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5화
“뭐야, 비어 있나.”
바구니 안쪽은 텅 비어 있었다.
“하긴 이렇게 눈에 띄는 곳에 있을 리가 없나.”
정말 이 방에 용 공작이 있을지 없을지 몰라도, 있더라도 머리가 있다면 이런 곳에 숨진 않을 것이다.
대장 기사는 쯧 혀를 차고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옷장 같은 곳에 숨었나?”
하지만 대장 기사는 몰랐다.
두 소년과 아기 다람쥐가 바로 그 바구니 안에 숨어 있었음을.
“찍……!”
릴리는 에키온의 품에서 딸꾹, 딸꾹질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조금 전 뚜껑이 열렸을 때, 아기 다람쥐 눈에 비친 흑표범 기사의 모습이 역광이라 몹시 무서웠던 것이다.
웨일은 뻥 뚫린 천장을 바라보다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제 옆에는 에키온이 말없이 앉아 있었다.
“소리, 내도 된다고 했지?”
“……응.”
대장 기사가 자신들을 발견하지 못한 건 에키온 덕분이었다. 에키온이 시공간을 잠시 비틀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거 얼마나 유지할 수 있다고?”
에키온이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렸다.
“1분이라고…….”
에키온은 이미 칼립소에게 물의 힘을 쓰게 하기 위해 거의 모든 힘을 다 소모했다.
이 까닭에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과연 1분 안에 저들이 사라질까.
아직도 방 안에서 잔뜩 뒤지는 소리가 들려 왔다.
느껴지는 기척이나 소리로 봐선 사람은 다섯 정도.
웨일은 탄식하며 결심했다.
‘뭣하면 내가 미끼라도 되어야겠어.’
이런 결심을 한 이유는 간단했다.
나밖에 없어.
수중 동물 수인 사이에서야 자신의 가치가 크지만, 저들은 흰수염고래에 대해 잘 모를 것이다.
‘15, 14, 13…….’
수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웨일은 사실 바구니의 뚜껑이 사라진 순간부터 60초부터 거꾸로 숫자를 계속 세고 있었다.
‘5, 4…….’
어쩔 수 없다.
남은 건 자신이 희생하는 일뿐이다.
“일어나면, 보일 거야.”
“알아. 몰라서 일어나려는 거 아냐. 잘 들어, 내가 뛰쳐나가면 너는 얘 데리고 창문으로 달려가서 뛰어내려.”
“…….”
“비교적 안전하게 뛰어내리는 방법은 너도 내가 칼립소한테 들을 때 함께 들었잖아.”
그나마 셋 중 몸이 가장 튼튼한 자신이 함께 뛰어내리는 게 안전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끝내 수색이 멈추지 않는 것 같아 웨일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순간이었다.
쿵!
“대장님!”
거대한 소리와 함께 대장 기사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뭐야, 이 새끼들은?”
흩어져서 수색하던 나머지 네 명의 흑표범 기사들이 달려왔다.
그러나 곧 그들 또한 대장 기사와 같은 꼴을 면하지 못했다.
다섯 명이나 되는 흑표범 기사들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웨일이 얼떨떨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쓰러진 놈들 뒤로 누군가가 보였다.
“무사하냐?”
아틀란이었다.
그것도 웬 보따리 같은 걸 품에 꼭 안은 모습이었다.
아틀란은 방을 돌아보면서 눈을 찌푸렸다. 방 꼴이 아주 가관이었다.
‘가주님은 여차하면 여기까지 뒤질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설마하니 정말로 범고래들이 거주하는 방을 뒤질 줄이야.
육지놈들이 범고래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새삼 알게 되어 이가 부득부득 갈렸다.
이전 생에서도 그러했지만 평생 가도 정이 들지 않을 놈들이었다.
아틀란이 눈썹을 들썩이자 물줄기가 솟아나더니 기절한 기사들을 꽁꽁 묶어 버렸다.
투스를 데려오면서 힘을 좀 많이 쓰긴 했지만 저 망할 놈들을 묶어 둘 정도로는 남아 있었다.
“드렉스, 저 새끼들 치워 버려.”
“예.”
뒤에서 얌전히 서 있던 드렉스가 빠르게 움직였다.
레바이가 함께 움직이려 하자 아틀란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넌 왜 움직이냐? 힘도 없는 게. 설마 같이 옮기려고?”
“말씀하신 대로 힘도 없는 게 왜 하겠습니까?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애들 상태는 확인해야 할 거 아닙니까.”
“아.”
아틀란은 잠시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뺨을 긁적이려 하다가 자신이 안고 있는 아이를 떠올리고는 그만두었다.
“웨일, 괜찮아?”
“으응. 형 나는 괜찮아. 형은?”
“우리야 당연히 괜찮지.”
레바이는 웨일을 비롯해 에키온, 에키온 품에서 덜덜 떠는 아기 다람쥐까지 꼼꼼히 살폈다.
‘다행히 별일 없었군.’
아마도 별일이 생기기 전, 타이밍 좋게 자신들이 도착한 듯했다.
레바이는 그제야 편안하게 자리에 앉았다.
정말이지 졸지에 현장 요원으로 뛴 두뇌파에겐 손에 땀을 쥐는 일이었다.
그사이 꽁꽁 묶어 둔 기사들을 모두 복도로 던져 버린 드렉스가 돌아왔다.
