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1화
“조롱하지 말고 말해. 릴리는 어떻게 된 거지?”
“말이 짧네?”
“……어떻게 된 거죠?”
나는 순순히 말투를 바꾸는 놈을 보다 어깨를 으쓱했다.
“아기 다람쥐는 우리가 보호하고 있어.”
“……뭐? 설마, 이 성에 있는 거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팔라야가 열심히 방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곧 다시 나를 응시해야만 했다. 아빠의 힘이 놈의 턱을 고정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치 조폭물 영화에 나온 나쁜 악당처럼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이야기 안 끝났어. 네가 그 애를 도망가게 했다지?”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겠어? 당사자한테 들었지. 너라면 껌뻑 죽던데.”
사실 나도 의문이었다.
‘릴리는 왜 나를 이렇게까지 따르는 걸까?’
릴리는 다른 사람이라면 몰라도 팔라야는 따르고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조금 전 그런 팔라야를 우리가 구속했는데도 초롱초롱하게 쳐다보는 눈이란.
이건 조금 뒤에 이야기해 보면 알 수 있겠지.
지금 당장은 이놈과 대화가 먼저였다.
“우린 이 애를 오래 데리고 있을 생각 없어.”
솔직하게 토로했다.
“아, 아버지에게 돌려주어선 안 돼!”
나는 팔라야를 물끄러미 보았다.
“왜?”
“릴리를 데리고 있다며, 모두 들었을 거 아니야!”
팔라야는 우리가 릴리한테 모든 것을 들었다고 생각하는지 아주 쉽게 말을 토해 냈다.
“들었다면 알겠지! 황실이, 걔한테 이상한 짓을 자꾸 하니까. 아버진 모르지 않으면서 반대하지 않아. 그 앨 위해서라면서!”
“이유가 뭔데?”
“그걸 나도 모르니까 빼돌린 거야!”
어쩌면 이 모든 말을 하고 싶었던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고작해야 세 살짜리한테 도망가랍시고 짐마차에 태운 너는 뭘 잘했다고?”
“뭐?”
“세 살짜리가 뭘 할 수 있는데?”
결국은 한껏 굶은 채로 우리에게 발견됐다는 말에 팔라야의 낯이 사색이 됐다.
“나, 난 도우려고…….”
“네 판단도 옳진 않았다는 거지.”
제아무리 똑똑한 놈이라 한들 아직 어렸다. 미숙했다.
“가, 같이 보낸 하녀가 분명 잘 지키겠다고 돈을 같이…….”
돈을 쥐여 준 자를 믿다니.
“하지만 아버지에게, 우리 가문에 돌려주는 것만은 안 돼!”
나는 팔라야를 차갑게 응시했다.
“네가 할 일은 하나야. 릴리를 돌려받고 싶으면 안전한 환경을 마련해.”
내가 이놈을 복수 목록에서 잠시 지우는 건 단 하나 때문이다.
“언니 탓이 아닌 거 알아요. 미안해요…….”
“나 때문이야…….”
1회차 삶, 처참하게 망가진 내 삶에서 날 위해 울어주던 사람이 릴리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친 순간은 너무나 짧았다. 그 짧은 동정에 위안을 느낀 순간이 있었다.
나는 동정에 대한 대가를 지금 치르는 것뿐이다.
“내가 어떻게?”
“네 외가. 흑표범이랑 아무런 관계도 아니지? 게다가 황실의 눈 밖에도 났을 테고.”
뱀들은 이 세계에서 조금 특이한 위치에 있었다.
“넌 당장 네 모친에게로 가서 설득해.”
뱀은 물속에서도 땅 위에서도 살 수 있다. 이 탓인지, 육지 수인들은 이들을 어디든 붙어먹을 수 있는 박쥐처럼 여기곤 했다.
팔라야의 모친인 뱀 수인과 흑표범 간의 부부 생활이 파탄 난 것도 이러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뱀들은 또 다른 차별을 받는 대상이었으니까.
뱀의 피를 이은 이놈도 다르지 않았다. 원작에선 나름의 상처가 있었다.
“네 모친이 현재 뱀 가문의 수장이잖아?”
“왜 하필 뱀이야?”
“그럼 릴리를 보낼 곳이 또 어디 있는데? 너 설마하니 연고도 하나 없는 우리에게 계속 맡겨 둘 셈이야?”
“……그럴 생각은 전혀 없어!”
육지 놈 아니랄까 봐 수중 동물 수인을 향한 미약한 거부감이 느껴졌다.
난 픽 웃을 뿐이었다.
“3개월.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시간이야. 준비가 되면 아콰시아델로 와라.”
“…….”
내가 눈짓하자 아빠가 힘을 풀었다. 팔라야를 묶어 둔 물의 힘이 모두 사라졌다.
