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일단 아틀란놈을 데리고 방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물론 아스엘을 비롯한 흑표범 기사들은 그 자리에 꽁꽁 묶어 둔 채였다.
아마 한동안은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여유롭지 않으니 빠르게 움직여야 했다.
방으로 들어가자, 우리 모습이 보이기 무섭게 옆방에서 레바이와 드렉스가 달려왔다.
문 뒤로 웨일, 에키온과 에키온 어깨에 앉아 있는 아기 다람쥐가 보였다.
“공녀님? 오셨습니까. 대체 밖에선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많은 일. 흑표범 놈들이 나를 공격했어.”
“네?”
“나를 납치해서 데려가려 했지.”
레바이가 눈을 크게 떴다. 이도 잠시, 책사답게 바로 안경 아래 눈을 차갑게 가라앉혔다.
“피에르 님에게 인질로 쓰려던 작정이었나 보군요.”
“그렇지. 나를 힘없는 여덟 살짜리로 알았을 테니까 말이야.”
“힘없는…….”
작게 중얼거리던 레바이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항상 방심은 모든 패배의 지름길이 되는 법입니다. 아무튼 간에 이렇게 무사히 오신 건 공녀님의 무력을 알아차렸다는 거군요. 놈들은 도망간 겁니까?”
“아니?”
“……네?”
“밑에 묶어 뒀는데.”
“네에에?”
“뭘 그리 놀래. 둘째가 같이 있었어. 어렵지 않았어.”
“아니, 어렵냐를 말하는 게 아니라. 목격자 말입니다!”
아, 그게 문제였냐?
역시 내 책사. 흑표범 새끼들이 묶여 있다는 말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나는 조금 뿌듯해졌다.
옆에서 아틀란이 ‘저 새낀 왜 기억이 없는데 똑같은 거지……?’ 하고 아주 작게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지만 무시했다.
“레바이,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고 난 이걸 적극적으로 이용하려 해.”
“어떤 식으로 말입니까?”
역시, 어떻게가 아니라 어떤 방향인지 묻는다. 뭐든 대처 가능하단 소리다.
범고래는 새끼일 때도 범고래인 법. 이놈도 똑같다.
“당장 일을 벌일 거야. 더는 신중하게 행동할 필요 없어, 내가 말했던 건물로 쳐들어간다.”
“무작정 들어가자는 소린 아니시겠고, 겹겹이 쌓인 보초는 해결하실 겁니까?”
“응.”
“어떻게요?”
“그놈들이 알아서 물러나게 할 생각이지.”
나는 씩 웃었다.
“너희는 앞으로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예.”
“아, 그보다 레바이 너 혹시 길 잘 외우는 편인가?”
“네? 기억력이 나쁘진 않습니다.”
“좋아. 그럼 내가 말하는 건물의 지도 모두 외워. 10분이면 되지?”
“예? 지금 당장 말입니까?”
“응. 읽어 보고 지도를 토대로 최단 루트를 만들어. 아, 각 구역별 보초 인원은 드렉스랑 아틀란이 이야기해 줄 거야.”
“……공녀님. 혹시 저를 툭 치면 지혜를 뱉어 내는, 뭔 환상 속 물고기처럼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 까라면 까는 놈으로 보는데?”
“…….”
레바이의 표정이 왈칵 일그러졌다.
“장담해. 너는 할 수 있어.”
“……어떻게든 해내라는 소릴 속 편하게 하시는군요.”
“역시 넌 머리가 좋아.”
“이건 머리의 문제가 아니라 눈치의 문제입니다!”
레바이가 찡그린 채로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묵묵히 듣고 있던 드렉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드렉스, 너도 들었겠지? 너는 레바이 옆에서 거들어.”
나는 최대한 쉽고 간략하게 계획을 설명했다.
내 말을 듣던 아틀란과 레바이, 그리고 드렉스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했다.
찌푸리기도 했고 놀라기도 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사색이 되기도 했다.
아, 정정한다. 사색은 레바이만 됐다.
“저도 나서라고요? 저는 지원형 수인입니다!”
“인원이 없잖아. 그럼 어떻게 지시하려고?”
“…….”
그렇게 짤막한 설명이 끝나고 나는 고개를 돌렸다.
웨일과 에키온, 그리고 에키온 어깨에 다람쥐 모습으로 있는 릴리까지.
이 계획을 실행하는 인원이 셋이라면 여기서 자리를 지킬 인원도 셋이었다.
“웨일.”
“듣고 있어.”
웨일은 어째 자신이 무슨 말을 들을지 짐작한 듯한 얼굴이었다.
무뚝뚝하고 우직한 인상이지만 가만 보면 눈치가 빠른 아이였다.
“너도 알겠지만 지금 릴리, 에키온 그리고 너, 셋 중에서 네가 제일 연상이야.”
“놀랍지도 않은 사실이네.”
“그렇지? 뭐 이렇게 말하려니 어째 내가 집 좀 잘 지키랍시고 첫째한테 당부하는 엄마가 된 기분이긴 한데.”
사실 다르진 않으니까 말이지.
“부탁할게. 너흰 모든 일이 끝날 때까지 이 방에서 얌전히 있으면 돼.”
“그것뿐이야?”
“미안하지만 쉬운 일 아니야.”
나는 설핏 표정을 굳혔다. 웨일이 덩달아 움찔했다.
“너, 체스 할 줄 알아?”
“……알아, 엄마가 좋아하셨으니까.”
“그래. 체스판에서 가장 중요한 체스피스는?”
“……킹이지.”
“맞아. 이 방에 있을 너희는 이번 작전에서 킹이야.”
