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나는 눈썹을 휙 들어 올렸다.
어라라, 요것 봐라?
나는 속으로 가소롭단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조금 설렌 척 눈을 깜빡였다.
저들로 하여금 영특해 봐야, 결국 아이라는 생각을 하게끔.
방심은 위기의 친구다.
“……정말이야?”
“예, 저는 용 공작님의 최측근인 개인 시종입니다.”
시종이 화색을 띠며 자신의 화려한 옷을 보여 주었다. 우습지도 않았다.
진짜 용 공작이 허름하기 짝이 없는 옷을 걸치고 있던 모습이 기억에서 잊히질 않았으니까.
“좋아, 안내해.”
한번 어떤 꿍꿍이인지 보기나 하자고.
내가 이렇게 선언하자, 범고래 기사들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나는 그들에게 손짓하고는 따라갔다. 아마 대기하라는 내 손짓을 알아들었을 것이다.
“네, 이쪽입니다.”
틈틈이 나를 같잖게 보는 듯한 시선을 알아차렸지만 모른 척했다.
“용 공작님을 뵙는다니, 기대되는걸.”
마지막에 누가 웃는지 한번 보자고. 이 XX야.
과연 이걸 지시한 놈은 누구이려나?
* * *
시종이 나를 데려온 곳은 정원이었다.
“하하. 용 공작님께선 한참 병환에서 회복 중이시지만 신부님 얼굴은 궁금하셨나 봅니다.”
“그래?”
“그럼요. 벌떡 일어나서 보고 싶다고 말씀하셨다니까요.”
시종의 말은 걸을수록 점차 가벼워지고 있었다.
아이라고 얕보는 것이 분명했음에도 나는 처음처럼 뻗대거나 영특한 아이처럼 구는 대신.
눈빛이 초롱초롱한 아이를 연기했다.
“그분의 병환은 심각하신가?”
“음…… 사실 그리 심하진 않았지만 몇 달간 더욱 심해져서 최근엔 혼절까지…….”
혼절이라고?
“크흠흠.”
“아! 아하하, 신부님께서 신경 쓰실 정도는 아닙니다.”
시종과 함께 있던 기사가 헛기침하자 시종이 진땀을 흘리며 서둘러 말을 마무리했다.
‘……투스가 아픈 게 진짜였구나.’
속이 쓰렸다.
예상은 했지만 틀리길 바랐으니까. 홀로 남겨진 네가 힘들지 않을 순 없지만, 건강하기만을 바랐건만.
좋게 생각하자.
더 나빠지기 전에 이곳에 도착한 게 다행일 것이다.
한 가지 더.
아직 투스의 정체는 들키지 않았다. 이들은 용 공작이 바꿔치기 당한 사실은 모르는 것이다.
“여깁니다.”
꽃들이 피어 있는 곳을 지나 꽤나 적적한 공간에 들어섰을 무렵, 시종이 자리에서 멈춰 섰다.
“여기서 기다리면 용 공작님께서 오실 겁니다.”
나는 시종을 빤히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정말 와? 그분이?”
“예, 물론이지요.”
“용 공작님은 아프신 데다가 얼마 전엔 혼절까지 하셨다면서. 그럼…… 내가 그분의 거처로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예? 아하하……. 공작님께서는 음, 거처에 오는 걸 싫어하셔서 말입니다. 그리고 혼절은 제가 말을 잘못 꺼낸 것이고, 크흠, 지금은 괜찮으십니다.”
“그렇구나. 왜 하필 꽃밭이야?”
나는 주변의 정원을 보았다.
사실 정원을 좋아하지 않는다.
“아, 저 사람이 아콰시아델에서 온 볼모인가요? 어후, 냄새.”
“잔뜩 주눅 들어 있네, 불쌍해라.”
예쁘게 가꿔진 정원은 내게 있어 늘 모멸의 상징이었으므로.
“용 공작께서는 꽃을 좋아하십니다. 그래서 신부님을 여기서 뵙고 싶은 것 아닐까요?”
시종은 흐흐, 하고 이제는 편안하게 웃었다. 완전히 얕보는 듯한 시선을 한 채로.
나는 그런 시종을 빤히 응시하다가 말했다.
“거짓말.”