흑표범 기사들이 사라지자 릴 리가 머뭇거리며 바닥으로 쪼르르 내려오더니, 레바이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제 얼굴을 레바이의 손에 비볐다.
찍! 찍찍!
“……잘 다녀왔냐고 묻는 건가.”
다람쥐 언어는 모르지만 대충 눈치로 알아듣고 이렇게 묻자, 릴리가 열심히 끄덕였다.
레바이는 서늘한 얼굴로 피식 웃을 뿐이었다.
“야, 용 공작.”
아틀란은 바구니에서 막 빠져나온 에키온에게 말했다.
“여기 와서 봐라. 네 친구다.”
정확하게는 친구가 아니라 분신 같은 수하였지만.
그가 알 게 뭐란 말인가?
여동생이 밤잠까지 설칠 정도로 걱정하던 일이 잘 해결됐다는 게 중요하지.
에키온이 천천히 다가왔다.
아틀란은 에키온이 볼 수 있게끔 투스 얼굴을 살짝 가려 놓았던 담요를 들어 올렸다.
‘……이놈.’
자신과 똑같이 생긴 얼굴을 보는 에키온의 표정엔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표정이 없는 것처럼.
현재 투스는 아틀란이 데려오는 과정에서 고단했는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아프단 사실을 증명하듯 불편한 숨을 쌔액쌔액 내쉬고 있었다.
아틀란은 살짝 긴장했다.
“……투스.”
분명 감흥 없는 표정이었지만, 아틀란은 저 표정을 한번 본 적 있기 때문이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건만 목소리만은 몹시도 처연했다.
지난 생에서 눈 돌아간 용 공작을 보았을 때가 떠올랐다.
아틀란이 긴장하며 제 힘을 끌어 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바닥이 흔들렸다. 아니, 바닥뿐일까?
‘성이 흔들리고 있는 거다.’
아틀란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에키온이 힘겹게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제 힘을 거둘 생각은 없는지.
투스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많이 아파?”
“……나도 몰라. 그런데 너. 힘겨워 보이는데, 성, 부술 거냐?”
“…….”
에키온은 아틀란을 느릿하게 응시하며 답하지 않았다.
곧이어 아틀란은 성을 뒤흔들던 힘이 사라진 것을 느꼈다.
“화, 안 내.”
에키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다시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아기 뱀을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칼립소가, 허락하지 않았으니까.”
어린 용 공작이 제 여동생을 통해서 감정을 배운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제 분노마저도 칼립소의 허락을 받겠다는 건가?
아니면…….
“……허락하면 어떡할 건데?”
“칼립소가, 복수는 ……돌려주랬어. 더 많이.”
당한 것보다 더 돌려줘라. 분명 칼립소가 할 법한 말이었다.
왜일까.
분명 지축을 울리던 에키온의 힘은 사라졌건만 아틀란은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에키온의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창문을 응시하고 있었다.
“강해질 거야.”
……눈앞의 이건, 길들이지 못하면 잡아먹히는 맹수들 위의 맹수다.
* * *
“에키온! 웨일!”
나는 문을 거의 박차다시피 벌컥 열고 들어섰다.
“어이, 왔냐.”
“오셨습니까, 공녀님.”
아틀란과 레바이가 차례대로 인사를 건넸고, 드렉스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에키온은! 아니, 투스는!
“복도에 늘어진 새끼들 뭐야? 설마 진짜로 여기까지 쳐들어온 거냐?”
“야, 좀 진정해.”
“진정하게 생겼냐!”
이 미친놈들이 기어이 범고래들이 머무는 방까지 뒤져?
“둘째야, 아주 잘 잡아 뒀어. 아무도 건드리지 마라. 내가 회 쳐 먹어 버릴 거니까!”
“……내가 교육은 잘 모른다만 애들 앞에서 그런 말 써도 되냐?”
아틀란의 말에 나는 그제야 후, 정신을 차리고 숨을 내뱉었다.
방 안에 있던 모든 인원이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중에서 분명 사람 모습이었으면 ‘엉니!’ 하고 달려왔을 릴리가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갔나 했더니 소파 한쪽에 웨일의 다리를 베고 잠들어 있었다.
고단했던 모양이다.
“투스는?”
다급한 내 목소리에 아틀란이 복잡한 표정으로 어느 한 곳을 향해 고갯짓했다.
“직접 봐라.”
그 방향을 좇아가니, 푸른 머리를 가진 에키온의 모습이 보인다.
그 어느 때보다 가라앉았고 침울한 얼굴이었다.
“……칼립소.”
그런 에키온의 다리에는 에키온과 똑같은 얼굴을 가졌지만 왜소하고 형편없이 마른 소년이 잠들어 있었다.
내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저 모습은 뭐야…….’
분명 이곳에 남은 투스가 괴로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예상한 것보다 더욱 최악의 모습이었다.
주먹이 절로 떨렸다.
이윽고 들려 온 건 지금까지 참아 왔다는 듯 처음으로 듣는 물기 어린 에키온의 목소리였다.
“왜, 투스 눈 안 떠?”
나는 가까스로 진정했다. 그래, 아기 뱀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먼저였다.
‘괜찮아. 데려온 것만으로 우린 승리한 거야.’
그래.
여기엔, 치유 능력을 가진 수인이 둘이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