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성이 무너지는 걸 보고 있으려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쿠르릉! 뒤에서는 여전히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아빠, 그러고 보니, 5년 전에 이런 말 안 했어?”
5년 전 아빠와 함께 에키온을 구출하고 대신에 투스가 그 자리에 남던 날.
아빠는 나와 에키온을 처소에 남겨 두고 다시 나가며 이런 말을 했었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 잠시 다녀오겠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에야 돌아왔었지. 무슨 일을 한 거냐고 아무리 물어봐도 알려 주지 않았었다.
“글쎄…… 예상대로라면 2주, 빠르면 일주일 정도겠지만 빠를 일은 없을 것 같군.”
새삼스럽게 그 일이 떠올랐다.
“아빠, 분명 5년 전에 홀로 나갔다가 와서는 이렇게 말했었잖아. 기억 안 나?”
“기억에 없다만.”
나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빤히 보았다.
이제는 아빠가 장난을 치는 얼굴과 아닌 얼굴을 구분할 수 있던 덕에.
“거짓말. 기억하는 표정이잖아.”
기억을 하면서도 시치미를 뚝 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마음도 읽나?”
아빠가 픽 웃었다.
“그래, 기억한다.”
쿠르릉 쾅! 또 한 번 거대한 소리와 함께 성의 다른 한편이 무너졌다.
“네가 성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응?”
뜬금없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5년 전에 했던 일은 그런 종류의 일이다.”
“무슨 말이야?”
아빠가 태연한 어조로 말했다.
자신이 5년 전에 물의 힘으로 몇몇 기둥을 헐겁게 만들어 두었다고.
당시 돌아가면서 무너트릴 생각이었지만. 돌연 생각이 바뀌었다고.
“왜 생각이 바뀌었는데?”
“네가 이곳으로 다시 한번 방문할 것 같으니. 그때까지는 멀쩡하게 두려 했을 뿐이다.”
“…….”
“넌 아콰시아델에서 도망가고 싶었던 게 아닌가? 그럼 그냥 둬야지.”
“…….”
“너와 내가 살 도시의 성이니 말이다.”
다행히 남겨 둔 힘의 흔적이 그대로 있었고, 거북이들의 공격에 더욱 쉽게 무너진 것 같다고 말했다.
나는 아빠의 힘이 무려 5년이 지난 지금도 발휘되는 것에 놀라야 할지.
아니면 당시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음에도 내 마음을 모두 눈치채고 있던 것에 놀라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냥 웃었다.
“이것 참. 나는 계속 아빠 딸로 살아야겠다.”
지나가는 듯한 내 말에 아빠는 나를 빤히 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그것참 행복한 말이군.”
어느새 말버릇마저 비슷해진 우리 모습을 느끼며 잠시간 웃는 시간이 이어졌다.
‘그나저나 거북들이 이 정도로 해 줄 줄은 몰랐는데.’
새삼스레 성을 응시했다.
이전 회차에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용의 도시 수인들은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니 저들의 저력을 잘 몰랐지만.
“시선을 끌어 준 덕분에 탈출하기는 편해졌어.”
모두가 몰려 나간 덕택에 도시 외곽은 텅 비어 있었다. 이 틈을 타 돌아가기 위해 달려가고 있었다.
달려가는 마차의 밖을 보던 아틀란이 감탄을 토해 냈다.
“야, 아주 수월한데?”
“방심하진 말고. 성문을 완전히 나갈 때까진 아직이야.”
우리는 현재 마차 안에 다 같이 타고 있었다.
“칫, 나도 알아.”
제아무리 도시가 비었다지만 마차 두 대를 모는 것보단 하나가 좋다고 판단해 다 같이 탄 형국이었다.
‘이미 새벽에 청어 하녀들과 미사는 빼돌려 뒀고.’
우리 차례였다.
저기 보이는 거대한 성문만 벗어나면 아콰시아델까지 달리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즉, 마지막 장애물이었다.
“쯧. 기사들도 나눴으니, 여기서 누가 붙잡기라도 하면 바로 걸리겠네.”
말이 씨가 되었을까.
우리가 탄 마차는 머지않아 성문에서 멈춰 섰다.
