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8화
모든 계획 공유를 마친 뒤, 서로가 가는 방향은 달랐다.
나는 둘째와 함께 마차에 올랐다. 함께 가는 마부와 기사 하나는 얼떨떨한 표정이었지만.
지금까지 봐 온 것이 있다 보니 얌전히 따랐다.
“나머지 둘은 방을 철저하게 지켜. 무슨 일이 있더라도, 누구도 들여보내선 안 돼. 알겠어?”
“예, 알겠습니다!”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범고래 가문인 이상, 이들은 어린 내가 지휘하더라도 그리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 위로 옅은 홍조마저 어려 있었다. 전투에 대한 기대였다.
물론 나와 함께 가는 기사 하나만 이런 표정이었고, 나머지 둘은 날 따라가는 하나를 부럽게 응시했다.
하여간 범고래들이란.
속으로 쯧 혀를 찼지만, 한편으로는 이해했다.
만약 투스를 구출하는 중요한 목적이 있지 않았다면 나도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싸움을 기대했을 테니까.
“잘 지켜.”
“네!”
“그리고 얼른 싣고!”
“예!”
우리가 탄 마차 짐칸 쪽에는 다른 놈이 함께였다.
꽁꽁 묶인 아스엘이었다.
막 짐칸에 실리던 얼굴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봤지만 나는 미동도 않고 웃을 뿐이었다.
남은 흑표범 기사들은 여전히 그 자리에 묶여 있을 터였다.
마차를 타고 멀어질수록 아틀란의 힘이 약해지고, 결국은 풀려나 소란스러워질 테지만.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일이지.’
아마 지금쯤 내게 얻어터진 놈들 중에서도 눈을 뜬 놈이 있을 것이다.
그리 오래 기절하게끔 치진 않았으니까.
시간이 없었기에 점검을 빠르게 마치고 마차에 올라서려 했다.
“야, 저기 봐.”
아틀란이 먼저 타고 나도 올라타려는데, 아틀란이 나를 툭 치더니 한곳으로 고갯짓했다.
돌아보면 그곳에는 레바이가 서 있었다.
“뭐야, 레바이? 너 왜 여기 있어. 분명 계획을…….”
“지나가던 길에 들렀습니다. 늦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지시 사항은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레바이가 빠르게 말했다. 어쩐지 다급해 보이는 표정이라 나는 더는 질책하지 않았다.
“한 가지 여쭙는 걸 깜빡해서 말입니다. 웬만해선 자율적으로 판단하라고 하셨지만 이건 여쭤봐야 하니까요.”
“뭔데?”
“사람이 죽어도 괜찮습니까?”
“죄 없는 사람?”
“아뇨, 그런 사람은 안 건드립니다. 당사자들 말입니다.”
나는 레바이를 빤히 보다가 대답했다.
“어떨 것 같아?”
레바이 또한 내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않은 채 나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답이 됐습니다.”
내 표정만으로 답이 되었다는 듯이. 그리고 곧바로 돌아서려다 말고 잠시 머뭇거렸다.
“외람되지만 한 가지만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뭐를?”
안경알 속 동그랗지만 차가운 눈 안으로 망설임이 스쳤다.
“이 일을 무사히 끝내면 어째서 공녀님께서 이토록 저를 잘 알고 있었는지 알고 싶습니다.”
생각지 못한 요청이었다.
“제 모든 것을, 마치 옆에서 지켜본 사람처럼 제 인생의 모든 것과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하려 했던 것마저 아는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꽤 오래 고민해 왔던 것인지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실제로 오래 고민했으리라.
언제 이 얘기를 꺼낼 것인가 하고. 확실히 언젠가는 꺼낼 줄 알았지만 지금이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이렇게 흥정을 걸어오네?’
나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피식 웃었다.
“이야, 남의 영업 비밀을 쉽게 털어먹으려 하네?”
“…….”
건들거리는 내 태도에도 레바이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좋아. 성공한다면.”
“……!”
마지막 말을 남긴 채로 나는 마차에 올랐다.
“힌트 정도는 줄게.”
* * *
움직이는 마차 속, 마차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달렸다.
거리가 한산했기 때문에 더욱 빨리 달릴 수 있는 걸 거다. 다들 페세움으로 아빠의 싸움을 보러 갔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요란스럽게 어그로를 끌었으니 가지 않고는 못 배겼으리라.
“야.”
고개를 돌리면, 맞은편에 앉은 아틀란이 심기가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너 설마 돌고래 그놈한테 진짜 알려 줄 거냐?”
내가 돌아보자마자 불만을 툭 던지는 걸 보면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나 보다.
“뭐를?”
“시치미 떼지 마. 똑똑한 게, 다 알아들었잖아.”
