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61화 (161/275)

제161화

“긴급 상황이다!”

레바이는 다급한 발소리를 들었다. 이와 함께 들려 오는 목소리에 숨을 죽였다.

죽을 맛이었다.

‘나는 현장 인원 체질이 아니라고…….’

불만이 없지는 않았지만, 어쩌겠는가.

여기까지 온 이상 반드시 성공하는 결과 말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그것이 소년이 팔자에도 없는 잠입자 역할에 충실하게 된 까닭이었다.

일단 저질렀으면 성공해야 한다.

레바이는 기억이 없음에도 칼립소와 사고 구조가 비슷했다.

“대장님, 무슨 일입니까?”

“일단 당장 움직여라. 1번대…… 아니, 2번대 애들까지 모두 불러!”

“그럼, 여기 경계는 어떡하고요?”

“나머지 두 개 부대 애들 있잖아! 빨리빨리 안 움직여?”

“죄, 죄송합니다. 근데 어딜 가는 겁니까?”

“페세움으로 간다!”

레바이가 숨은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선 두 기사가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흑표범 기사들이다. 혹은 흑표범의 지시를 받는 기사들이거나.

엎드려 있는 탓에 그들의 검은 군화만 겨우 보였지만.

먼지 속에서도 대화를 엿듣는 건 어렵지 않았다.

“큰 문제가 생긴 것 같으니, 긴급하게 움직이란 명이다.”

“……비상상황인 거군요. 알겠습니다! 당장 애들 움직이겠습니다!”

이윽고 한데 모인 기사들이 은밀하게 이동했다.

레바이는 기척을 잘 알아차리진 못했지만 그럼에도 많은 인원이 빠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야 원.’

레바이는 가만히 떠올렸다. 칼립소가 계획을 설명하던 순간을 말이다.

“건물 외부의 인원이 물러나는 순간이 올 거야. 아마 음…… 반. 그래, 딱 반이 빠질 거야.”

레바이는 소름이 돋았다.

지금 정확히 반 정도의 인원이 빠지고 있었으니까.

“그때가 기회야. 너희가 ‘투스’를 데리고 나올 때까진 인원이 다시 충원되지 않을 테니까. 반드시 이때, 데리고 나와야 해.”

“건물엔 강력한 육지 맹수 수인들도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걱정 마. 걔들 반은 페세움에 올 거고 나머지 반에서 또 반은 인원이 빠질 때 같이 사라질 테니까.”

칼립소는 당시 확신했다. 자신이 말한 것이 모두 이루어질 거라고 말이다.

레바이는 계속 궁금했다.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은 늘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어디까지 보고 있는 걸까?

“말씀하신 대로 안 되면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그럴 경우의 일도 지금부터 알려 주겠지만. 말한 대로 진행될 거야.”

무엇보다 매력적인 일은.

설명하는 칼립소의 얼굴엔 자신감이 넘쳤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테니까.”

육지 맹수 수인들이 가진 오만함이랑은 또 다른, 고결해 보이는 모습.

칼립소는 ‘용 공작’이 페세움에 있는 것처럼 말할 거라고 했다. 말뿐 아니라 그렇게 보이게 만들 것이라고.

그렇게 되면 정확히 반 정도의 병력이 움직일 거라고 예상했다.

‘마치 판테리온 공작의 성정을 알고 움직이는 것 같군.’

가끔은…….

‘미래를 아는 것 같다.’

이것이 레바이의 뛰어난 두뇌가 내린 결론이었지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정말 ‘예지’라는 이름의 특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웨일 같은 아이도 있는 걸 보면, 세상에 돌연변이가 없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공녀의 비밀을 탐구할 때가 아니었다.

레바이가 기나긴 생각을 마무리 지을 즈음, 건물 근처는 한산해졌다.

모르긴 몰라도 내부를 지키던 인원도 함께 빠졌을 것이다.

레바이와 드렉스 근처로 누군가 나타났다.

“여기 있었냐.”

가까이 나타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속삭이는 음성이 들려 와 레바이가 흠칫 놀라 돌아보면, 그곳엔 피식 웃는 아틀란이 서 있었다.

“새끼, 쫄기는.”

레바이는 아틀란을 보는 동시에 안심하며 툭툭 먼지를 털고 일어났다.

함께 숨어 있던 드렉스도 마찬가지였다.

“오셨군요.”

“목소리 더 내도 괜찮다. 결계를 펼쳤으니까.”

아틀란이 주변을 돌아보더니 끄덕였다.

“인원은 다 빠진 모양이네?”

“네, 공녀님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반 정도 빠진 것 같습니다.”

“레바이 말이 맞습니다.”

전투 쪽에 더 감각이 있는 드렉스가 레바이의 말에 힘을 실어 주었다.

아틀란이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걔가 얼마나 대단한데. 걔가 그렇다고 하면 그냥 믿기만 하면 돼.”

“…….”

“그럼 언제나 승리할 테니까.”

묘하게 건들거리는 자세였지만 자세히 보면 절도 있는 모습이었다.

제아무리 강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는 집안이라지만, 가끔 한참 어린 여동생의 명을 듣는 게 불편하지 않을까.

