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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막 범고래 아기님-170화 (170/275)

제170화

내가 성큼성큼 들어서기 무섭게 기다리고 있던 레바이가 알은체를 했고 드렉스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오셨습니까.”

“응. 드렉스. 잘 접촉했네?”

“……피에르 님께서 도와주셔서 수월했습니다.”

“그래?”

아빠는 에키온과 투스, 그리고 릴리까지 신경 쓰느라 바쁠 텐데.

‘그 와중에 드렉스 일까지 나서 줬단 말이야?’

덕분에 일이 쉽게 풀린 건 좋은 일이지만. 혹시나 건강에 영향이 갈까 걱정되기도 했다.

아니면 이 정도는 누워서 연어 씹기라 이건가.

‘이래저래 먼치킨 아빠를 두면 이런 점이 편하구나.’

나는 나름대로 납득하고 고개를 주억이며 시선을 돌렸다.

꽁꽁 묶여 있는 소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의외네. 아스엘처럼 노려보거나 죽일 듯이 버둥거릴 줄 알았는데.’

아니면 아빠한테 한 차례 얻어맞았나? 육지 동물 수인들이 수중 동물 수인의 분노를 사는 건 아주 쉬웠다.

이들은 숨 쉬듯 우리를 혐오했으니까.

요리조리 둘러보았지만 응징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얌전히 있는 흑표범이라니.

“하긴, 원래도 머리를 꽤 쓰는 놈이었지…….”

작게 중얼거리고는 꽁꽁 묶인 꼴을 천천히 응시했다.

팔라야 판테리온.

판테리온 가문의 둘째였다.

짙은 흑발에 검붉은색 눈동자는 제 아비와 같았지만 뱀처럼 동공이 가늘었다.

모친이 뱀 수인이기 때문이다.

좀 더 다가가려는데, 아틀란이 내 어깨를 짚었다.

“야, 야야.”

“왜?”

아틀란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나, 저놈 얼굴 한 대만 때려도 되냐?”

아, 맞다.

얘, 팔라야 저놈과 앙숙이었지?

나는 ‘아서라, 지난 생애 원한을 지금 풀어서 어떡하려고. 쟤는 기억도 못 할 텐데.’ 이런 말을 하는 대신…….

픽 웃었다.

“몇 대 때릴래?”

나도 복수하려는데 아틀란이라고 못할 게 뭐람?

내가 과하게 활짝 웃었던 것인지 나를 보던 아틀란이 움찔했다.

“……아니다, 됐다. 일단 볼일 봐라.”

“왜? 때려. 입만 살아 있으면 됐지?”

“……쟤네들이 듣고 있단 자각은 있는 거지?”

흘끗 보니 둥실둥실 뜬 채로 문 옆에서 빼꼼 고개를 내민 세 존재가 보였다.

순서대로 에키온, 에키온 머리 위에 아기 뱀과 아기 다람쥐가 보인다.

특히나 아기 다람쥐는 눈이 초롱초롱했다.

‘엉니!’

이 단어가 귀에 둥둥 울리는 것 같았다. 나는 끄응 신음을 흘렸다.

팔라야는 묶여 있는 데다 문을 등지고 있는 채라 릴리를 못 본 것 같지만.

‘내가 자기 오빠를 꽁꽁 묶었는데도 왜 저리 보는 거야…….’

내가 손짓하자, 애들이 문 안쪽으로 스르륵 들어갔다. 문이 저절로 닫힌다.

아빠가 물의 힘으로 닫은 것이다.

“아빠, 일단 입만 좀 풀어줘.”

곧 팔라야를 억압하고 있던 힘 중 입 부분만 자유로워졌다.

“캐액, 퉤, 퉤. 뭐야. 이건 소금물?”

“바닷물.”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아빠가 때리진 않아도 조용한 응징으로다가 바닷물을 먹여 준 모양이다.

‘어쨌거나 신경을 긁긴 한 모양이지?’

나는 쪼그려 앉아 소년과 눈을 마주했다.

‘전투에서 매번 대가리로 성가시게 굴던 놈이었지.’

저쪽에서 머리가 꽤나 잘 돌아가는 놈이었다.

흑표범 측 총사령관이었던 판테리온 공작과 부사령관인 아스엘이 조금만 더 저놈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싸움이 더 길어졌을 거란 생각이 들 정도로.

“팔라야 판테리온 맞지?”

나는 싱글 웃었다.

“우리 아빠랑 우리 애들이 조금 거칠게 데려왔네.”

사과인 듯 아닌 듯. 전혀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어투로다가.

“…….”

“너네 형이랑 너네 아빠가 곤란해진 장면은 봤어? 페세움 말이야. 그거 내 작품인데.”

“…….”

“어때, 재밌어?”

“넌…… 누구냐는 말도 진부하겠네.”

“그럼. 내 얘길 들어 볼래? 나는 다음 연극의 주인공을 찾고 있어.”

페세움과 다음 연극.

이 두 단어만으로 다음 사건의 주인공이 자신이라고 여기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하…… 연극의 주인공이라니. 그렇게 안 하더라도 난 항상 주인공으로 살았는데……?”

팔라야가 난감한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여기저기 살펴보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놈은 흑표범 형제 중에 가장 예쁘장했다. 굳이 따지자면 내 첫째 오빠인 벨루스와 비슷한 과다.

예쁘장하고 유려하지만 묘하게도 오뚝하고 반듯한 탓에 소녀 같은 느낌은 들지 않는 인상.

굳이 따지자면 아스엘이 귀공자. 이놈은 한량 같은 상에 가까웠다.

“이야, 너 가까이서 보니까 정말 예쁘다. 범고래 가문에 이런 미소녀가 있는 줄 처음 알았는데?”