“……예?”
나는 고개를 돌려 잔잔한 풀숲 쪽을 바라보며 평온하게 말했다.
“지금 다가오는 이 기척들, 참 많이도 데려왔다?”
시종이 멈칫했다.
“그, 그게 무슨.”
“옆에 데려온 기사들로는 부족했니?”
“하, 하하.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것인지.”
마치 내가 알아차릴 리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왜, 조그만 범고래 꼬맹이 하나를 못 잡을 것 같았어? 그래서 이렇게 대인원이 온 거야?”
난 싱글 웃고 있던 미소를 싹 거둬들였다.
“아아, 기척은 꽤 숨길 줄 아네. 고급 인력인가 봐?”
“…….”
나는 주먹을 쥐었다 펴며 주변을 살폈다.
할 말을 잃은 시종 대신 뒤에 있던 칼잡이들이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어떻게 알아차렸는진 몰라도 제법이군.”
“역시 그 피에르 아콰시아델의 자식이다, 이건가?”
처음부터 시종은 바람잡이고 이쪽이 몸통이었다. 알고 있었다.
곧이어 사방에서 사람들이 등장했다. 하나같이 검은 옷을 걸친 차림.
그리고 무리 중 누군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꼴 보기 싫은 낯짝이었다.
아스엘 판테리온이었으니까.
“칼립소 아콰시아델.”
저놈이 나를 부르는 순간 비웃음이 샐 것 같았다.
저놈의 어린 시절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내가 저놈에 관해 기억하는 건 오만한 얼굴뿐이다.
늘 같은 표정이었지.
나는 주변을 돌아보면서 일부러 긴장을 드러내 보이고 아닌 척 어색하게 웃었다.
당황한 티가 나도록.
“뭐야. 툭 찍었더니 정답이었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용 공작님이 부른대서 왔더니, 위협적인 기사들에다 흑표범 공자가 친히 나타나다니. 이거 혹시 우리 아콰시아델을 향한 선전포고인가?”
“전혀.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나는 그저 길잡이로 왔을 뿐이다.”
길잡이 같은 소리 하네. 시종과 마찬가지로 얕잡아 보는 시선이 역력했다.
“같이 가 줘야겠다.”
이미 짐작했지만, 이 말로 확신할 수 있었다.
‘왜 흑표범놈들이 얌전히 페세움을 열어 주었나 했더니.’
노리는 것이 따로 있었네.
“그전에, 한 가지 묻고 싶은데…… 넌 흑표범 공자지?”
“그런데?”
나는 딱 허세를 부리는 아이처럼 떨림을 드러내면서 이를 악물어 보였다.
“용의 신부인 나보다 아랫사람이면서 왜 반말이야?”
주변 기사들이 발끈해서 나서려 들었다. 아스엘은 한 손을 들어 올리더니, 내게 고개를 까딱했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인사였다.
“참으로 실례했습니다, 신부님. 모시겠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데?”
“이쪽입니다.”
존댓말을 하나 마나 소용없는 태도였지만, 저 오만한 놈이 바꾼 것만으로 의미 있었다.
노리는 것이 더욱 선명해졌으니. 다름 아닌 나였다라.
신선한데?
‘너희가 그러면 그렇지.’
자신들의 소중한 것이 아니면 그 어떤 것이든 흉악하게 다루는 놈들이다.
나는 손에 느슨하게 힘을 뺐다.
“용 공작님은 어디에 계시지?”
“함께 가는 곳에 있을 겁니다.”
난 눈을 휘며 산뜻하게 대답했다. 탐색전은 끝이다.
“지랄하네.”
“뭐?”
아스엘이 다가오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넌 참 변한 게 없어.”
아마 내게서 흘러나오는 투기를 느꼈으리라.
한 번쯤 내뱉고 싶던 말.
“무표정한 낯짝 속에 음흉한 속을 숨긴 그 모습이 참 역겨웠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표정 없는 얼굴. 그 위로 처음으로 당혹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돌려 뒤쪽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느끼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좋아. 지원은 충분하겠고.’
나는 생글 웃으며 겁먹은 어린아이 역할을 던져 버렸다.
내 손가락이 까딱, 기사놈들을 향했다.