슬쩍 커튼을 들추면, 범고래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성문의 기사들이 보였다.
용의 성 기사들은 대부분 용의 성으로 달려갔지만, 몇몇은 이 관문에 남은 모양이었다.
용의 성 기사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가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아마 용의 신부가 이제 이곳에 남을 테니 필요 없는 인원은 돌아간다는 말에 수긍한 듯했다.
그렇게 범고래 기사가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잠깐, 거기 멈추시오!”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창문 밖으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맹수들이군.’
성문까지 뺄 인력이 있던 건가?
흑표범 가문 기사와 이름 모를 가문의 기사.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돌아보면, 드렉스 얼굴에 긴장이 어려 있었다.
‘싸움은 안 돼.’
우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야 했다.
범고래 기사가 똑같은 설명을 했지만 아무래도 먹히지 않은 건지 흑표범 기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잠시 멈춰서 내려 주십시오.”
밖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에 나는 아빠를 슬쩍 보았다.
하는 수 없다. 여기까지 오면 전투, 아니면 기절뿐이긴 한데.
“아빠, 둘째야. 잠시만 기다려.”
나는 금방이라도 물줄기를 뽑아낼 것 같은 두 사람을 말렸다.
팽팽하게 긴장된 순간, 이번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무슨 일이지?”
얌전히 레바이 품에 안겨 있던 릴리가 고개를 쏙 들었다.
릴리 머리에 달린 귀가 쫑긋쭝긋 움직였다.
“아, 둘째 공자님……!”
“무슨 일이냐고 물었는데.”
“그게, 용의 신부 일행이 떠난다고 하여서 확인을 해 보던 참이었습니다. 혹시 모르니 성문을 꼼꼼히 확인하라는 공작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래? 그건 내가 하지.”
“네? 하지만 공자님께서 어찌 이런 일을…….”
“됐어. 나도 아버지에게 점수 좀 따려 하는 거니까. 언제까지 예쁜 영애들 뒤꽁무니만 쫓을 순 없지? 응? 아, 맞다.”
팔라야는 나른하고도 여유로운 목소리였다.
“아까 저기 북문 쪽에 수상한 놈들이 탈출하려고 기를 쓴다는 소리가 있다던데……. 지금 중앙에선 저 하찮은 놈들 막느라 바쁘다지?”
“저희가 가 보겠습니다.”
곧이어 몰려왔던 기사들이 자리를 뜨는 게 보였다.
잠시 뒤, 문이 열렸다.
팔라야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하더니, 이내 릴리를 보고서 표정이 변했다.
‘허, 저놈 보게?’
마치 생크림처럼 녹아내린 얼굴이었다.
릴리도 반가운 얼굴로 소리를 내려다 레바이 손에 저지당했다.
“……이상 없군. 출발시켜.”
“예.”
“하지만 물고기 놈들이니 끝까지 안심할 순 없단 말이지. 성벽 밖까지 내가 감시한다.”
곧 문이 닫히고 우리가 탄 마차가 성문을 통과했다.
옆으로는 말을 탄 팔라야를 대동한 채였다.
얼마나 움직였을까.
똑똑. 노트와 함께 문이 다시 열렸다.
“내리시죠? 갈아탈 차례니까.”
우리가 밖으로 나가자, 번듯한 마차 두 대가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청어 하녀들과 미사가 반가운 얼굴로 쪼르르 달려왔다.
나는 그녀들에게 손을 흔들어 준 뒤, 팔라야를 보았다.
“정말 그대로 했네?”
“맹세까지 했는데, 별수 있습니까?”
분명 존댓말인데 어딘가 모르게 한량 같은 말투였다. 나는 픽 비웃을 뿐이었다.
“약조대로, 인사할 시간은 주실 겁니까?”
“가. 시간은 많이 못 줘.”
말투는 한량인 주제에 얼굴은 초조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멀리서 팔라야와 릴리가 재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여전히 에키온과 투스는 아빠의 힘으로 발을 땅에 대지 않은 채 둥실 떠 있었다.
로브를 푹 뒤집어쓴 채로.
