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정답을 외침과 동시에 내가 손을 휘젓자, 용 공작의 모습이 물로 변해 그대로 증발했다.
한 차례 더 거세게 일어나는 관중의 술렁임 속에서 나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아?”
물의 힘이 둥실 떠다닌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이 몸을 감싼다.
“평생을 아콰시아델에서 보낸 내가 용 공작의 외양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것도 아주 정확히.”
할 말이 없을 터다.
용 공작의 초상화는 반출이 엄격하게 금지된 물건이다.
그럼에도 나는 실로 정확하게 용 공작의 외양을 구현했으니까.
“정답은 바로 이 페세움 어딘가에 용 공작님이 계시기 때문이지.”
“……뭐?”
내가 다시 손을 휘젓자, 이번엔 어린 에키온의 모습이 구현되었다.
내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공작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계셔.”
“…….”
“이걸 어떡하나? 공작님은 자발적으로 나오신 거던데.”
이 말은 곧 저자에겐 용 공작이 ‘도망’ 나왔다로 들릴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나만 알아볼 정도이지만, 판테리온 공작 표정에 미세한 금이 갔다.
“……용 공작은 어디 있지?”
“찾아봐. 이 경기장 어디에 있다니까? 과연, 공작님께서 너희에게 친히 모습을 드러낼지는. 그분의 선택이겠지만.”
판테리온 공작이 우리를 노려보더니 그대로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 했다.
앞으로 불쑥 올라온 물의 벽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어딜 가려고.”
내려오는 건 네 맘대로였지만, 나가는 건 네 맘대로가 아니란다?
“무슨 짓이지?”
“나야말로 묻고 싶은데. 이 경기장에서 일어나는 결투의 규칙, 잊지 않았겠지?”
나는 손을 뻗어 물의 벽을 일으킨 채로 싱긋 웃었다.
줄곧 하고 싶은 말이었다.
“경기장에 올라온 자는 모두 선수로 간주한다. 그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책임지지 않는다.”
“……허?”
“뭐 해? 덤벼.”
시간 끌기엔 싸움이 짱이지. 안 그래?
열심히 하고 있냐, 수하들아.
……이렇게 시간을 끌어 주고 있는데 못 데려오면 다 죽을 줄 알아.
“아, 용 공작님의 용안 한번 뵈려면 빨리 나서는 게 좋으려나?”
“…….”
“용 공작님께선 잠시 구경하다가 나가시겠다고 했거든.”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미약한 초조함이 스쳤다.
그래, 용 공작을 놓칠까 봐 걱정되지?
‘여기에 있지도 않은 용 공작을 백날 찾아보라고.’
“끝까지 그 간악한 혀로 모두를 속이려 드는군.”
“속인 건지 아닌 건지.”
나는 손가락으로 성 쪽을 가리켰다.
“확인해 보면 될 거 아냐? 용 공작님이 계신지.”
판테리온 공작이 생각보다 꾸물거리는 바람에 싸움을 하지 않아도 시간을 충분히 끌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레바이네는 이미 투스를 구출해 돌아오는 길을 물색하고 있을 것이다.
판테리온 공작의 눈썹이 움직였다.
“하등한 이들과 대화씩이나 하려 했다니, 시간 낭비였군.”
하지만 나는 이미 우리의 목소리를 듣고 판테리온 공작 자리에 있던 기사 몇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았다.
‘좋아, 이것으로 병력이 더 빠지려나?’
페세움으로 모이면 모일수록 성의 인력은 비게 된다.
굳은 표정의 공작은 관중 쪽을 교묘하게 등진 채로 더욱 심각해졌다.
“헛소리를 오래 상대했군.”
곧 내게 등을 돌렸지만, 또 한 번 물로 된 벽이 판테리온 공작을 가로막았다.
어쭈, 어딜 가시려고?
“어허, 규칙은 규칙이지.”