“볼일이 있으면 용 공작더러 직접 오라고 해. 우리 아빠가 애타게 찾고 있잖아?”
나는 소년의 오만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날 데려가고 싶다고?”
다리를 벌리며 전투 자세를 취했다. 목을 느슨하게 움직이며 풀어낸다.
쾅!
아빠가 광장 바닥을 발로 내려쳤듯, 내 발이 그대로 바닥을 내리쳤다.
우리 사이로 거대한 구덩이가 파였다.
“맘대로 해 봐.”
먼지바람이 가라앉는 사이. 나는 거만하게 고개를 까딱했다.
“단, 너희 중 하나라도…… 나보다 강해야 할 거야.”
모두가 당황하는 사이 땅을 박찬다. 싸움에서 당황이란 곧,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법.
“고, 공격이다!”
가장 가까운 기사가 알아차릴 즈음 이미 늦은 뒤였다.
콰앙!
사람이 쓰러지는 소리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런, 어쩌나……. 이렇게 요란스러운 소리가 울려 퍼지면, 은밀한 곳에 데려온 의미가 없겠다, 그치?”
“…….”
“당장 공격해!”
달려오는 기사들을 상대하려니 5년 전 바이얀 패거리와 패싸움을 하던 때가 떠오른다.
“젠장, 조심해! 그 피에르 놈의 딸이다!”
“어허, 남의 아빠 이름은 왜 함부로 불러?”
“커흑!”
“얼른 포위해! 잡아들여!”
그때의 싸움과 비슷했고, 그때보다 더 지루했다.
한 방에 한 놈씩.
‘원 펀치 쓰리 강냉이다, 이 XX들아!’
벼려진 주먹을 견디는 놈은 없었다.
한 놈의 목에 다리를 휘어 감고 휙 힘을 주었다.
우두둑, 소리와 함께 단말마의 비명을 지른 놈이 툭 바닥에 쓰러진다.
‘식후 운동 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네.’
이건 이미 그냥 후계자 정도의 실력은 뛰어넘은 나라서 할 수 있는 생각이리라.
“네 수하들은 포위 하나 못하는 멍청한 놈들인가 봐?”
손을 툭툭 털어낼 때쯤, 바닥에는 단 한 사람 아스엘만이 양발을 붙이고 서 있었다.
“…….”
“어떡할래, 저 멀리서 무슨 일인가 싶은 사람들이 달려올 텐데. 어디 홍보 좀 해 볼까?”
나는 태연하게 고개를 돌렸다.
“흑표범들이 용의 신부를 빼돌렸다고 말이야.”
“사실무근이란 결론만 나겠지. 먼저 공격한 건 너다. 이러고도 무사할 것 같은가?”
“사실무근이 될지 흑표범의 수치가 될지는 한번 두고 보자고. 아, 그리고 말이야. 난 아직 싸움 안 끝냈다.”
나는 싱긋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너까지 여기 누워야 끝이지. 안 그래?”
아스엘이 이를 꽉 깨물었다. 으드득 소리 하나만은 발군이다.
퍽 즐거운 노래로서 말이다.
“건방진…….”
아스엘의 주변으로 땅 부스러기나 바위들이 둥실 떠올랐다.
바닥이 진동한다.
저놈들이 쓰는 ‘땅의 힘’이다. 나는 훌쩍 자리에서 뛰어올라 옆으로 피했다.
기다렸다는 듯 내 발밑에 구멍이 생겼다.
이것만으로 끝이 아니라는 듯 바윗덩어리들이 내게로 날아왔다.
중력을 거스른 바위들은 살벌하기만 했다. 나는 침착하게 피하면서 생각했다.
‘어라, 이놈……. 내가 알던 것보다 실력이 더 좋은 것 같은데.’
그러나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맞지 않으면 그만인 셈이니.
“건방지다고 했냐?”
게다가.
“그 말은 말이야…….”
나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예의를 모르는 놈에겐 몸으로 직접 알려 줘야 한다.
아스엘 놈은 순식간에 나타난 내 얼굴이 가까워진 것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강자나 쓰는 거지. 이 건방진 새끼야.”
퍼어억!
내 주먹이 놈의 뺨을 갈겼다.
‘오, 아주 시원하게 날아가는데?’
해치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