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나는 내가 보인 퍼포먼스가 적절한 어그로를 끌었음을 확신했다.
내가 바란대로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 싸움을 본 흑표범 기사들이 모두 이쪽으로 몰렸던 것이다.
‘이놈들 그래도 자존심은 있다, 이거지?’
맹수들은 자존심이 세다.
하기야 날 때부터 포식자로 태어났단 자부심이 대단한 놈들이었다.
그 앞에서 자기 우두머리의 아들을 묶어 놓고 시위하고 있으니.
게다가 동료들은 우수수 쓰러지지 않았나.
맹수라면 때로 목숨보다 소중한 자존심에 금이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마 흑표범과 관계없는 육지 맹수 수인마저도 피가 끓는 광경이었을 터.
“이야, 비린내 나는 어린 범고래 계집애가 퍽이나 잘 싸우는구나?”
“뭐래, 이 꼬리 달린 개XX가.”
나는 막 흑표범 기사들 사이에 함께 나타난 하이에나 수인을 발로 걷어찼다.
“네 노린내나 빼고 와라.”
진짜 짐승도 아니면서 깨갱 소리를 내는 ‘컨셉충’ 같은 놈이었다.
그렇게 나는 물의 힘이 남은 시간 동안 신명 나게 움직였다.
‘후, 땀 좀 뺀 기분이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물의 힘을 발휘하지 못해 나는 몸으로 직접 움직이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익숙한 기척이 근처에 느껴졌다.
“아빠.”
고개를 돌리면, 뒤에 아무렇게나 던져 준 아스엘은 자신들의 기사들 손에 줄을 벗고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일부러 저놈들이 구출하게 두었던 것이므로 신경 쓰지 않았다.
아스엘을 여기 붙잡아 두고 시선을 끔으로써 더욱 많은 시간을 벌었으니까.
“싸움은 어쩌고 여길 왔어?”
나는 반가우면서도 궁금한 마음으로 물었다.
아빠는 나를 안아 들고는 슬쩍 한쪽으로 고개를 돌려 고갯짓했다.
“직접 봐라.”
“음? 뭐야.”
나는 눈을 끔뻑였다.
놀랍게도 아빠와 판테리온 공작이 싸우던 경기장이 감쪽같이 사라진 것이다.
대신에 그곳에는 경기장 크기만큼 푹 파인 구멍과 곳곳의 자잘한 구멍으로 가득했다.
“경기장이 사라졌으니 경기가 의미 없지 않느냐더군.”
판테리온 공작의 짓이다. 나는 픽 웃었다. 아빠는 이어서 경기장을 없애 버린 건 판테리온 공작이지만 그 외 구멍은 그 인간이 못 가게 막으면서 자신이 낸 것임을 태연하게 시인했다.
‘아아, 어쩐지 싸우는 동안에 옆에서 엄청 커다란 소리가 들리더라니.’
내 싸움에 신나 미처 보지 못했는데 이런 일이 있던 모양이다.
관중들은 구경하느라 신났겠는걸.
“꼼수 썼네.”
“그렇지.”
나는 순순히 판테리온 공작의 간계를 인정하는 한편 어깨를 으쓱했다.
아쉬움이나 미련은 전혀 없었다.
‘이미 시간은 차고도 넘치게 끌었단 말이지.’
“아빠, 정말 고생 많았어.”
나는 머뭇거리다가 아빠의 목을 꼬옥 감싸 안았다.
아주 오래전 지구에서 아빠의 목을 이렇게 감싸던 날이 떠올랐다.
이 사람도 이런 걸 좋아할까?
아빠의 맥박이 콩콩 뛰고 있었다. 귓가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울렸다. 기분 좋은 울림이었다.
“이런, 세상 최고의 포상이로군.”
“……부끄러우니까 더는 말하지 마.”
“넌 은근히 이상한 곳에서 부끄럽다는 말을 쓰는군.”
“그런 것도 말하지 마.”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아빠의 목을 감싼 손을 풀지 않았다.
한 번 더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내 등으로 어색한 토닥임이 내려앉았다.
아빠의 토닥임이 영원히 어색했으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며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판테리온 공작은 자리를 떠났지?”
“그래. 아마도 지금은…….”
아빠는 가만히 기척을 가늠하는 것 같았다.
“페세움을 수색하느라 바쁜 것 같군.”
나는 씩 웃으며 아빠에게 속삭였다.
놈들이 서둘러 떠났다면 더는 이 페세움에 볼일이 없다.
‘백날을 이곳에서 찾아봐라.’
아니, 투스가 머물던 건물도 이 잡듯 뒤지고 있으려나?
“우리도 돌아가자.”
1분이 한 시간 같던 시간들이었다. 오랜만에 움직였더니 약간 피로하기도 했다.
얼른 아이의 몸을 벗어나 어른이 되고 싶다가도.
이렇게 아빠 품에 안겨 있으니, 조금 더 아이로 있고 싶단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나저나.’
고개를 들어 성 쪽을 보았다.
다들 문제없이 잘 돌아왔겠지?
* * *
찍! 찍찍!
웨일은 잠시 곤란함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몹시도 박학한 형 레바이와 가족처럼 지내 왔고.
레바이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지만…….
‘내가 배운 것 중에선 다람쥐 말을 알아듣는 수업은 없었는데.’
조그마한 다람쥐가 쉴 새 없이 오른쪽 어깨에서 ‘찍!’ 왼쪽 어깨에서 ‘찍찍!’ 하는데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다만 한 가지는 이해했다.
조금 전에 아기 다람쥐 릴리가 어딘가로 쪼르르 달려갔다 오더니만.
자신의 손과 에키온 손에 알밤을 놓아주고는 뿌듯하게 올려 보았던 것이다.