게다가 이름난 바람둥이.

“진짜 예쁘네. 혹시 우리, 종족 간의 갈등을 뛰어넘는 커플이 한번 되어 볼래? 아, 물론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 봐도 좋고.”

팔라야가 찡긋 윙크했다.

‘내가 지난 회차에 놈들 저택에 있을 때도 이 모양 이 꼴이더니.’

더 어렸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픽 웃었다.

“아야야, 아야야!”

놈을 얽매고 있던 물의 힘이 꽈악 조여들었다. 꽤 아팠는지 팔라야는 찔끔 눈물까지 흘렸다.

“으아, 난 귀하게 자라서 고, 고통에 약하거든? 누군지 몰라도 이것 좀 다시 약하게 해 줘.”

나는 대답하는 대신 흘끗 아빠를 보았다. 내 시선을 느낀 아빠가 단조롭게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다.”

“…….”

난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도 그런 짓 안 했다네.”

“아픈데!”

“참든가.”

“예쁜 애가 말을 그렇게 하면 안 돼.”

“아니면 그 가증스러운 연기 따위 집어치우든가.”

“…….”

팔라야가 멈칫했다.

곧이어 예쁘장한 얼굴 위로 호기심이 어렸다.

“이상하네. 형 말대로, 우릴 참 잘 아는 것처럼 말하네?”

긴 대화를 할 생각은 없었다. 호기심을 해소해 줄 생각도 없었다.

하잘것없는 대화를 나누기 위해서 데려온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게. 내가 누구에게 들었을까?”

똑똑한 흑표범은 잠시 고민하다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너 뭐야?”

나는 생긋 웃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말했잖아. 네가 내 극본의 새로운 배우가 될 거라고.”

“……범고래들은 다 너처럼 정신이 좀 나가 있어? 예쁘긴 한데, 좀 말하는 게……. 아야야야! 윽!”

“그러는 너는 입조심 좀 하는 게 좋겠네.”

“…….”

“나는 두 번 봐주는 건 안 좋아해.”

“…….”

나는 안다.

이렇게 나사 빠진 것같이 구는 놈이지만.

그나마 흑표범 중에서는 수중 동물 수인을 향한 혐오가 제일 덜한 놈이지만.

릴리에 한정해서는 이놈도 다를 게 없는 놈이었음을.

“릴리. 이 이름을 알지?”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언제 한량처럼 굴었냐는 듯 사나운 표정이 놈의 얼굴에 어렸다.

저도 흑표범이란 사실을 증명하듯 으르릉거리며.

“지금부터 내 말이 협박이 될지, 설명이 될지는 네게 달렸어.”

“뭘, 원하는 건데?”

“이야, 머리가 잘 돌아가니 이야기가 빨라서 좋네?”

“그 애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죽여 버릴 거야. 너.”

“…….”

그래, 이런 놈이었지.

제 약혼녀가 실수로 릴리의 옷을 밟았다고 파혼하던 놈이었다.

내가 릴리의 음식을 빼앗아 먹은 줄 알고 형의 약혼녀였던 내게 길길이 날뛰던 놈이기도 했다.

그 결과 나는 5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윽…….”

내 발이 지그시 놈의 손등을 짓눌렀다.

“아, 실수.”

성의 없는 사과 후에 나는 저놈의 탁한 검붉은 눈을 물끄러미 보았다.

“생각해 보니 내가 왜 흑표범 새끼들에게 조곤조곤한 설명 따위의 선택지를 줬담. 그냥 협박이나 해야지.”

나는 음산하게 웃었다.

“릴리의 행방을 알고 싶으면, 네가 직접 무릎 꿇고 빌어 봐.”

“…….”

“왜? 나처럼 하찮고 비루한 물고기한테는 꿇기 어렵나?”

아빠가 시기적절하게 다리를 묶은 힘을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팔라야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완벽하게 무릎을 꿇었다.

“가족을 구하는데 무릎 따위가 뭐가 비싸다고. 당장 알려 줘. 네 입에서 어떻게 그 애 이름이 나온 거지? 봤어?”

나는 놈을 물끄러미 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이놈은 자기 여동생을 구하기 위해 자존심과 무릎을 내던진 숭고한 영웅 같았고.

나는 비열한 협박이나 일삼는 악당 같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계획대로였으니까.

“알고 싶으면 저는 앞으로 모든 말을 따르겠습니다. 맹세라도 해 봐. 고귀한 흑표범 씨? 그럼 알아? 내가 알려 줄지.”

“말장난은…….”

“페세움을 보고도 말장난이란 얘기가 나오나? 그럼 멍청한 건데.”

“…….”

“왜, 네 눈에 조그마한 여자애가 설마하니 정말 그런 일을 진두지휘했을 것 같아? 이거 어떡하나. 내가 지휘한 게 맞거든.”

“…….”

“넌 죽는 게 무섭지 않아 보이는데. 난 네 목숨 가지고 협박하는 게 아니야.”

이를 북북 갈던 팔라야가 이내 손을 움찔했다.

“뭘 원하는데. 뭘 해야 그 애의 소식을 알려 줄 건데?”

“소식만 알려 줄까. 행방도 궁금하지 않아? 내가 처음 본 건 길가에 버려진 한 다람쥐 아기였는데.”

“……!!”

팔라야의 얼굴로 다급함이 스쳤다. 그리고 머지않아 놈이 맹세를 했다.

“좋아.”

“…….”

“유용한 흑표범 일꾼이 하나 생겼네.”

놈의 눈이 커졌다.

나는 언제 악당처럼 웃었냐는 듯 맑게 웃었다.

여기까지도 생각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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