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0화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관객석은 거세게 술렁거렸다. 모든 사람이 동요하는 것이 잘 느껴졌다.
당연하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누구던가.
‘용의 도시에 사는 영지민들.’
세상 그 누구보다 용 공작을 존경하고 우러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눈에 용 공작은 영주 그 이상의 존재. 용 공작이 아프다는 소문이 돌았을 때 도시 전체가 침울해할 정도였다.
이런 이들에게 용의 신부는 오직 용 공작을 위해 준비된 사람.
‘비록 그 이면에 제물이라는 나쁜 의미가 숨어 있더라도.’
용 공작이 아닌 이상 절대 건드릴 수 없는 중요한 인물이었다.
괜히 용의 신부에게 용 공작과 같은 위치를 줬겠나.
제아무리 제국 전역에 공포와 위명을 떨친 판테리온 공작이라 한들. 이 사실을 뒤집을 수는 없다.
더 적나라하게는 영주 대리 따위가, 다치더라도 용 공작의 손에 다쳐야 하는 신부를 감히 건드린 상황이다.
“나는 용 공작님을 위한 존재인데, 만약 다치기라도 했다면? 그분은 온전하지 못한 신부를 보셔야 했겠지요.”
분위기는 꼼짝없이 흑표범들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나지막한 내 말에 술렁임은 더욱 커져만 갔으니까.
“…….”
나는 판테리온 공작이 당황하는 모습이 그저 우습기만 했다.
그 누가 거대한 힘으로 찍어누르던 이들을 이렇게 선동하고 몰아세웠을까. 어차피 너희는 이 일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평생을 오만했던 너희가 단 한 번도 처해 본 적 없는 일일 테니까.
그래, 그렇게 입 닥치고 있으렴.
시간이 흐를수록 공기도 분위기도, 모든 것이 내게 더욱 유리해질 테니까.
실제로 누군가 판테리온 공작에게 다가가 분노하며 말을 걸고 있었다.
아마도 용 공작 측의 가신인 듯, 얼굴이 분노로 새빨개져서는 터질 것 같았다.
‘그래. 용 공작을 향해 저리도 맹목적인 충성을 보이는 자들이 있는데.’
괜스레 화가 치밀었다.
왜, 에키온은 저런 수하들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그 어두운 방에 갇혀 있어야만 했던가.
황제와 저들의 행태에 욕지거리가 치밀었다.
너흰 이 술렁임의 파도를 쉽게 가라앉힐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여기서 판테리온 공작이 결국 어떤 선택을 할지.
“젠장, 용의 신부님에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해명하십시오!”
“용 공작님은 알고 계시는 겁니까!!”
아니나 다를까, 술렁임이 커지다 못해 이제는 불만마저 터져 나올 즈음…….
마침내 모두의 시선 속에서 판테리온 공작이 천천히 입을 떼었다.
“무언가 오해가 있었던 것 같군.”
판테리온 공작이 입을 열자 잠시 소란이 가라앉았지만. 수많은 사람의 분노 어린 시선이 그를 향하고 있었다.
“분명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저 모습은, 우리가 무도한 행위를 펼치려 했던 걸로 보이는군.”
나는 눈썹을 슬쩍 올렸다.
공작이 보일 반응으로 두 가지를 예상했다.
하나는 범고래들 따위가 물의 힘으로 보인 장면을 믿을 것 같으냐는 말.
이 말을 했다면 상황은 최악으로 치달았을 것이다.
왜냐, 이미 관중들은 내가 보여 준 장면을 철석같이 믿어 버렸기 때문이다.
변명하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을 터.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하지만 이 자리에서 진솔하게 토로하도록 하지.”
저 장면을 인정하되…….
“우리가 오해할 만한 장면을 만든 것은 인정한다. 하나,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음을 선언한다.”
이 상황을 만든 주범을 매도하는 것.
“쉬쉬했지만 이 자리에서 알리겠다. 저 소녀는…… 적법한 용의 신부가 될 수 없었다.”
나는 씩 웃었다.
그러면 그렇지. 너희가 택할 선택지는 자명하다.
“우리는 현재 이 도시에서 존경받는 용 공작의 건강 문제로 인해 도시의 운영을 돕는 상황이다! 이곳에 있는 수인들은 모두 생각해보라, 우리의 모든 결정은 독단적일 수 없다. 모든 건 용 공작의 승인하에 이루어지니까!”
성난 민심이 잠시 가라앉는다.
그럴싸한 소리다. ‘우리는 너희 주인이 허락해서 움직인 거지 않겠냐?’는 것.
“우리는 용 공작의 청을 받아 이번 대 용의 신부가 자격이 있는지를 재심사하게 되었다.”
“…….”
“그도 그럴 것이, 원래 비공식적으로 용의 신부를 인도받는 시간은 2년 뒤였기 때문이다!”