‘칭찬해 줘! 릴리 칭찬해 줘!’
딱 이런 눈이라서 웨일은 무뚝뚝한 얼굴로 조금 어색하게 칭찬해 주었다.
아기 다람쥐의 꼬리가 살랑살랑 움직였다.
‘칼립소는 언제쯤 올까?’
웨일은 여기 있는 세 사람 중 가장 연장자로서 릴리와 에키온의 안전을 맡았다.
책임감이 막중했다.
아무 일도 없다면 좋겠지만,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자신의 책임이 될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는 아무런 일이 없었다.
잠시 창문 밖 쪽이 소란스러웠던 시간은 있었지만. 자신들이 있는 곳과는 관계없는 일인 듯했다.
‘이대로 칼립소만 돌아오면 좋을 텐데.’
웨일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부터 바람 잘 날 없는 삶을 살아왔다.
그렇기에 이번만은 아무 일도 없이 넘어가고 싶다고 간절하게 희망했다.
웨일이 벌써 수백 번은 돌아봤을 방을 다시 한번 이리저리 둘러보며 문득 말했다.
“너는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지?”
이름을 부르진 않았지만 멍하니 있던 에키온이 고개를 돌렸다.
어린아이지만 차가운 표정이었다.
“말, 걸지 마.”
“나라고 걸고 싶겠어? 하지만 너랑 내가 칼립소 올 때까지 안전하려면 알아둬야 해서 묻는 거야.”
“…….”
“너랑 내가 굳이 싸울 필요 없다는 건, 지난번에 이미 결론 났잖아?”
그랬다. 두 사람은 남몰래 평화 협정을 맺었다. 마차에서의 일이었다.
칼립소가 본 미세하게 흐트러진 의복은 두 사람이 서로의 힘을 드러낸 흔적이었다.
“시간.”
“시간?”
단출한 단어였지만, 웨일은 잠시 침묵하다가 끄덕였다.
사실 남들에게는 무어라 표현할 수 없어서 단 한 번도 말을 꺼내지 못했지만.
웨일의 힘은 단순히 ‘등가교환’으로 사람을 치료하는 특기만이 아니었다.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이 세계에는 곳곳에 퍼진 힘이 있었다. 웨일의 모친은 이걸 세계의 ‘근원’이라고 표현했는데.
흰수염고래들의 능력은 이런 근원에 접근하여 이 힘이 가진 방대한 정보를 탐색한 후, 바라는 대가를 주고 사람을 치료하는 능력이었다.
모친은 어찌 보면 신에게 대가를 주고 사람을 치료하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용은 ‘근원’에 가장 가까운 존재 아닐까?”
모친이 평화롭게 웃으며 하던 말을 기억했다.
“그러니까 당장 전투에는 쓰지 못한다는 거구나. 이해했어.”
단호한 웨일의 말에 에키온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지만, 무어라 하는 대신 침묵했다.
릴리는 두 사람이 무뚝뚝하든 차갑든 말든, 에키온의 몸을 놀이터처럼 우다다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나저나 너, 나는 그렇게 경계하면서 쟤는 왜 아무런 말도 안 해?”
“이건 괜찮아.”
“뭐?”
“칼립소에게, 필요해. 그리고 무해해.”
그 말에 웨일은 가만히 릴리에게 집중하다가 끄덕였다.
“그래, 확실히 선하네.”
흰수염고래가 선인을 알아보듯 용들도 나름의 감각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웨일이 시간을 가늠하려 시계를 보는 순간이었다.
“……!”
웨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뿐 아니었다.
에키온의 팔을 미끄럼틀처럼 타던 릴리도 몸을 바로 세우고는 찍, 하고 울었다.
그뿐 아니라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에키온의 소매 속으로 숨었다.
‘잘못 느낀 게 아니야!’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게다가 점차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숫자가 심상치 않았다.
이건 분명 군화 소리였다.
여기에서 군화를 신는 건 기사뿐이었다.
‘숨어야 한다. 하지만 어디로?’
한두 사람도 아니고 다수가 다가오고 있었다.
여차하면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수도 있지만, 칼립소는 최대한 이 방 안에 있는 쪽을 추천했다.
‘만약을 대비해 창문에서 최대한 덜 위험하게 뛰어내리는 방법도 알려 줬지만…….’
나가는 순간 외부에 그대로 노출된다. 릴리도 에키온도 절대 드러나면 안 되는 존재였다.
“일단 숨자. 숫자가 심상치 않아.”
이 순간에도 발소리는 더욱 가까워지고 있었다.
웨일은 근처를 물색하다 하나를 발견하고는 달려가 문을 열었다.
“여기로 들어와, 얼른!”
에키온이 릴리를 든 채로 웨일이 연 곳으로 향했다. 들어가기 직전 에키온이 말했다.
“이거, 해 둘게.”
곧이어 범고래들이 머무는 방의 문이 벌컥 열렸다.
웨일이 예상했던 대로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흑표범 기사들로 하나같이 다급한 표정이었다.
“이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얼른 찾아!”
“하지만, 괜찮겠습니까?”
“젠장, 명령이 내려왔는데 어떡할 거냐. 책임은 내가 진다! 얼른 뒤져! 용 공작님을 찾아야 한다!”
기사들은 용 공작이 페세움에 있다는 소식에 얼떨떨함과 패닉에 빠진 채였다.
하지만 아직 성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이 방도 뒤지게 된 것이었다.
“어떤 곳이든 좋으니 애가 숨을 만한 곳이면 다 뒤져!”
“예!!”
그렇게 지시한 대장격 기사가 자신도 직접 나서서 찾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옷을 넣어 두는 바구니를 하나 발견했다.
저거라면…… 아이가 충분히 들어갈 만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성큼 다가간 대장 기사가 바구니의 뚜껑을 휙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