 아게노르는 물론, 주변에서 레바이의 말에 씩씩거리던 아틀란이 매우 놀라 나를 보았다.

가만히 앉아 있던 아빠마저도 조금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어어? 하, 하지만 여동생님. 들어오면 정식 후계자로 대우한다는 소리, 아니야?”

“그렇겠지.”

“그럼 왜?”

“그래, 나도 묻자. 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대가리에 물을 맞은 건 아닌 것 같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다들 엄청 놀란 얼굴들이네. 그렇게 놀랄 일이야?”

내 목소리는 태연했다.

“상관없어. 가주의 말은 곧, 내가 그 건물에 입성하지 않아도 후계자 취급하겠다는 소리니까.”

할머니는 다음 본관에 들어올 땐 후계자로서 들어오는 거라고 했다.

이는 즉.

“지금도 내가 후계자라는 소리지. 일단 가주의 머릿속에선 인정했단 소리야.”

“……과연 그렇군.”

나처럼 할머니를 누구보다 잘 알 아빠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씩 웃으며 아빠 옆에 도도도 달려가 걸터앉았다.

“그리고 본관에 가면 여기 오기 너무 멀어서 귀찮아지잖아? 아빠가 내가 너무 보고 싶어서 울면 어떡해.”

“그것도 그렇군.”

“……응?”

순순히 인정할 줄은 몰라서 잠시 움찔했다. 저런 태연한 얼굴로 받아치다니 말이지.

가끔 변한 아빠의 모습이 놀랍다. 물론 싫진 않고 말이다.

나는 아빠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살풋 찡그렸다.

왜일까, 아빠가 약간 피로해 보인다고 할까.

“아빠, 혹시 어디 아파?”

“전혀.”

내가 잘못 본 걸까. 다시 보니 또 괜찮은 것도 같고.

‘조만간 웨일에게 양해를 구하고 진단을 다시 한번 부탁해 볼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튼.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이동할 생각은 없어.”

“그러다가 후계자로 인정한다는 소릴 철회하면 어떡하려고?”

“하라고 그래.”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나보다 나은 후계가 있을 것 같아?”

“…….”

셋째놈은 수긍한 표정이었다.

“설사 후계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누굴 후계자로 세우든. 상관없어. 결국 가주는 내가 될 거니니까.”

아게노르가 ‘겁나 멋있잖아?’ 하는 조금 위험할 정도로 초롱초롱한 눈으로 쳐다봤다.

환기할 필요성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게다가 여기엔 에키온도 웨일도 이제는 릴리까지 있지.’

귀하고 소중한 건 여기 다 모아 뒀는데 어딜 간단 말인가.

내 집은 여기였다.

그 할머니가 인정하는 그 장소가 아니라.

“레바이, 재료는 잘 정리했어?”

“예, 공녀님. 피에르 님께서 내주신 곳에 잘 숨겨 두었습니다.”

“좋아.”

나는 레바이가 내민 재료 목록을 보았다. 두툼한 목록은 다시 봐도 한숨이 나올 것 같았다.

“일단 여기서 이번에 구하지 못한 1급 희귀 재료들 있잖아.”

“예.”

“그건 이번에 내가 공로 대신 할머니한테 요구할 거야. 같이 가서 받아.”

“예……?”

“뭘 얼떨떨한 표정이야? 진짠지 아닌지. 싱싱한지는 네가 받아야 할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아니라. 저를 누구라고 소개하실 생각이십니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당연히 내 책사, 아니 내 보좌관으로 가는 거지?”

“네?”

내게 이놈 아닌 보좌관이 가당키나 한가.

“뭘 이제 와서 갓 태어난 치어처럼 보는 거야? 내 책사는 너야.”

“……따르는 것도 고민할 기회를 주지 않으시더니, 모르는 사이에 취업까지 끝난 줄은 몰랐군요.”

그 말에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왜냐면, 이놈은 3회차에도 비슷한 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이 취업난 시대에 저도 모르게 취업시켜 주셔서 참 가아암사 합니다?”

레바이는 나를 멍청히 바라보았다. 내가 이렇게 밝게 웃는 걸 처음 보았다는 듯이.

“그래, 이건 이렇게 해결되었다고 치고.”

“잠시만요, 저는 받아들인다고는…….”

“응, 앞으로 잘 부탁해. 내 책사님?”

레바이는 기가 막힌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끝내 거절하진 않았다.

“아마 할머니는 많은 재료를 가지고 있을 거야.”

그리고 내가 달라고 한들, 아빠를 치료하려 그러는가 보다 생각하거나 신경 쓰지 않을 터였다.

왜냐면 처음엔 할머니도 아빠의 병을 치료하려고 열심히였으니까.

불치병으로 밝혀지기 전까지는 말이지.

“문제는, 지금은 구하지 못하는 재료들인데…….”

지난번에 나를 가장 빡치고 분노하게 만들었던.

이제는 세상에서 멸종된 동물들과 식물들 말이다.

‘파랑새의 꼬리털같이.’

“지금 절대 구하지 못하는 재료들은 어찌한다.”

“일단 유명한 수집가들 목록은 한번 구해 보겠습니다. 일부는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아, 좋아.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아빠가 사람은 붙여 줄 거야. 아빠, 괜찮지?”

아빠가 작게 끄덕였다.

기분 탓인지 아빠의 안색이 더 안 좋아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정말 웨일에게 진단을 다시 한번 해 달라고 부탁해 봐야겠어.

아니면, 아빠는 내키지 않아 하겠지만 의원을 부르거나.

‘라일라가 바빠지겠네.’

나는 아빠의 보좌관 격인 그녀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일리아의 도움도 받아야겠어.’

그렇게 우리는 남은 재료를 구하는 데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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