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내 물음에 릴리는 분홍빛 뺨 가득 하얗게 질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가만 보면 내 말을 모두 이해하는 영특한 아이다.
사람을 경계할 줄도 알고, 원작에서도 입양되기 전에 나름 영리하게 살아온 아이였다.
‘그래, 그런데 나를 쉽게 믿었지.’
왜 나는 이 간단한 걸 처음부터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여주인공이기 때문에?’
가만히 생각하는 사이에 릴리를 살피지 못했다.
내가 다시 돌아봤을 땐, 가까스로 그렁그렁한 눈물을 꾹 참고 있는 아기가 보였다.
마치 눈물을 흘리기라도 하면 혼이 날 것처럼 꾸욱 참은 채로.
하얗게 질렸던 뺨은 숨을 참아서 새빨개져 있었다.
“왜 울어.”
내 다정한 목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아이의 커다란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렀다.
어느새 자그마한 손이 내 옷자락을 살짝 쥐고 있었다.
언제라도 내가 뿌리치면 당장이라도 떨어질 수 있을 것같이 연약하게.
“끙…….”
절로 나올 것 같은 신음을 참았다.
‘에키온 생각나서 마음 약해지게…….’
“이리 와.”
나는 릴리를 불러서 놀고 있는 손으로 굵은 눈물을 슥슥 닦아 주었다.
“울지 마.”
끄덕끄덕.
서럽게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릴리가 열심히 끄덕였다.
‘이래서야 닦아 줘도 소용이 없겠는걸.’
팔라야 놈 앞에서 악당이 될 땐 즐거웠는데, 릴리 앞에서 악당이 되는 건 썩 유쾌하진 않다.
“끕….”
나는 나를 꼬옥 붙잡은 릴리의 손을 가리켰다.
“난 어느 용 때문에 이런 거에 약하단 말이야.”
내가 편안하게 웃자, 릴리의 얼굴이 살짝 펴졌다.
아이가 눈치를 보는 모습은 영 보고 싶지 않다.
내가 평생 눈칫밥을 먹으며 살았으니. 다른 아이가 그러는 건 보고 싶지 않달까.
“그래서 내 질문에는 대답해 줄 수 있어?”
아틀란이 보았다면 기가 차단 얼굴로 쳐다봤을 것이다.
내가 이리도 부드럽게 물어보는 일은 잘 없으니까 말이다.
“어, 엉니가 조아요…….”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었다.
나는 실망하는 대신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왜?”
내가 떠올린 건 팔라야 놈이 꽁꽁 묶여 바닥에 쓰러진 모습이었다.
“하나만 알려 주세요. 대체 왜…… 릴리에게 이렇게 해 주는 겁니까?”
사실 오늘 낮 팔라야 놈과 헤어지기 직전, 돌아서는 나를 놈이 잠시 붙잡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물었다. 팔라야는 궁금해 미칠 것 같다는 표정이었다.
나는 팔라야 놈에게 대답해 주지 않았다.
눈을 들어 조그마한 아이를 응시했다.
“엉니는…… 왜 저한테 잘해 뚜세요?”
……아빠가 처음 나를 봤을 때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세 살이 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어떤 사소한 친절은, 누군가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기도 하거든.”
“…….”
“평생 잊히지 않는 위안 말이야.”
나도 한편으론 이렇게 생각한다.
이 애가 잠깐 베푼 고작 그 작은 친절이 뭐라고.
그런데 어쩌겠는가.
나는 회귀자였고.
어떤 기억은 잊고 싶어도 잊지 못한 채 다음 삶을 살아간다.
그게 네 조그만 친절이었을 뿐이다.
“엉니가 조아요. 엉, 엉니는 릴리를 해치지 안을 것 같아써요.”
“…….”
“금색 머리 사람둘처럼…….”
릴리는 내 옷자락을 놓고 자신의 옷을 잡고 파들파들 떨었다.
“하지만 릴리, 팔라야 묶인 것 봤지?”
“…봐, 봐써요.”
“왜 무서워하지 않아?”
“…….”
“우린 너도 그렇게 만들 수 있어. 릴리.”
아무도 믿지 말라는 말은 세 살 아이에게 하기엔 잔인하다.
나는 이 애에게 잔인해져야 할까?
“엉니는 저를 살려 줘짜나요.”
“…….”
“한 번도 아프게 하지 않아써요.”
릴리가 망설이다가 말했다.
팔라야는 좋은 오빠였지만 공작을 막아 주진 못했다고.
릴리의 이야기는 두서없었지만 알아듣기 어렵지는 않았다.
흑표범 저택에 있을 때의 일을 꺼내다가 이야기가 흘러 처음 우리 마차에서 눈을 떴을 때를 이야기했다.
“엉니룰 꿈에서 본 적 이써요.”
“……뭐?”
“엉니, 꿈에서눈 울어써요. 펑펑.”
“…….”
아이의 다정하고 선한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울지 않우면 좋겠어요.”
또박또박 말하고 싶은 의지가 느껴졌다.
나는 가만히 응시하다 느릿하게 끄덕였다.
“그래, 그거면 됐어.”
나는 눈물을 닦아 주며 토닥였다. 곧 펑! 소리와 함께 다시 조그만 아기 다람쥐가 눈앞에 있었다.
“네 오빠가 널 데리러 올 때까진 편하게 있어. 우리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야.”
내 품 빈자리에 쏙 들어와서는 안쪽으로 파고들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아기 다람쥐였다.
나는 가만히 쓰다듬어 주면서 한편으로는 생각에 잠겼다.
‘우는 내 모습.’
그저 꿈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게 지난 회차라면.