제아무리 투스를 잘 데려오더라도 에키온이 잡혀가면 무용지물이 된다.
게다가 웨일은 아주 귀중한 치료 능력자로서 절대 능력이 알려지면 안 되는 소중한 인물이었고.
릴리야, 말해 뭐하겠는가.
어느새 흑표범놈들에게 돌려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버렸다.
“정말 중요하단 소리야.”
“……이해했어.”
“그래. 그러니까 잘 부탁할게. 여기서 절대 나가지 마.”
그나마 이 방에 아빠가 물의 힘으로 조치해 둔 게 다행이랄까.
다만, 모든 일에는 만약의 경우가 있는 법.
나는 혹시 몰라 웨일에게 한 가지를 더 알려 두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알겠어.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렇게 할게.”
웨일이 얌전히 끄덕였다. 나는 웃으며 웨일의 머리를 쓰다듬고 싶었지만.
‘닿지 않는군.’
자연스럽게 손을 옮겨 어깨를 톡톡 쳐 주었다.
“웨일, 생색내는 게 아니라, 나는 믿는다는 말을 잘 하지 않아.”
믿음엔 인색하다.
과거 하루가 멀다 하고 배신하고 또 배신하는 후계 싸움을 거쳤다.
깊이 믿었던 수하가 생각보다 많이 없었단 소리다. 최측근만이 내 신뢰를 받았다.
“하지만 넌 믿어.”
역시 이건 네가 오래전 지구에서 가장 좋아하던 흰수염고래의 수인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애가 가진 능력의 무해함 때문일까.
“부탁할게. 에키온은 내게 정말 중요한 사람이야.”
믿음이 갔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은 저 애를 정말 많이 괴롭혔어. 만약 내가 데려오지 않았다면 얼마나 괴로웠을지 모를 일이지.”
“……알았으니까 그만해.”
웨일이 손등으로 입을 가린 채 고개를 돌렸다.
“까라면 까라는 소리 나도 잘 알아들었어.”
“아, 그건 레바이만 하면 되고. 너는 예외야. 좋지?”
“……레바이 형이 노려보는데.”
“아하하. 괜찮아.”
나는 생긋 웃었다.
“긴장 풀렸지?”
웨일이 움찔했다. 이렇게 보여도 아직 아이니까.
나는 다시 한번 어깨를 두드려 주고 밖으로 나서려 했다.
내 손을 꼬옥 잡은 손만 아니었다면.
“에키온?”
내 손을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에키온이었다.
“칼립소.”
에키온은 어째서인지 조금 상기된 표정이었다. 마치 기쁜 것처럼.
늘 새하얗던 뺨이 조금 발그레해진 것이 신기했다.
상황도 잊고 잠시 쳐다보게 될 만큼.
“도움, 필요해?”
그래서 몇 초 늦게 알아들었다.
“도움? 어떤 도움?”
에키온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려던 생각이었던 걸까.
내 손을 꽉 잡았다. 그 순간이었다. 나는 소름이 쫙 돋았다.
‘이 느낌은……!!’
몸속을 마치 혈류처럼 도는 힘, 그리고 제2의 손발처럼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힘.
정신 차렸을 땐 나와 에키온 사이, 허공에 물방울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분명 물의 힘이었다.
“뭐, 뭐, 뭐야……. 야! 너, 물의 힘 쓸 수 있었어?”
범고래가 아니기에 알 수 없는 이 일을 두고 아틀란만이 모든 걸 알아차리고 눈을 휘둥그레 뜨며 말을 더듬었다.
나는 아틀란에게 대답하는 대신 침착하게 에키온을 응시했다.
이건 분명 물의 힘이었다.
그리고 에키온이 내게 전해 준 것이기도 했다.
꿀꺽, 숨을 삼켰다.
솔직히 욕심이 안 나진 않는다.
하지만 이전에 물의 힘을 쓸 수 있게 해 주는 대신 에키온이 치르는 대가를 듣지 않았는가.
그러나 내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에키온이 빠르게 말했다.
“나, 키 컸어……!”
나보다 높아진 눈높이를 말하는 건가.
에키온이 이어 말했다.
“그래서 조금, 아주 조금이지만 이렇게, 해 줄 수 있어…….”
나는 에키온을 빤히 바라보다가 말했다.
“……너한테 힘든 일이야?”
“아니.”
“내가 이대로 이 힘을 쓰면 넌 죽어?”
에키온이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정말이지? 난 내 사람이 거짓말하는 걸 제일 싫어해.”
살아서 보자던 놈들은 모두 죽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나는 다시는 그 꼴을 겪고 싶지 않았다.
에키온은 시선을 가만히 맞추며 끄덕였다. 결연한 표정이었다.
“거짓말, 아니야. 칼립소가 싫어하는 거…… 나도 싫어.”
“……좋아.”
나는 허공에 떠오른 물방울에 시선을 주었다.
힘을 가늠해 본다.
쓸 수 있는 힘의 크기가 그리 크진 않다. 갓 물의 힘을 각성한 애송이들 정도인가.
“나, 이거 얼마나 쓸 수 있어? 시간 말이야.”
에키온이 고민하더니 손가락 다섯 개를 펼쳤다.
나는 끄덕였다.
“좋아. 5분이란 말이지…….”
나는 짧게 고민에 빠졌다. 곧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해.”
용이 내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아마도 이건, 그 세상 저만 잘난 놈들의 뺨에 주먹이나 날리라는 소리 아닐까?
“출발하자.”
우리는 각기 정해진 방향으로 출발했다.
나는 페세움 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