“넌 참 이상하게 항상 화를 내면서 날 인정하더라?”
이런,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라는 얼굴이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레바이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는 거?
“글쎄? 정말 성공하면 알려 줘 볼까?”
“야!”
“시끄러워. 안 알려 줘.”
“…….”
“그러니 걱정 붙들어 매. 표정 썩어 가더라. 알아 봐야 해만 되는 일이야.”
“…….”
“우리의 과거가, 그리 기쁜 과거는 아니었잖아?”
사람들은 말한다. 끝이 좋으면 해피엔딩이라고. 과정이 얼마나 힘들었던 간에 끝만 좋으면 인정해 준다.
그렇다면 비극으로 끝난 우리의 엔딩은 어땠던가. 3회차의 삶을 떠올리다 지워냈다.
더 중요한 결전이 앞에 있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거나 이야기해. 너도 그만 정신 팔고.”
나는 웃음을 지우며 진지한 표정을 했다.
“둘째야, 페세움에 도착하면 너는 말이야…….”
해야 할 일을 다시 알려 주는 동안 페세움에 도착했다.
* * *
‘물의 힘을 써서 전속력으로 달리면 10분, 아니 15분 정도인가?’
용의 성에서 페세움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아마도 오래전 용 공작이 유희를 즐기던 곳이기에 일부러 성 근처에 지은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일직선 거리로 생각했을 때 이야기고, 실제로 마차로 오다 보면 좀 돌아오기 마련이라 약 20분 정도의 거리였다.
거대한 경기장은 보는 것만으로 웅장함이 느껴졌다.
실로 지구에서의 콜로세움이 생각나는 모습이었다.
앞에 도착했을 뿐인데 거대한 함성이 들려 왔다. 크기만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너는 돌아가.”
“예? 하지만.”
“아니, 방을 지켜.”
함께 온 범고래 기사는 자신도 싸울 일이 있을 거란 기대가 무너졌는지 돌아가란 말에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이 조금 웃겼다.
나는 가만히 하늘을 보다 발걸음을 재촉했다.
“가자.”
뒤로는 마차가 돌아가는 소리가, 아틀란이 옆에서 함께 걷는 소리가 들렸다.
경기장으로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중간에 흑표범 기사라거나 용의 성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제법 보였지만.
나나 아틀란 둘 다 로브를 쓰고 있어서인지 그리 큰 관심을 받지 않았다.
실제로 로브를 쓴 사람들도 많았고 그보다는 사람이 대단히 많았던 터였다.
“용의 도시에 사람이 이렇게 많이 살 줄이야.”
“몰랐던 것처럼 말하냐? 용의 도시가 수도 다음으로 큰 도시로 꼽히잖아.”
“아니 뭐……. 아는 것과 보는 건 다르지 않겠어?”
시간이 촉박했을 텐데, 놀랍게도 흑표범 공작은 용 공작 대리로서 아주 그럴싸하게 이 결투를 꾸렸다.
적이지만 행정 능력만큼은 인정했다. 아래를 보니 한창 결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아! 보셨습니까? 세상에, 악어 수인 크로카! 일어나지 못합니다! 오십이 번째 승리입니다!! 토너먼트에서 쉽사리 올라왔건만 상대가 되지 않는군요!!”
게다가 경기장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듣자 하니 캐스터와 해설도 앉혀 둔 모양이었다.
‘제대로 구현했네.’
페세움에서 마지막 결투가 열렸던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고 들었는데.
나는 2층을 쭉 내려가 난간 앞까지 다가갔다.
옆에서 아틀란은 제약이 있어 찡그리긴 했지만 잘 쫓아왔다.
저 밑에는 아빠가 흩날리는 종이꽃을 맞고 있었다. 이 꽃이 마치 눈처럼 보였다.
‘아빠가 건강했다면, 이런 건 아주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을 텐데.’
아콰시아델 영지엔 눈이 잘 내리지 않으니, 이렇게라도 눈에 덮인 아빠를 보는 건 희귀한 광경임은 분명했다.
사람들의 환호, 기쁨, 영광의 자리. 나는 가끔 궁금했다.
아빠는 가주의 자리가 가지고 싶진 않은가?
그 순간, 종이꽃을 평온하게 맞고 있던 아빠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아.’
아빠가 거짓말처럼 나를 응시했다. 이 수많은 사람 속에서 나를 발견했다.
처음엔 착각인 줄 알았지만.
아빠의 입 모양이 움직였다.
‘칼립소.’
내 이름. 나는 상황도 잊고 웃다가 곧 휙 뛰어올랐다.
“으악, 뭐, 뭐야!”
“아이? 난간 위에 섰어!”
“얘야, 위험하단다……!!”
난간 위에 선 나를 두고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 뒤로 넘어갔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래만 응시했다.