‘어째서 지난 삶을 기억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걸까.’
이미 아틀란이 이전 생을 기억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에 잠겼다.
다음 날 다시 마차를 타고, 달리고 달려 이윽고 아콰시아델 땅에 도착할 때까지.
한참을.
* * *
“공녀님, 남은 재료는 어떻게 구하실 생각이십니까?”
“음, 생각해 둔 게 있어.”
아콰시아델 영지에 도착했다.
나는 익숙한 저택을 바라보며 레바이의 질문에 답했다.
곧 있으면 저택에 도착할 것이다.
“웨일, 넌 몸 좀 괜찮아?”
“아, 어. 괜찮아.”
“투스를 치료해 줘서 고마워. 은혜는 내가 꼭 갚을게.”
내가 웃으며 툭 웨일의 어깨를 건드리자, 웨일이 왜인지 무뚝뚝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고 싶어서 한 거야.”
착한 흰수염고래님이다 보니 눈앞의 가엾은 환자를 두고 보지 못한 건가.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지.
“범고래는 원한과 은혜는 확실하게 갚아. 나중에 바라는 거나 미리 정해 둬.”
나는 넉살 좋게 말하고는 창문을 보았다.
우리가 마침내 저택에 도착했을 무렵,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 도시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가 떠난 뒤, 용의 성에서 일어난 봉기는 진압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용의 도시 시민들은 흑표범의 통치를 거부했고 더는 육지 맹수들을 따르지 않았다.
육지 거북 수인은 용 공작이 돌아올 때까지 용의 성 내정은 자신들이 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증거로 용 공작 친필이 적힌 서류를 내밀었다고.
내가 육지 거북 수인에게 준 건 편지뿐이 아니었다.
‘알차게 써먹고 있네. 뭐, 그러라고 준 거지만.’
용 공작의 서명이 담긴 서류까지 등장하자, 민심을 잃은 흑표범들은 더는 억지 주장을 하지 않았다고.
시민들이 지탱하는 도시였으니 그들로서도 더는 어찌할 수 없을 터였다.
도시 사람들이 육지 거북 수인을 지지하는 것도 있었겠지만. 이대로 영지민들을 학살하면 용의 분노를 살까 우려한 거겠지.
이들은 알았을 것이다.
용 공작이 말을 배우고 이지를 깨우쳤다면, 곧 분노를 배워서 자칫 도시를 해쳤을 때 폭주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용의 폭주를 알고 있으니, 섣불리 움직일 순 없는 거겠지.’
여기까지 듣고 나는 비릿한 비웃음을 지었다.
‘우습네.’
용 공작이 시민들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조차 못하게 가둬 두고는.
지혜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판단하자, 이제 와서 태세를 전환하는 모습이라니.
‘비열한 새끼들.’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응징은 내 몫이 아니었다.
용의 도시를 그리 만든 것에 대한 대가는 성장한 에키온이 직접 치를 것이다.
그들은 결국 내게 용 공작이란 어마어마한 편을 만들어 준 거란 사실을 알기나 할까.
“칼립소?”
“칼립소! 표정 무서워!”
나는 눈앞에 있는 똑같은 얼굴을 양손으로 슥슥 쓰다듬었다.
“이렇게 보니 너희 형제 같다. 정말.”
“아니야, 용 공작님, 투스 주인님이야.”
“그래그래. 에키온에게 책 읽어 주던 거 아니었어? 계속해.”
현재 우리는 아빠의 저택으로 무사히 돌아온 참이었다.
이대로 하루쯤 뒤나 빠르면 반나절 뒤에 가주에게 돌아왔다고 보고하러 갈 생각이었다.
“공녀님, 피에르 님. 가주님께서 찾으십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할망구가 생각보다 성격이 급했나 보다.
나는 여정을 푼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가주를 알현해야 했다.
게다가.
“너 홀로 가는 게 좋겠군.”
아빠가 나를 홀로 보낸 탓에 독대가 되었다.
아빠의 뜻은 바로 이해했다.
‘공을 내 몫으로 모두 돌리려는 거야.’
용의 도시에서 벌어진 일은 이미 할머니에게도 닿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주의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할망구의 처음 보는 표정과 마주했다.
“호오, 영웅이 왔구나.”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가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칼립소 아콰시아델.”
조랭이떡, 조약돌, 돌멩이, 돌덩이…….
가주의 입에서 내 이름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를 차분한 얼굴로 응시했다.
“어때요, 제가 만든 일은 마음에 드시나요?”
질문이 던져지자, 할머니의 얼굴로 호쾌한 미소가 어렸다.
“용의 신부 자격부터 박탈해야겠군.”
나를 훑는 눈에는 전에 없던 것이 어려 있었다.
만족감. 흡족함.
“성에 틀어박힌 공작에게 주기엔 아까운 인재지.”
이전 생에서 그나마 후계자 자리에 가장 가까웠던 바이얀을 볼 때엔 없던 것이다.
벨루스를 볼 때마저 없었던 것.
“그 육지놈들, 특히나 거만하기 짝이 없는 흑표범놈들의 얼굴을 직접 보지 못한 게 한이로구나.”
“…….”
“그래, 그 노린내 나는 궁둥짝을 걷어차고 온 공로를 인정하마.”
힘 있는 목소리가 이 집무실을 울렸다. 할머니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 뒤에 나올 말을 짐작했다.
“바라는 것이 있느냐?”
그래, 당신이 이렇게 물을 줄 알았다. 나는 더는 맑게 웃는 대신에 입꼬리를 한쪽만 스윽 올렸다.
“네. 있어요.”
실컷 웃어 두라지.
그리 오래 웃을 수는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