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속으로 중얼거리고 나서야 이 말이 지구에서 유명했던 부활 주문 밈임을 깨달았지만.
불길한 플래그로서 작용하진 않았다.
이러한 플래그도 결국은 힘의 격차가 차이 나지 않는 놈들 사이에서나 발생하는 법이지.
총잡이가 발사된 총을 후 불어 내듯 나는 주먹을 풀며 후, 흩어진 머리를 불어 냈다.
‘미사가 묶어 준 머리가 엉망이 됐잖아?’
하녀들이 놀라지 않도록 정리를 좀 한 뒤에 돌아가야겠다.
나는 단 한 방에 쓰러진 아스엘을 표정 없이 응시했다.
지난 회차에서라면 생각도 못 할 일이다. 이 나이에 저놈을 쓰러트리다니 말이다.
그만큼 상대는 흑표범 집안에서도 각광받는 후계자였고, 역대 후계자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인재였다.
‘그러니 원작에서도 릴리가 추후 황태자놈과 이어질 때 가장 큰 반대를 하며 막강한 장애물 노릇을 했겠지만.’
그래 봐야 어린애 수준에서의 이야기다.
설사 평범한 맹수 정도로 힘을 쓸 수 있다고 한들 내게 상대가 되지 않는다.
단순히 힘의 차이뿐만이 아니다.
‘경험의 차이라는 거지.’
내가 어릴 적 바이얀 무리와의 패싸움에서 이길 수 있던 이유와 다르지 않다.
압도적으로 쌓인 세월을 극복할 수 있는 놈은 없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놈들이라면 더욱이 말이지.”
귓가에 어떤 소리가 절로 들려 오는 것 같다.
오래전 지구에서의 격투기 시합 해설처럼.
아! 아스엘 선수, 일어나지 못하네요! K.O! K.O!입니다! 하고.
손을 탁탁 털고 있을 무렵, 수풀이 다시 한번 흔들렸다.
다른 낯선 기사인가 하고 걱정하진 않았다.
익숙한 기척이었으니까.
“왔냐.”
나는 보지도 않고서 말했다.
그러자 뒤에서 쯧 혀 차는 소리가 들려 왔다.
“누군지 보기나 하고 말하지, 그래?”
“어차피 둘째 네놈인 걸 아는데 뭐. 볼 필요 있나.”
“…….”
슬쩍 고개를 돌리면, 아니나 다를까 내 뒤로 나타난 놈은 둘째였다.
무엇이 불만인지 살짝 찌푸린 얼굴이었다.
“죄다 기절한 거냐?”
“보면 몰라?”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전부 급소를 쳤어.”
죽일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눈뜨고 도망가게 할 생각도 없었다.
어디 하나 부러진 놈들이 대다수일 거고 이외에도 모두가 한동안 거동이 어려울 거다.
“저 새끼들, 덤빌 인간이 따로 있지. 네게 덤벼?”
“화내지 말고.”
나는 둘째 얼굴을 보고서야 저놈이 나한테 화가 난 게 아니라 날 공격한 놈들에게 분노했단 사실을 알았다.
수중 동물이니 물 속성임이 분명하지만, 저 눈은 불꽃이라 봐도 좋을 만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기야 저놈은 이전 회차에서도 나를 향한 하극상을 두고 보지 못한 놈이었다.
옛 생각이 나 피식 웃었다.
“일단 좀 묶어 봐.”
아틀란이 쯧, 혀를 차더니 손을 거칠게 휘젓자 허공에서 물줄기가 흘러나와 바닥에 쓰러진 놈을 꽈악 묶었다.
‘어째, 아스엘 저놈을 유독 꽁꽁 묶은 것 같은데……. 착각이 아닌 것 같지?’
아스엘을 보다 말고 멈칫했다.
놀랍게도 저놈이 두 눈 시퍼렇게 뜬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호오?’
나는 턱을 짚은 채 진심으로 흥미로워했다.
각 잡고 후려 팼는데, 눈을 뜨고 있어?