“네 발로 걸어서 나가.”
팔라야는 일어나 방을 기웃거렸다.
“……릴리는, 잘 있는 거지?”
“우리가 노린내 나는 너희처럼 애나 학대할 것 같아?”
뭐, 나는 그런 학대 속에 살았지만. 여기선 저놈이 알 거 없는 정보다.
내 비웃음에 팔라야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 애랑 인사를 나눌 시간은 줄 수 있어?”
나는 고민하다가 몇 가지를 이놈에게 말했다.
내 말을 듣던 놈은 조금 놀란 눈을 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만 하면, 릴리를 볼 기회를 준다는 거지?”
“그래.”
팔라야가 끄덕인 뒤 아쉬운 눈으로 방을 다시 한번 돌아보며 나갔다.
돌아갈 준비가 모두 끝났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하늘을 보았다.
이야, 돌아가기 참 좋은 날씨네.
* * *
다음 날.
흑표범들은 언제나처럼 용 공작을 찾느라 분주했다.
제아무리 도시를 뒤져도 꼬리조차 보이지 않는 용 공작의 흔적을 보며 초조해졌지만.
그들에게는 믿을 만한 구석이 있었다.
바로 아스엘이 위대한 ‘땅의 힘’으로 용 공작을 찾기 시작했으니까!
이들은 희망으로 넘쳤다. 자신들의 주인이 찾을 거란 생각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아스엘은 홀로 심각했다.
‘어째서 찾을 수가 없는 거지?’
아스엘은 입에서 느껴지는 비릿한 맛을 삼켰다.
입을 훔치고 손등에 묻은 피를 손수건에 닦아 냈다.
용 공작을 찾을 수 없다.
이건 필시 하나를 가리켰다.
용 공작이 이 도시에 없다는 것.
‘페세움에서 정말 도망에 성공했고, 도시를 바로 나갔다고?’
그게 가능한가?
용 공작은 모든 것에 무지했다. 사람과 대화하는 법조차 모르는 이였다.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살아갈 수도 없었고 그렇게 만든 것이 황실과 맹수들이었다.
범고래들이 도왔을 거라 생각해 그들의 행적을 파헤쳤지만.
그들이 성벽을 넘은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섬뜩했다.
아스엘이 이를 꽉 물며 다시 한번 능력을 발동하려 할 때였다.
쿵쿵!
“공작님!”
기사 단장이 아스엘이 있던 곳으로 뛰어 들어왔다.
경우 없이 행동하는 이가 아니니 큰일이 생겼다는 소리였다.
“무슨 일이지?”
“그, 큰일, 큰일 났습니다! 이미 공작님께서도 그곳으로 향하셨습니다!”
아스엘이 더 묻기도 전에 기사 단장이 빠르게 읍소했다.
“용 공작의 예전 가신들과 영주민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 * *
용의 도시 골목은 이곳저곳이 복잡하게 얽힌 곳이었다.
이천 년씩이나 된 도시이기에 도시의 발달보다 사람이 먼저 자리 잡아 개발이 어려웠고.
사람들은 이 복잡한 골목들도 용의 꼬리가 지나간 흔적이라며 좋아했다.
이들은 이토록 용 공작을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었다.
용에서 시작하여 멸망도 용과 함께할 도시.
“보십시오, 여러분! 천 년이 넘도록 용 공작님을 모셨던 우리가 어떤 몰골입니까! 그대로 쫓겨나 용 공작님이 어떤 상황인지, 건강은 하신지 알 수조차 없었습니다!”
안경을 끼고 목이 터져라 외치는 이는 거북 가문에 속한 ‘남생이’ 수인이었다.
사람 선동하는 데엔 타고난 기질이 있던 남생이 수인은 물 만난 고기처럼 활개 쳤다.
“우리 수장님을 모두가 기억할 겁니다. 용 공작님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던 수장님이 지금 어떻습니까. 다리를 잃었습니다!”
“……세상에!”
“그것도 우리 용 공작님의 땅을 무자비하게 밟은 흑표범에 의해서 말입니다!”
남생이 수인을 보호하듯이 선 두 사람. 한쪽은 칼립소를 위협했던 악어거북 수인이었고.
다른 한쪽은 난폭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실력을 가진 늑대거북 수인이었다.
흑표범들은, 황실은 용의 도시를 너무나 우습게 보았다.
역사란 쉽게 쌓이지 않는다.
이는 곧 쉽게 무너지지 않는 성과 다름없었다.
“이것이 진정 보호입니까? 용 공작님을 보호란 명목으로 감금, 납치한 것은 아니고?”
“……이게 무슨 소리야?”