당신은 이미 이 경기장에 올라왔다.
경기의 규칙은.
“너희 흑표범들이 정한 규칙이잖아?”
“……내게는 해당하지 않는 규칙이다. 그리고 이따위 장난질, 내가 못 벗어날 것 같은가?”
“아니지. 네가 정한 규칙을 지키지 않으면 남들이 안 지키더라도 아무 말 할 수 없을 텐데.”
내 앞으로 땅이 쩍 갈라지며, 바위로 된 송곳이 나를 향해 날아들었다.
쾅!
그 바위가 산산조각 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내 손엔 물로 만들어진 망치가 들려 있었다.
‘아아, 이 손맛이지.’
오랜만에 친구 같은 무기를 손에 드니 감회가 새로웠다.
‘어디 보자, 한 2분쯤 남았던가?’
물의 힘을 쓸 수 있는 시간을 가늠했다.
“말이 통하지 않을 짐승이로군.”
“웃기시네. 넌 짐승이 아닌 것처럼?”
제정한 사람이 정작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규칙은, 위엄을 잃는다.
판테리온 공작은 생각을 바꿔 빠르게 해치우는 쪽을 택한 듯했다.
그렇게 되게 둘 생각은 없지만.
‘아쉽게도 아직 판테리온 공작까지는 무리겠지만.’
시간 끄는 것쯤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는 순간 발이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깨 위로 툭 손이 내려앉았다.
“뭐 하러 네가 나서는 거지.”
늘 심드렁하거나 평온하던 목소리가 어딘가 살짝 격양되어 있었다.
“내 딸을 하등하게 취급하는 것 따윈 내가 처리하지.”
이렇게 말하는 동시에 내 주변에 물로 된 막이 쳐졌다.
그리고 귀로 아빠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저자가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끔 시간을 끌면 되는 건가?”
“응.”
나는 눈을 끔뻑이면서도 빠르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지금 이 막 안에서 들려 오는 아빠의 말은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듯했다.
뭐지? 이건 아빠만의 고유 응용 능력인가?
신기했다.
투스가 내게 말을 거는 방식과 비슷했으니까.
곧이어 나는 둥둥 뜬 채로 경기장 바깥에 착지했다.
내 옆으로 무언가 털썩 떨어진다. 꽁꽁 묶인 아스엘이다.
경기장 위로는 판테리온 공작과 아빠가 대치하는 중이었다.
팽팽한 기 싸움.
누군가 움직이는 순간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이야, 세기의 싸움이네.’
이전 생에서 아빠는 누구와도 싸우지 않은 채 틀어박혔음에도 그 명성만은 자자했다.
심지어 육지 동물 수인들에게마저도.
‘아쉽지만 구경만 할 때는 아니지.’
나는 물러나는 척 한쪽 어깨에 아스엘을 짊어졌다.
“으쌰.”
그러고는 콧노래를 부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아스엘이 버둥거렸지만 그보다는 단단히 붙든 내 힘이 더 강했다.
“조용히 해. 여기서 더 버둥거리면 바닥에 놓고 질질 끌고 갈 거야. 관중들 앞에서 그 꼴을 보이고 싶으면 더 움직여 봐.”
그러자 아스엘의 움직임이 멎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내가 페세움 안쪽으로 들어서는 문 앞에 멈춰 섰을 무렵.
나는 아스엘을 툭 내려놓았다.
이미 아빠가 걸어 준 음성 증폭은 내가 경기장 밖으로 밀려난 때부터 사라진 지 오래였다.
‘슬슬 피날레를 장식할 때네.’
축제에도 장례에도 끝은 있는 법. 그리고 내 계획의 끝도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살짝 능력을 사용해 아스엘의 입을 구속하던 물의 힘을 풀어냈다.
“너, 감히 용 공작을 밖으로 빼내?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줄 알아? 네가 한 짓이 고스란히 네 동료인 수중 동물 수인들에게도 돌아갈 거다!”