“신기하네, 기절하라고 팬 건데 말이지.”
“너……. 쿨럭,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무사할지는 네 쪽에서 생각해야지.”
썩어도 준치라는 건가.
나는 풉, 웃으며 어슬렁어슬렁 놈을 향해 걸어갔다.
“넌 지금, 흑표범을 건드린 거다, 큽,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알지. 왜 몰라.”
아직 제 처지를 모르는 오만한 놈에게 톡톡히 알려 줄 생각이었다.
“뭍 짐승 놈들이 죄 없는 수중 동물을 핍박한 일이지.”
“뭐? 무슨 개소릴, 역시 너희같이 하등한…….”
꾸욱. 내 발이 아스엘의 손등을 꾹 밟았다.
“아, 개라고 했나? 나는 말 안 듣는 개새끼들을 보면 밟아 주는 병이 있어서 말이야.”
짓이겨지는 동안 아스엘은 비명 하나 내지 않은 채 입술을 꽉 깨물었다.
‘힘 담아서 아플 텐데, 역시 독한 놈이네. 뭐 이 정도는 해야 주연인가?’
제 아비를 닮은 눈동자로 검은 불꽃 같은 분노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았다.
우스웠다.
나는 이것의 몇 배가 되는 치욕과 설움을 겪으면서도, 노려볼 기회조차 없었는데.
“역시 인생 참 재밌어, 그치? 내가 살다 살다 흑표범을 발로 밟아 보고 말이야.”
그러자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뭘, 처음도 아니면서.”
분노 어린 아스엘의 눈동자가 단 한 순간이지만 흔들렸고, 그 위로 의문이 스쳤다.
이해할 수 없는 소리였을 것이다.
이는 잠시뿐이었다.
“내 아버지께서 이 일을 아시면 그냥 둘 것 같아? 범고래들 따위……!!”
그 범고래들에게 한때는 자신들의 성을 내주고 황성마저 내준 채로 굴욕적인 패배를 맞이한 사실을 들으면 어떤 얼굴을 할까.
“위기에 몰렸을 때 네 방법은 그것뿐이냐?”
“뭐?”
“부모님이나 찾기? 이야, 흑표범 후계자도 결국 한낱 애새끼에 불과하네?”
“…….”
“네 힘으로 안 되면 아빠에게, 아, 집안의 힘으로 쓸어버리자? 좋지.”
“…….”
“그게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는 기본 사실조차 모르는 멍청한 눈치는 우습지만 말이야.”
남들이 듣기엔 우습겠지만 나는 그래도 내가 아이라는 사실을 남몰래 주지하고 있었다.
너무 이상해 보이지 않도록 적어도 내 나름대로 경계는 유지했단 소리다.
그러나 이 순간 처음으로 그 가면을 집어치운 채, 회귀자로서의 본성을 꺼냈다.
어둡고 음침하며, 그 어떤 날은 너희를 파멸시키겠다는 복수심과 집념으로 똘똘 뭉쳤던 이전 회차의 나를.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내게서 흘러넘친 어두운 투기가 아스엘의 목을 옥좼다.
“말은, 강자가 하는 거야.”
컥, 커흑. 아스엘이 숨이 막힌 건지 기침했다.
“내 허락 없이 혀조차 놀리지 못하는 놈이 된 기분이 어때?”
무표정한 얼굴이었으리라.
머릿속으로는 기억의 파편이 스치고 지나갔다.
“조용히, 죽은 듯이 살아. 너는 내 허락 없이 입 하나 벙긋할 수 없는 존재야. 알겠어?”
“약자면, 약자답게 굴어.”
여주인공에게는 간도 쓸개도 다 줄 것처럼 다정했던 너희가 먼 곳에서 온 신부에겐 얼음보다 차가웠던 사실은 이제 하등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는다.
참으로 우습게도 나는 이놈의 약혼자로 사는 동안, 마지막으로 빌었던 날이 있었다.
“한 번만, 집에 돌아가게 해 주세요……. 한 번만 고향에…….”