약조된 시간보다 빠르게 온 신부가 당연히 수상하지 않겠느냐.
판테리온 공작은 이유를 조작하는 쪽을 택했다.
제법 영리한 선택이다.
“우리는 조사 도중 수상한 점을 발견해, 용의 신부에게 조사를 위해 동행할 것을 청했다. 저 장면에서 소리가 나오지 않아 이 자리에 있던 그대들이 알지 못했을 뿐. 데려간 곳에는 용 공작이 있었을 것이다.”
공작은 자리에 없었으면서 마치 앞뒤 장면을 모두 본 사람처럼 말했다.
“내 아들은 용 공작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려 했을 테지.”
아하. 그러니까 아스엘 저놈이 저지른 납치 행각의 뒤에 네가 계시겠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았다. 아틀란이 조금 당황한 낯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목소리가 울려 퍼질까 봐 말을 못 하는 눈치였지만. 시선의 의미는 선명했다.
야, 괜찮은 거냐?
……라고 묻고 있으니.
나는 입 모양으로 답했다.
‘내가 지는 싸움하는 거 봤냐?’
곧바로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잠시만요.”
판테리온 공작의 헛소리를 돌연 확 끊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날 공격한 이유가 용 공작님에게 데려가기 위한 거였다고?”
저 인간이 항의할 시간을 주지 않고 바로 이어 말했다.
“웃기지도 않네. 그럼 모셔 가야지. 왜 납치를 시도하는데?”
내가 그저 지켜본 건 너희가 스스로 함정을 만들길 기다린 것뿐이다.
“그리고 용 공작님이 나를 찾았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당신이 한 말이 당신의 발목을 붙잡을 테니까.
“난 이미 용 공작님을 만난걸?”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젠 가증스럽게 거짓까지 고하는군. 그는 지금…….”
“편찮으시다고? 그래, 그렇긴 하더라.”
나는 싱글싱글 웃었다.
“하지만 걷고 말하고, 듣는 데엔 무리가 없으시던데?”
판테리온 공작이 이 자리에 수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고 발끈하며 당혹한 모습을 보이는 게 퍽 즐거웠던 탓이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지?
“정말이야. 내가 어떻게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을까?”
용의 신부는 원칙적으로 용의 성에만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신부가 이동할 수 있을 때는…….
“용 공작님께서도 여기 함께 오셨거든.”
용 공작이 허락했거나, 함께 동행했을 때.
나는 손을 펼쳤다. 손끝에서부터 혈류가 도는 기분이 든다.
심장 고동만큼이나 익숙한 힘이 손에서 연꽃처럼 피어난다.
아아, 이 얼마나 사용하고 싶던 힘이었던가.
애틋하고 사랑스럽기까지 하다.
나의 물의 힘.
내가 쓰는 물의 색은, 늘 변화무쌍했다. 짙은 푸른색부터 아틀란의 것처럼 연하디연한 하늘색까지.
“물의 힘?”
아빠가 조금 놀란 듯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예쁜 색이군.”
그리고 이렇게 울려 퍼지는 소리마저도. 나는 고맙다는 듯 방긋 웃어 주고는 관중을 향해 섰다.
“공작님께서도 이 자리에 계셨답니다.”
동시에 나는 공연자가 된 양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모습을 가리셨을 뿐이지요.”
비록 크기는 아주 미약한 힘이지만, 한번 정점에 섰던 내게 주어진 힘을 응용할 방법은 무한했다.
지금 이 순간, 물의 굴절 현상을 이용해 만들어 낸 신기루와 같은 환상.
내 옆에는 누군가 서 있었다.
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한 모습의 환상이.
내가 만들어 낸 것은 성인 남성이었다.
‘다시 볼 줄은 몰랐네.’
푸르른 머리카락이 흔들거린다.
새하얀 피부와 차갑디차가운 눈매, 유려하지만 인형같이 무기질적인 모습을 간직한 남자였다.
바다, 그래. 나는 이 남자를 처음 봤을 때, 바다를 떠올렸던 것 같다.
내 옆에는 3회차, 멸망을 앞두고 직접 본 용 공작의 모습.
즉, 에키온의 성인 모습이 서 있었다.
“어때요, 용 공작님.”
나는 모른 척 웃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사람들은 혼란스러운 듯했다.
귀로는 수군거림이 들려 왔다.
“……현재 용 공작께서는 어린 모습 아니셨나?”
“나도 그리 알고 있는데…….”
“하지만 저건 용 공작님이야. 어린 시절에 본 모습 그대로라고!”
판테리온 공작과 아스엘도 경악할 테지.
아니나 다를까, 내가 용 공작의 모습을 보여 주자마자 판테리온 공작의 주변이 어수선해지더니 몇몇이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은밀하게 웃었다.
우리 쪽에서도 아틀란이 혼란을 틈타 조용히 물러나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