“세상에, 그 우리 도시에 온 맹수들이 사실은 용 공작님을 위협하기 위해 온 거였대요!”
“뭐야? 어느 미친놈이 감히!”
“용 공작님이 어리실 때를 노려서 감금했다나……!”
시민들 사이에 숨어 곳곳에서 정보를 흘리는 이들은 거북이 수인이거나 혹은 그간 육지 거북 가문처럼 끝까지 충정을 지켰단 이유로 쫓겨난 가신 가문 사람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영지민들은 오랫동안 용 공작의 얼굴을 보지 못한 것에 대한 불만과 불안이 가득했다.
무려 8년 넘게 지속되어 온 이 불안에 불씨를 지피는 것은 너무나 쉬웠다.
“모두 항의합시다! 용의 도시가 누구의 것입니까!”
“용 공작님!!”
“그렇습니다. 우리는 용 공작님 아닌 통치를 거부합니다!”
“거부한다! 거부한다!!”
“물러나라!!”
영지민들이 한데 모였다.
사실 이들이 손쉽게 모일 수 있었던 건 얼마 전 있었던 페세움에서의 일 덕분이 컸다.
그 일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모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용의 신부로 온 범고래 소녀가 촛불이 되어 준 셈이었다.
영주민들은 거리로 뛰어나와 수도에서 온 육지 맹수들에게 항의하거나 설명을 요했다.
날 때부터 오만하게 살아온 맹수들이 이러한 하극상을 견딜 수 있을 리 없었고.
“쳤다! 때렸어, 때렸다고!”
“용의 도시 시민을 때려? 무슨 자격으로!”
“용 공작님도 괴롭혔을 거야!”
“나쁜 새끼들!”
결국 참지 못한 맹수가 격해진 시민을 때렸을 때. 이것은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봉기가 되었다.
“모두 다 용의 성으로 갑시다!”
거북들은 이 모든 폭동을 훌륭하게 이끌었다.
“……다들 팔팔하네요.”
자신의 잃은 두 다리를 보여 준 뒤, 뒤로 빠져 모든 것을 지켜보던 거북 가문의 수장은 고개를 돌렸다.
“너도 50년은 살았지 않느냐.”
수장을 보필하던 중년인이 수장을 마주했다.
“그렇죠. 그럼에도 70년 사신 수장님껜 이름도 못 내밀 정도니…… 젊은이 하렵니다.”
그는 수장이 타고 있는 휠체어를 슬쩍 뒤로 물렸다.
“그 소녀가 말한 대로 되었군요.”
중년인이 중얼거렸다.
수장은 가만히 성으로 달려 나가는 시민들을 보았다.
글쎄, 이건 쌓여 있던 가신들과 영지민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뿐이다.
하지만 확실히 범고래 가문은 도화선이 되어 주었다. 그것도 아주 훌륭하게.
수장은 천천히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손에는 자그마한 종이가 들려 있었다. 칼립소가 건네준 용 공작의 편지다.
「거북이.
칼립소가 편지 쓰랬어.
나는 건강해.」
삐뚤삐뚤한 아이의 글씨였다.
「나쁜 건 나를 괴롭힌 놈들이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아주 오랫동안 용 공작을 모신 가문이기에 알았다.
용들은 믿는 자가 아니면 언어조차 배우지 않는 이들이다.
믿기 때문에 편지를 쓸 수 있고 말을 할 수 있는 아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용 공작의 편이라는 훌륭한 증거였다.
「고마워.
내 편 들어줬어.
태어날 때 기억해.」
늙은 수장의 얼굴로 굵은 눈물이 어렸다.
이번 대 용 공작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됐을 때 거북들은 모두 쫓겨났다.
그는 다리를 잃어 가면서까지 용 공작을 지키고자 했다.
“나를 죽여 내 피를 뿌려라! 죽어서도 용 공작님을 지킬 테니!”
다리를 잃은 건 한 치의 후회도 없는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의 주군이 알아준 것만으로 그는 어린아이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의 주군은 돌아올 것이다.
훌륭해진 모습으로.
그러니, 남겨진 자들이 할 수 있는 건 주군이 안전한 곳으로 갈 수 있는 길을 뚫는 것뿐이다.
“숨어 있던 놈들도 동원하거라.”
“……예, 가주님.”
황실과 흑표범, 육지 맹수들은 용의 도시를 너무 우습게 생각했다.
이제 그들이 오만의 대가를 치를 때였다.
쿵!
곧이어 수장은 용의 성 한쪽이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용을 위한 방패다.”
방패가 지킬 것은 더는 주인 없는 성이 아니었다.
* * *
나는 무너지는 성을 보며 휘파람을 휙 불었다.
“와우, 스케일 한번 죽이네.”
그러다가 문득 아빠를 향해 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