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8화
집은 다 쓰러져 가긴 했으나 크기는 제법 크다.
그리고 대대로 용의 가신 중 가장 충성스러웠다는 육지 거북 수인들이 현재 사는 집이기도 했다.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 산다던데, 이들은 어떨까.’
하물며 이들이 쫓겨난 건 벌써 8년 전의 일이다.
‘이 망할 황실과 육지 맹수들은 거의 에키온이 태어날 때부터 용 공작을 손에 넣으려 했단 소리지.’
집을 올려다보던 나는 가만히 하나의 기억을 떠올렸다.
한 시간 전쯤, 나와 아틀란놈이 막 성을 나서기 전에 있던 일이었다.
“얼마든지 조사해 봐.”
육지놈들이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는 모양인지 우리 방을 다시 한번 수색하겠답시고 찾아온 것이다.
이번엔 흑표범의 기사들뿐 아니라 다른 육지 맹수 가문의 기사들도 섞여 있었다.
갑작스럽게 들이닥쳤음에도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방을 내주는 척했다.
다만 놈들이 들어온 순간, 아빠를 비롯해 나와 아틀란이 사정없이 투기를 내보였다.
나는 가장 앞에 선 채로 물었다.
“이 도시에서 용의 신부가 가지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 이제는 알 거라 생각했는데…… 멍청해서 이해가 덜 된 건가?”
“……명령입니다.”
“명령이고 나발이고. 너희 수장 명을 우리가 따를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나는 살벌하게 이를 갈았다.
원한다면 언제든지 싸움을 받아주겠다는 듯 손을 쥐었다가 펴며.
“너흰 이미 우리가 없을 때 방을 수색했다. 처음이야 좋든 싫든 최소한의 도의로 넘어갔지만. 이번엔 안 참아.”
“…….”
“너희의 그 한 걸음이 육지와 수중 수인 간 전쟁의 시작이 될 수 있다는 점만 알아 둬.”
사납게 짓씹자, 말의 무게를 깨달은 이들 중 발을 내딛는 이는 없었다.
나는 쾌감을 느꼈다.
단순히 전쟁이 두려워 발을 디디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페세움에서 우리의 힘을 보았기 때문에 섣불리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다.
이걸로, 우리의 위명은 이후 널리 알려질 게 분명했다.
‘아니, 할망구는 이미 들었으려나?’
그 순간, 나는 흘끗 복도 쪽에 서 있던 범고래 쪽 기사 하나를 보았다가 시선을 돌렸다.
곧이어 육지 맹수 기사들이 들어서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을 비웃으면서.
“살다 보니 제가 이런 광경을 다 보는군요. 육지 맹수 놈들이 물러나다니.”
“헹, 그러냐? 난 본 적 있는데.”
“음? 아틀란 님께선 육지 수인들과 대치해 본 적이 있으셨습니까?”
“……뭐. 있다고 해 두지.”
이 쾌감은 나만 느낀 것이 아닌지, 다들 돌아가면서 통쾌함을 토로했다.
아빠마저도.
“아빠, 뭐 해? 창문은 갑자기 왜 열어?”
“환기.”
“…….”
“노린내를 맡지 않아도 돼서 좋군.”
그리고 결국은 흑표범놈들이 참지 못하고 땅의 힘으로 탐지를 시작했다.
“뭐 해, 안 들어가냐?”
“들어가야지.”
나는 어깨를 살살 주무르며 팔을 붕붕 흔들었다. 둘째놈이 살짝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그건 네가 당장이라도 싸울 준비가 됐을 때 하는 행동 아니냐?”
“응? 아. 뭐…… 딱히 싸우려는 건 아니지만 필요하면 해야지?”
“엉?”
“왜?”
“아니, 그 돌고래놈이랑 대화하는 걸 봐서는…… 저기에 있는 놈들 회유하러 온 거 아니었냐?”
“맞는데?”
나는 물음표를 띄우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이 둘째놈이 평화로운 3회차 삶에 길들여지긴 했구나.
하기야 좀 평온했나.
나는 긴박했던 투스 구출 작전은 잠시 잊은 채 피식 웃었다.
“둘째야, 왜 모르는 것처럼 얘기하냐. 원래 가장 좋은 회유 방법은 ‘주먹’이야.”
“……그래.”
아틀란이 나와 비슷하게 웃더니 고개를 숙였다.
“그래야 우리 가주님이지.”
곧이어 들어 올린 표정에는 내가 아는 사납고도 행동파답던 표정이 어려 있었다.
쿵쿵쿵.
아틀란이 노크했을 때, 우리는 생각보다 빠르게 몸을 쓸 준비를 해야 했다.
‘발소리, 아니, 돌진?’
심상치 않은 소리. 문이 벌컥 열리는 동시에 나와 아틀란은 약속이라도 한 듯 뒤로 물러났다.
부웅!
우리가 있던 자리로 거대한 무기가 휘둘러졌다.
‘곤봉? 아니, 저건…….’
빗자루 아니야? 나는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빗자루를 휘두른 건 사납게 생긴 중년 여인이었다.
눈꼬리가 어쩜 이렇게 휙 올라가 있는지.
‘와, 우리 범고래랑 뱀놈들 빼고 이렇게 성질 더럽게 생긴 수인은 처음 보네.’
상황도 잊고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상대는 적갈색 머리에 짧게 친 단발머리였다.