“그래서?”
“뭐?”
“뭐 어쩌라고?”
나는 팔짱을 꼈다. 우습지도 않다는 듯 웃으며.
“협박은 강자가 했을 때 먹히는 거야. 아, 잃을 게 없는 자에겐 먹히지 않겠네.”
“허…….”
이를 악문 아스엘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용 공작은 어딨지?”
이 새끼, 이거. 사람들이 안 듣는다고 이제 용 공작 존함을 막 부르는 것 보게?
“용 공작님이 네 친구냐?”
“당장 말하는 게 좋을 거다.”
“몰라? 용 공작님과 나는 그분을 이곳에 데려오는 걸로 계약 끝났어.”
놈에게 묶여 있는 주제에 입만 살았다고 조롱하는 대신 나는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대신에 그분은, 내가 도우면 나를 죽이지 않기로 했거든.”
용의 신부가 제물이 되어 죽는 것은 이젠 입 아플 정도로 당연한 사실.
“…….”
“왜 그렇게 봐? 죽는 건 누구나 싫잖아?”
이제는 경멸 어린 눈초리다.
“명예를 땅에 버린 건가.”
웃기지도 않았다. 너희의 명을 어기면 명예를 버린 자인가?
“그게 밥 먹여 주냐? 머저리 같은 놈.”
“…….”
“지금 네 처지나 똑바로 봐. 움직일 수도 없는 주제에 혀라도 쓸 수 있는 게 누구 덕분인지.”
“…….”
네가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너흰 이번에도 패배할 거야. 3회차 내가 이겼던 그날처럼.
나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 그래도 넌 나름 아낌받고 있나 보다?”
내가 나가려던 문은 문이 따로 달려 있지 않고 바로 복도로 이어진 구멍 같은 문이었다.
“너 하나 구하겠다고 달려오는 걸 보니.”
그리고 복도 끝에서 달려오는 기사들이 보인다.
하나같이 험악한 기세인 걸로 봐서 이놈을 구하러 온 모양.
“어디 한번 몸이나 풀어 볼까.”
저 기사들은 그냥 둬 봤자, 페세움을 수색하는 데 쓰일 것이다.
이 드넓은 페세움을 샅샅이 조사하는 인원이 적을수록 좋을 터.
내 주변으로 수없이 많은 물줄기가 솟았다.
“이거, 입가심이나 될지 모르겠네.”
마지막 물의 힘은 여기 쓰일 차례였다.
곧이어 달려오는 이들을 향해 주먹을 조준한 뒤 꾸욱 쥐었다.
곧 내 주먹을 닮은 거대한 주먹이 달려오는 이들을 확 후려쳤다.
‘크으, 스트라이크!’
진압은 깔끔했다. 용이 달아준 날개와 같은 물의 힘은 달았고, 나는 날아다녔다.
“아아, 좋다.”
정신 차렸을 땐 수십의 기사가 내 주변에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경기장 한편에서 싸웠던 탓에.
“지금, 저 꼬마애가…….”
“범고래 맞지? 저건, 대체 무, 무슨 힘이야?!”
“……용의 신부가!”
모든 용의 영지민이 보고 있었다.
일거양득, 일타쌍피라 하던가.
투스를 구출하면서도 할머니에게 약조한 것도 지켰다.
‘3회차 전쟁에서 승리하며 느꼈지.’
전쟁에서든 나라의 알력 싸움에서든. 하다못해 마을 골목 싸움에서도.
대장이 강하면 수하들도 우습게 보지 못한다.
이후로 더는 수중 동물 수인을 무시하지 못하도록.
오늘 이 자리에서 각인시켜 주겠다.
나는 목을 이리저리 풀며 싱긋 웃었다.
‘자, 할머니. 이 정도면 만족하겠지?’
약속은 지켰다고, 할망구.
당신에게서 이걸로 뭘 얻을지 기대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