레바이는 처음에 머릿속을 스쳤던 의문을 깔끔하게 접었다.

아틀란은 칼립소를 진심으로 주군으로서 모시며, 존중하고 아끼고 있었다.

‘범고래 형제, 자매 사이에서 배신과 살인이란 흔한 일이라던데.’

맹목적인 믿음이 신기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쪽으로 들어가면 되냐?”

“네. 오시기 전에 드렉스 경에게 대략 기척에 대한 것들을 들었고, 길도 모두 외워 두었습니다. 지금 아틀란 님께서 아시는 것까지 공유해 주시면 탈출로가 완벽……까지는 아니어도 쓸 만할 겁니다.”

아틀란이 잠시 오묘한 표정으로 레바이를 응시했다.

“……? 왜 그러십니까?”

“아니, 가끔 착각할 것 같아서 말이지.”

아틀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레바이는 기억이 없는 게 분명한데, 가끔 기억이 있나 싶을 정도로 이전 생에서와 동일했다.

‘미래가 바뀜에 따라 완전히 같은 모습일 수는 없는 법인데.’

이놈은 위화감이 전혀 없었다.

“아니, 됐다. 내가 아는 것부터 토해내면 된다는 거지?”

“예.”

칼립소가 예상한 인원이 빠지는 것도 모자라, 아틀란도 때맞춰 도착했다.

이제 할 일은 칼립소가 말한 존재를 데려오는 것뿐이었다.

잠시 뒤, 그들은 복도 한편에 숨어 있었다.

아틀란은 반은 만족스러우면서도…… 나머지 반은 불만 어린 표정으로 슬쩍 옆을 응시했다.

“너…… 걷는 속도 좀 어떻게 안 되냐?”

레바이가 예상한 경로는 거의 완벽했다.

아틀란이 말해 준 보초병들의 순찰 시간과 순번까지 더해지니, 숨어 가는 것이 훨씬 수월했다.

지름길만을 알려 주는 기계 같았다.

다만, 단점이 있다면 레바이가 두뇌파인 탓에 아틀란과 드렉스에게 맞추는 데 한계가 있단 점이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머리를 쓰는 놈이고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만?”

레바이가 ‘난 지금 숨소리를 참는 것만으로도 힘들다.’ 하는 얼굴로 말하자 아틀란은 어깨를 으쓱했다.

“거 새끼, 성질하곤.”

“……이래서 전투 인원이 싫습니다. 진짜.”

“뭐?”

“왜요?”

아틀란은 조금 놀랐지만 다시 고개를 저었다.

‘뭔. 이전 회차랑 똑같은 말을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말하냐. 깜짝 놀랐네. 어우 씨.’

그들은 곧 목적지에 도착했다.

“뭐야, 문 근처엔 사람이 거의 없을 거라더니……. 진짜잖아?”

레바이가 칼립소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공녀님께 듣기론 불길하고 무서운 존재라면서 사용인들도 피한다고 합니다.”

다른 곳은 삼엄한 경비로 가득했지만, 정작 용 공작의 방문 근처만은 칼립소가 갔던 때처럼 거의 비어 있었다.

다만, 사람이 아예 없진 않았다.

유일한 보초가 순찰 중인지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세 사람은 잠시 기척을 확인했다.

마침내 보초가 멀어졌을 때.

‘지금!’

문을 열고 들어가 닫았다.

거대한 문을 소리 없이 닫는 데는 큰 힘을 필요로 했지만. 아틀란에겐 문제없는 일이었다.

“여기냐?”

“예. 그렇습니다.”

방에 들어온 세 사람은 할 말을 잃었다.

“……야, 여기가 진짜 용 공작 방 맞아?”

아틀란은 회귀자로서 지난 생에 별꼴을 다 봤다고 자부한다.

못 볼꼴도 많이 보아 온 인생이지만…….

이런 건 처음이었다.

‘분명 그 에키온 그놈을 대신해 변장한 놈이 있을 거랬잖아.’

지금 찾는 놈도 아이라고 했다.

그런데, 아이의 방이란 곳이 영 이상했다……. 아니, 불길했다.

방 곳곳에 성한 물건이 하나도 없었다. 의자나 탁자가 넘어져 있는 것은 물론, 전부 부서지거나 산산조각 나 있었고.

커튼은 찢어진 채로 너덜거렸으며, 바닥에는 유리 조각이 널려있었다.

“비린내 한번 고약하네. 어떤 미친 새끼가 저래 놨냐.”

무엇보다도…… 벽이 붉은 물감 같은 것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기 주인이 미친 새끼거나, 아니면 이곳에 방문한 놈이 죽어 마땅한 쓰레기 새끼겠네.”

잘못 본 게 아니라면 벽면의 저 흔적은 분명 피였다.

아틀란이 입을 꾹 다물고 주변을 살폈다.

마침내 그는 침대에 봉긋 솟은 동산을 발견했다.

침대가 너무 큰 탓에 평범한 사람은 그저 지나치고 말았을 흔적이었다.

흔적뿐인가. 기척이…….

‘너무 약해.’

아틀란이 표정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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