내 옆에는 아틀란이 함께였다.
‘자, 드디어 쇼타임이다.’
지금쯤 용의 성, 투스가 있는 건물 근처에서 무언갈 시작했을 레바이를 떠올렸다.
“가자.”
나는 모자를 꾹 누르면서 그대로 발로 난간을 박찼다.
뛰어내리는 내 모습에 근처 관중들이 비명을 질렀다. 아래층에 있던 이들 중엔 눈을 질끈 감거나 가린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추락하지 않았다.
거짓말처럼 나를 둥실 떠올리는 물줄기들.
나는 가볍게 착지했다.
바로 경기장 한복판에.
“…….”
열기가 조금씩 사라지고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진다. 나는 소음 속에서 손을 흔들었다.
“안녕, 아빠.”
아빠는 당황하지 않았다. 약속된 상황이 아님에도 그저 평온하게 나를 보며 말할 뿐이었다.
“때가 된 건가?”
“응, 맞아. 드디어 왔지.”
“조금 빠르군.”
그렇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래, 너는 여기 있을 줄 알았지.’
데바나 판테리온. 흑표범 공작이 이 경기장 상석에 앉아 있었다.
경기가 가장 잘 보이는 자리. 보통은 용 공작이나 황제가 앉는 자리였다.
완연하게 이 도시의 주인 행세를 하는 꼴이었다.
어느새 주변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야유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개가 갑자기 나타난 저 꼬맹이는 뭐냐는 내용이다.
나는 천천히 모자를 벗었다.
“아빠. 소리 증폭시켜 줄 수 있어?”
“물론이다.”
“아, 아아.”
낭랑한 내 목소리가 경기장 가득 울려 퍼진다.
“안녕, 여러분. 나는 이번 대 용의 신부입니다.”
내 목소리가 퍼짐과 동시에 사위가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나는 만족스럽게 주변을 보며 말했다.
“나는 오늘 용의 성에서 일어난 아주 끔찍한 일에 대해서 폭로하고자 이 자리에 왔어요.”
자, 상황을 크게 키우는 데 가장 좋은 것은 뭐다?
음모와 비방이지.
“우리 범고래들, 특히나 나는 그저 용 공작님을 뵈러 온 것뿐, 제 아빠가 조금 극성이긴 했지만…….”
여기서 아빠의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슬쩍 모른 척했다.
“나를 지키는 가장 강한 기사인 아빠가 자리를 비운 사이, 연약한 나를 공격하는 무리를 피해 몸소 이 자리에 오게 되었어요.”
내 목소리는 뒤로 갈수록 어린아이의 말투가 되어 갔다.
그러다 흘끗 아틀란 쪽을 보고는 목을 가다듬었다.
“어떤 극악하고 나쁜 무리가 용의 신부를 공격했습니다.”
나는 관중들을 보며 일부러 느릿하게 말했다.
“아니, 납치 및 살해 시도라고 해도 좋겠네요.”
낭랑한 어조로 울려 퍼지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사안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고요하던 사방이 미친 듯이 술렁거렸다.
나는 이 술렁거림이 잠시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얼른 이어서 말했다.
“이 자리를 빌려 묻습니다.”
나는 돌아보다 말고 마침내 한 곳을 향했다. 이 경기장, 가장 좋은 자리 정점을 향해서.
“판테리온 공작, 어째서 흑표범이 나를 공격했죠?”
처음 용의 신부를 공격했다는 발언까지만 해도 평온하게 앉아있던 판테리온 공작이었다.
그러나 자신을 지적하자 표정이 찌푸려졌다.
곧이어 경기장에 낮고 중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째서 용의 신부는 사실무근한 일로 우리를 모함하는가?”
판테리온 공작이었다.
정중한 척 발뺌하는 꼴에 나는 피식 웃었다. 오냐, 이 정도는 그저 찌푸리는 수준이다. 이거지?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알았지.
“믿기 어려운 사실이겠지만 증거가 있답니다.”
나는 아틀란에게 눈짓했다.
둘째놈은 내내 어깨에 커다란 자루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자루에 무엇이 들어있느냐.
줄이 풀리고 자루가 스르륵 흘러내린다.
짜잔.
“그렇지 않아도 나를 공격한 극악한 무리의 수장을 직접 잡아 왔답니다.”
“뭐?”
산지 직송! 아니, 용의 성 직송! 댁네 아드님입니다?
지금 데려가시면 할인해 드려요. 사은품은 너희의 망신과 악명.
“흑흑, 너무 무서웠어요.”
내 우는 소리가 울려 퍼지는 동안 그 누구도 말하지 못했다.
왜냐, 자루 안에는 흑표범의 후계자가 꽁꽁 묶인 채 누워 있었으니까.
판테리온 공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쾌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