왜 그랬을까. 당시 그 차가운 아콰시아델 저택에 내가 돌아갈 곳이 어디에 있다고.
여기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래도 거긴 몸 뉘는 것 정도는 편안했노라고.
내 지난 생을 연민하지도 동정하지도 않는다.
지난 시간일 뿐이니까.
그럼에도 안타까운 삶을 살아왔다는 것쯤은 가슴에 새기고 있다.
“너, 커흑, 절대…….”
이 순간 아스엘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우스웠다.
너는 고작 이 정도로 원한을 쌓고 복수를 결심하는 걸까.
“가, 가만두지 않을 거다. 절대로.”
“그거 알아?”
나는 무표정하던 얼굴 위로 다시 미소를 피워올렸다.
“세상에 절대란 없어. 그리고 나는.”
“…….”
“네 절대란 말이 우스울 정도로 강한 인간이거든.”
그대로 싱글싱글 웃는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돌렸다.
“아틀란.”
“어, 어어?”
이름을 불리자 둘째가 당황했다. 놈도 몸이 기억하는 것이다.
지난 생에서 내가 이런 얼굴로 이름을 불렀을 때엔…….
“무, 무슨 짓을 하려고……. 야, 여기 아콰시아델 아니다?”
내가 커다란 일, 때로는 미친 일을 벌인다는 걸.
아주 잘 아는 놈이었으니까.
“누가 뭐래? 그저, 좋은 계획이 떠올랐을 뿐이야.”
“……가, 아니 네가 그딴 얼굴로 웃으면서 계획이라고 할 땐 미친 짓밖에 하지 않았거든?”
“그 미친 짓의 끝은 어땠지?”
“……승리했지.”
“맞아. 중요한 건 그거 아니겠어?”
나는 웃는 얼굴 그대로 아스엘을 내려보다가 발뒤꿈치로 목을 꾹 눌렀다.
놈이 기절하기까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주변에 아무도 없지?”
“그래. 결계를 펼쳐 뒀으니까.”
“둘째야, 넌 머리가 나쁜데, 이런 쪽으론 눈치가 빨라서 참 좋아.”
아틀란이 펼쳐 둔 결계는 요란스러운 소리를 가려 주었을 것이고, 바깥에서 이쪽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 주었을 것이다.
“너, ‘기록’은 해 두었겠지?”
흑표범이나 사자, 책 속 주연들이 가진 땅의 힘이 무궁한 응용 능력을 가지고 있듯이.
우리 범고래들이 가진 물의 힘 또한 다양한 응용을 자랑했다.
이는 범고래 직계 개개인마다 어떻게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달랐는데.
나는 지난 회차에서 오빠놈들에게 특별한 응용법을 하나 가르쳤다.
물이 형상을 투명하게 반사하는 성질에서 따온 것.
바로 어떤 사건이나 장면을 기록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다만, 이것은 아주 고위 응용 능력으로 사실 아틀란의 나이로는 절대 불가능했겠지만.
“……그래.”
이놈은 앞선 회차의 기억을 간직한 나와 같은 회귀자다.
‘절대적인 힘이나 몸의 무력은 처음부터 쌓아야겠지만.’
내게 경험이 어디 가지 않았듯 이놈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네가 그걸 까먹었으면 계획이고 나발이고 못했을 테니, 오랜만에 대련행이었어.”
“내가 다른 걸 다 까먹어도 이걸 까먹겠냐. 네가 죽어라 굴렸잖아!”
“그래그래, 사랑의 매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법이다, 그치?”
아틀란이 복잡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서 어떡하려고?”
내 눈앞으로 푸르른 결정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이것을 손에 쥐었다. 아틀란이 만든 것이다. 조금 전에 있었던 모든 일을 기록한 결정.
“어쩌긴 판 한번 크게 벌여야지.”
“…….”
“쟤들이 좋은 기회를 준 거잖아?”
자, 예정보다 조금 빠르지만.
투스를 구하러 가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