“아빠, 이대로 한 3일쯤 갈 때까진 계속 허공에 띄워 줄 수 있어?”
“아콰시아델까지도 가능하다.”
나는 작게 웃었다.
‘아, 이번 기회로 알게 됐어.’
나도 물의 힘을 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페세움에서 한번 경험해 보니, 더욱 아쉬워졌다.
돌아가면 어떻게든 방법을 알아내야겠는걸.
이전 회차 내게 물의 힘을 알려 주었던 스승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흑표범과 다람쥐의 짧은 작별 인사가 끝났다.
“……반드시 3개월 내로 데리러 갈 겁니다.”
내게 다시 다가온 팔라야는 울었는지 눈가가 빨갰다.
“그러든지.”
나는 성의 없이 대꾸한 채 돌아섰다.
“아, 안전하게 부탁드립니다. 머, 먹는 것도, 못 먹으면 꼭 케이크! 케이크를 함께 주시고요!”
“…….”
“솜이불을 좋아합니다. 기왕이면 거위털 이불을, 아니, 외가에 가서 내가 보내겠습니다!”
“…….”
“혹시라도, 우, 울면 한 번만 안아 주면 좋아할 겁니다…….”
나는 슬쩍 돌아섰다.
“그렇게 애틋하면 3개월이 아니라 더 줄여서 오든지.”
내 차가운 말에 팔라야는 입술을 꽉 깨물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대로 돌아섰다.
‘무슨 영문인진 몰라도…… 이번 회차에서 릴리의 가족은 팔라야 저놈뿐인 것 같네.’
그렇게 우리는 마차에 오른 뒤 출발했다.
무언가 쿵 넘어지는 소리가 저 도시에서 들려왔다.
우리는 치열한 항쟁을 뒤로한 채 다시 아콰시아델로 출발했다.
우리의 고향으로.
푸르른 깃발이 승리의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아니, 우리의 승리를 알리는 신호였다.
* * *
돌아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흑표범 측엔 어차피 용 공작이 사라진 마당에 우리가 있을 이유가 없다고 해 두고 돌아가는 걸로 할 거야.”
“그렇군.”
“여기에 덧붙여 용의 신부가 아파서 돌아가는 거라고 해 두면 표면상 아무런 문제가 없을 거고.”
아빠가 피식 작게 웃었다.
“내 딸이 어디가 아픈지 걱정이 되는데.”
“……뭐래.”
타닥타닥. 타오르는 모닥불을 앞에 두고 있었다.
저녁이 되어 적당한 곳에서 야영 중이었다.
나는 통나무에 얌전히 앉아 있었고, 그런 내 양 허벅지에는 두 소년이 나란히 색색 잠들어 있었다.
한쪽은 투스고 다른 한쪽은 에키온이었다. 나는 똑같이 생겼지만 덩치가 미묘하게 다른 소년들을 보며 작게 웃었다.
‘인형 같네, 정말.’
형제 같았다.
에키온의 부드러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동안, 아빠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내려다보았다.
“호수에 던져도 되나?”
“……안 돼.”
곧이어 범고래 기사가 아빠를 찾았고 아빠는 에키온을 차갑게 보면서 자리를 비웠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가만히 모닥불을 바라보고 있는데, 자그마한 기척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면, 자그마한 다람쥐가 있었다. 마침 돌아가는 시간이었는지.
펑, 소리와 함께 내 눈앞에 조그마한 아이가 되었다.
릴리는 어쩐지 나와 눈을 좀처럼 마주하지 못하다가 고개를 살며시 들었다.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이유를 묻는 대신에 가만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침 잘 왔어, 릴리.”
릴리가 이렇게 구는 건 팔라야와 만난 뒤부터였다.
“네게 물어볼 것이 있었거든.”
아이는 어깨를 움찔하면서도 물러나진 않았다. 울상은 지었지만.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되니?”
“……엉니.”
릴리가 천천히 끄덕였다.
나는 지체 없이 말했다.
“넌 왜 나를 따라오는 거야?”
마땅히 물을 타이밍을 잡지 못했을 뿐.
성에서부터 계속 궁금했다.
릴리는 왜 나를 따르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