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69화 (169/275)

제169화

나는 수장의 말을 들으면서도 그의 거대한 덩치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코끼리가 붙은 건 대체로 다 크단 말이지.’

노인이 당황하지 않고 내게 태연하게 대답했듯 나 또한 마찬가지로 태연자약한 낯으로 노인을 응시했다.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목이 꽤 아프겠다 싶었다.

“이번 대 용의 신부이자, 얼마 전 페세움에서 신부로서 이름을 높인 분이시로군요.”

조금 전 나를 안내하던 악어거북 수인과 다르게 수장은 이미 나를 알고 있다.

“저희를 찾아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당신들의 역할이긴 하지. 손님이 오면 총집사가 반겨야 하니까.”

“…….”

노인은 작게 웃었다.

“지나간 영광일 뿐이지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지나갔다고?”

“…….”

“빼앗긴 게 아니고?”

이들이 집에만 처박혀 있지 않았다는 걸 안다.

“……귀하신 분께서는 저희를 도발하러 오신 게 아니실 겁니다.”

노인의 눈은 갈색이었다.

그러나 볕이 비치는 쪽에 앉아 있어 각도에 따라 금갈색으로 보이기도 했다.

에키온과 일순 비슷한 색이면서도 깊디깊은 눈이었다.

“용의 도시 전체를 뒤흔든 거대한 술수를 쓰신 분께서 저희에게 무슨 용건이십니까?”

술수라.

나는 무구한 듯 웃어 보였다.

“이런 이야기에 앞서 마땅한 자리와 예의를 갖추고 싶은데, 내가 시간이 없네. 본론부터 들어가도 되겠어?”

“괜찮습니다. 마침 저희도 꼭 여쭤보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좋아. 피차 본론부터 까자고. 나는 팔짱을 꼈다.

“당신들에게 제의를 하러 왔어.”

거대한 체구의 노인 앞에서 오만하게 선 조그만 아이라.

누군가 봤다면 우습게 보였을지 모르나, 분위기는 한없이 진지했다.

나는 싱긋 웃었다.

“혹시 너희를 이 지경으로 만든 윗대가리 새끼들한테 내가 물 먹이는 것 봤어? 듣자 하니 다 본 것 같은데 기분은 어때?”

“……그게 본론입니까?”

“응.”

노인에게서 처음으로 당황스러운 기색이 느껴졌다.

“내가 했던 그 짓. 당신들의 손으로도 한 번 더 저 육지 짐승들을 물 먹일 수 있는데, 어때?”

노인은 금방 대답하지 않았다.

“하실 말씀은 그것뿐입니까?”

“응, 그런데?”

“그럼 저희 쪽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해.”

노인은 긴긴 생을 괜히 살아온 것이 아니라는 듯 차분하게 대답했다.

“……용 공작님께서는 안전하십니까.”

그러나 모를 것이다.

당신이 얼마나 긴 세월을 살았든 나와 비슷하거나 나보다 못한 세월일 거란 걸.

그렇기에 애써 숨기려 하는 노인의 목소리에서 걱정과 염려를 알아차렸다.

여기서 나는 여러 선택지들 중 하나를 택해야 했다.

좀 더 살살 굴려 속내를 까볼 것이냐.

그대로 직진할 것이냐.

아니면, 도발할 것이냐.

곧이어 내가 태연하게 대답했다.

“땅의 맹세를 할 수 있어?”

사람 보는 눈은 자부한다. 노인의 눈에 보인 걱정.

“목숨을 걸어.”

처음으로 이곳에서 에키온을 걱정하는 사람을 만난 거다.

“지금부터 하는 말 모두 죽을 때까지 함구한다면 알려 주지.”

“하겠습니다.”

물의 맹세와 같은 역할을 하는 땅의 맹세. 나는 이 맹세가 끝나고서야 이 노인에게 고했다.

“용 공작은 우리가 보호하고 있어.”

그 순간 노인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멈칫했다.

곧이어 노인이 쿵,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지더니 힘겹게 무릎을 꿇었다.

다리가 없는 노인이 제대로 된 자세를 하기란 여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노인은 끝내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내게 인사했다.

몹시도 정중하게.

“……모든 가신의 대표로서 도시의 은인을 뵙습니다.”

묘한 기분이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우리 용 공작님을, 놈들의 손아귀에서 꺼내 주셔서…….”

뚝, 뚝. 덩치가 큰 탓일까. 눈물 줄기까지 굵직했다.

지난 생에 내 수하들도 나를 생각할 때 이런 마음이었을까?

수하가 되어 본 적은 없으니 모를 일이다.

‘손수건이 아니라 수건을 내밀어야 할 것 같은데.’

이 순간 떠올리기엔 엉뚱한 생각이란 걸 알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난 위로엔 어설프단 말이야.

한편으로는 고민했다. 아무래도 황실의 일을 알고 있는 눈치인데.

‘어디까지 아는 걸까?’

날카롭게 벼린 감에 집중하면서도 한쪽 가슴에선 묘한 기분이 여전히 감돌았다.

에키온, 나는 네가 그 성에서 따돌려진 외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내 한때의 생각이 틀렸나 봐.

그래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무릎을 꿇어도 나와 눈높이가 거의 맞아떨어지는 노인이었다.

그를 빤히 보다가 문득 툭 물었다. 계산되지 않은 물음이었다.

“만약, 용 공작을 돌려주면 앞으로는 이 도시에서 보호가 가능할까?”