“뭐냐, 또 얼마나 우리를 괴롭히려고! 이쯤 해 둬 망할 새끼들아! 우리가 순순히 당하고만 있을 것 같아?!”
첫 공격으로 성질이 풀리지 않는 듯 여성은 다시 한번 공격하려 했으나, 정면을 보고 당황했다.
“뭐야. 애새끼?”
“음, 입이 좀 거치네.”
“그럼 애새끼를 애새끼라 하지 뭐라고 해?”
이 사람, 어쩐지.
내가 이전 회차에서 만났던 스승과 비슷한 말버릇을 가졌다.
지난 회차에서 내게 물의 힘 쓰는 법을 가르쳤던 스승도 이렇게 입이 걸걸했기 때문이다.
‘그 인간은 이번 회차에 잘 살고 있으려나?’
특이하게도 범고래들이 싫어서 떠난 범고래 방계 사람이었다.
돌아가면 찾아서 영입이나 해 볼까.
잠시 딴생각에 빠지던 정신을 다시 불러왔다. 시야에 여인을 다시 담았다.
“며칠 전 페세움에 안 오셨나 보네.”
“뭐라는 거야?”
“일단 소개부터 할까요?”
“가만…… 너희 그 새까만 머리에 특이한 새치.”
“새치 아닌데?”
“아무튼! 너희 설마 범고래들이냐?”
“정답!”
여인의 얼이 빠졌다.
“그리고 난 이번 대 용의 신부야.”
“…….”
나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당신들의 수장과 이야기 좀 하고 싶은데 들어갈 수 있나?”
여성은 나를 빤히 노려보더니 곧 빗자루를 거둬들였다.
“다 부서져 가는 집에 무슨 연유로 찾아온 건지 모르겠지만, 들어와.”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이었지만 생각보다 있을 건 다 있는 집이었다.
나는 여성을 쫓아 걸으면서 가만히 레바이가 해 준 말들을 떠올렸다.
“육지 거북 수인들은 조금 특이한 가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알아본 바로는 ‘육지 거북 수인’이란 한 종류의 거북을 말하는 게 아니었다.
고래가 여러 종이 있듯 이들도 여러 종으로 나뉘는데.
다만 고래들과 다르게 여러 종이 모두 한데 모여 ‘육지 거북’이란 가문을 형성한 축이었다.
‘행동파이자 주로 무력을 쓰는 이는 악어거북 수인.’
저 성질 더러워 보이는 여성이 바로 악어거북 수인일 것이다.
지구에서 다큐멘터리로 한 번 본 적 있다. 성질머리 더럽고 육식을 즐기는 거북이었나.
‘보기론 뱀도 씹어 먹는 거북이었는데…….’
이솝 우화 ‘토끼와 거북이’ 속 유순한 거북이만 알던 나로선 충격이었지.
그리고.
“쎈 거 조아!”
고래 다음으로 좋아하는 동물에 등극하기도 했었는데…….
아무튼 무려 8년씩이나 황실과 육지 맹수들의 깽판과 진상질을 견디며 버텨 온 자들이었다.
이런 허름한 곳에 산다고 하나 결코 녹록하지 않을 것이다.
잠시 아빠와 함께 안전하게 두고 온 에키온을 떠올렸다가 지워낼 즈음.
한 방문 앞에 멈춰 섰다.
“귀하신 분께서 왜 누추한 곳에 오신 것인지 미천한 저로서는 모르겠습니다만.”
의외였다.
내가 신부라고 밝혔기 때문인가?
집 안에선 고분고분하게 내게 공대하고 예의를 갖추는 척이라도 했다.
“안쪽에는 저희 육지 거북들의 수장님이 계십니다.”
“응, 안내 고마워.”
“예의를…….”
“갖출 거야. 용의 신부로는커녕 썩은 생선 취급하던 육지놈들 보다야. 정체를 알자마자 예를 갖추는 너희가 훨씬 나은데?”
“…….”
나는 문고리를 잡으며 웃었다.
“예의를 보인 자에겐 예의로 돌려줘야지. 그게 상식적인 수인 아니겠어?”
여인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 나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방 안쪽에서 연륜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시다면 이 늙은이의 방이 넓지 않아, 한 분께서만 들어와 주시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아틀란을 보며 눈짓했다.
둘째는 불만을 표출하면서도 얌전히 문밖으로 물러섰다.
달칵.
문이 닫히는 동시에 나는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갔다.
“귀하신 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아니, 영광이라 해야 하겠습니까?”
목소리가 더욱 가까워졌다.
“나이가 많아 직접 움직이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아냐, 됐어. 나도 당신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서 알 거든.”
나는 걸음을 멈췄다. 눈앞에는 흔들의자가 있었다.
그러나 보통의 흔들의자와는 다르게 세 배 이상은 큰 의자였다.
“흑표범들과의 큰 싸움으로 인해 다리를 잃었다지?”
그리고 이 의자에는 이 정도면 거인이라 불러도 마땅하지 않은가…… 싶은 거대한 노인이 앉아있었다.
처음엔 갈색이었는지. 갈색에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이 섞여 있다.
풍성하고 긴 수염 덕에 산신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일어날 필요 없어.”
“……저희에 대해 알고 오셨군요.”
노인은 당황하지 않고 웃었다.
노인은 육지 거북들의 수장 ‘코끼리거북’ 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