노인의 눈이 일순 흔들렸지만 잠시뿐이었다. 세월이 그저 흔적에 불과하지 않다는 듯.

깊은 눈동자로 돌아와 대답했다.

“아니요. 저희는 지킬 수 없습니다.”

오래전 논쟁을 벌인 적 있다.

강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수하들은 각기 강한 신체, 강한 정신력, 혹은 물의 힘이나 순간이동 같은 대단한 특기를 두고 싸웠다.

내 생각은 이러했다.

“자기가 약하다는 것부터 인정해야지.”

자신이 누구든 이길 수 있으며, 어떤 싸움에서든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자만이고 오만이다.

강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한다.

“너희 육지 거북 수인들이 망하지 않은 이율 알겠네.”

“…….”

“너흰 어둠 속에서 움츠리고 있었던 거지?”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저 패배해 물러난 이들일 뿐입니다.”

“자연에서 거북의 껍질은 그 어떤 고난과 환경도 견뎌 내는 원동력이 되지.”

“…….”

“당신들의 그 거대한 방패를 녹슬지 않게 벼려 왔잖아? 남몰래.”

“어찌 확신하십니까?”

“내가 용 공작을 보호하는 쪽이 안전하다고 여기고 있잖아. 계산한다는 건 당신들이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는 소리지.”

“…….”

노인이 나를 빤히 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지었다.

“……과연. 이 늙은이가 한 가문의 가주와 대화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눈앞의 조그마한 공녀님과 대화를 하는 건지 헷갈리는군요.”

“둘 다 나지.”

“…….”

“아, 곧 가주가 될 테니까. 가까운 미래의 일이라고 해야 하나?”

나는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래서 내 제안은?”

“……저희에게 정확히 무엇을 원하십니까?”

“동화 속에서 거북이는 지혜롭다던데. 아직도 눈치 못 챘어?”

“허허, 그런 동화가 있습니까?”

나는 언제 무릎을 꿇었냐는 듯 얌전히 의자로 돌아가는 노인을 보았다. 홀로 돌아가는 게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용 공작을 안전한 곳으로 데려갈 거야.”

“좋은 생각이군요.”

노인은 내 설명을 한참 듣더니, 천천히 끄덕였다.

“좋습니다. 참여하겠습니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

이번엔 노인이 인자하게 웃을 차례였다.

“용 공작님의 안전을 지켜 주겠다는 맹세를 해 주십시오.”

* * *

에키온이 제대로 살아가려면 다른 곳으로 가야 한다.

육지 거북의 수장은 이런 내 주장을 너무나 쉽게 받아들였다. 마치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양.

이미 8년씩이나 밀려나 보았기에 처절하게 느낀 걸지도 모른다.

육지 맹수들 틈바구니에서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물의 맹세를 하라며 돌려줄 줄이야.’

뭐, 예상 못 했던 건 아니었지만. 조건으로 제의받았을 때는 퍽 유쾌하기도 했다.

“뒤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자신들 외에도 쫓겨났지만 여전히 용 공작을 향한 충성이 대단한 자들을 모으겠다고 했다.

나는 굳게 약속하는 육지 거북을 보며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무엇입니까?”

“용 공작님이 보내는 편지. 나는 전령이기도 해.”

“…….”

노인은 언제 단단한 수장이었냐는 듯 파르르 떠는 손으로 내가 주는 편지를 받았다.

허물어지는 저 얼굴은 내가 볼 표정이 아니라 생각해 밖으로 나왔다.

“잘됐냐?”

“어. 아주 많이.”

우리는 문을 지키던 악어거북 수인의 배웅을 받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러냐?”

“내가 뭐.”

“찝찝해하는 표정이잖아. 너.”

“…….”

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래, 조금은 그래. 내가 세운 계획은 아무래도……. 희생이 없진 않을 테니까.”

“무슨 상관이야.”

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아틀란 놈은 태연자약한 표정이었다.

“그것까지 알고서 받아들인 거 아니냐? 저놈들은.”

“그렇지.”

“그럼 그냥 거기까지만 생각해. 넌 냉정한 주제에 가끔 더럽게 정이 많아질 때가 있어.”

비록 퉁명스러운 어조였지만, 서툰 위로를 건네려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픽 웃었다.

“……그걸 좋은 리더라고 하는 거야, 둘째야.”

나는 이렇게 말하고는 육지 거북 수장의 모습을 툭툭 털어냈다.

나는 계획을 공유했고 에키온의 전언을 전했으니, 이후로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는지는 그들의 몫이었다.

‘게다가 아직 끝난 게 아니니 말이지.’

나는 목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거, 돌아가는 거 한번 더럽게 어렵네.”

아틀란의 투덜거림에 웃었다.

“그럼 돌아가는 건 쉬울 줄 알았냐? 원래 산도 내려가는 게 더 어려운 거야.”

“어른인 척하지 마. 가끔 생각하는 건데, 그 몸으로 완전히 안 어울리는 건 알고 있냐?”

“어, 그래. 여동생이 그렇게 귀여워 보인다니 다행이네.”

“누가!!”

우리가 돌아갈 용의 성이 보였다. 아틀란 놈이 옆에 있는 덕택에 손쉽게 눈에 띄지 않고 방으로 돌아왔다.

‘자, 이제 악의의 피해자들을 만나 선의를 건넸으니.’

다음은 무엇이냐.

나는 방에 꽁꽁 묶여 있는 한 소년을 보고는 싱긋 웃었다.

‘이야, 저 XX 얼굴도 오랜만이네.’

이젠 악독한 악당이 되어 줄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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