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흑막 범고래 아기님-154화 (154/275)

제154화

범고래들이 쓰는 물의 힘은 흑표범들이 가진 땅의 힘보다 감시에 용이했다.

만약 아스엘이 말한 계획이 잘 실현된다면 정말로 유능한 경계병을 얻게 되는 것이다.

딸을 위해 광장에서 저 미친 짓을 벌이는데, 그 딸을 손에 쥐면 어떻게 나올 것인지는 뻔했다.

‘이래서 약점은 드러내지 않는 것이 맞거늘.’

수중 동물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는 것인가.

모든 육지 동물 수인들이 그렇듯 흑표범 가문 또한 수중 동물 수인을 향한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 그렇다면 나는 페세움 쪽을 맡지. 기왕 일어나는 싸움, 정신없게 해 주면 되겠구나. 오랜만에 몸을 풀더라도 말이지.”

“직접 나서시려는 겁니까?”

“필요하다면.”

그림자 진 집무실, 판테리온 공작이 더는 참기 힘든 듯 이를 갈았다.

“이를 빨리 해결해야 릴리를 찾는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을 것 아니더냐!”

아스엘은 가만히 시선을 내렸다.

흑표범들에겐 당면한 과제가 많았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일에 손을 대지 못하고 있기도 했다.

“팔라야, 그놈은 대체 무얼 했기에……!”

공작은 살벌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판테리온 공작의 아들들이 실종되었거나 부상 입은 채 발견되었어도 이 정도로 분노하진 않을 터였다.

그러나 판테리온 공작이 릴리의 실종 이후, 분노를 터트리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기에 아스엘은 가만히 침묵했다.

“하, 됐다. 넌 네가 말한 것을 차질 없이 진행해야 할 것이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판테리온 공작이 등을 기댔다.

어차피 용의 신부는 되바라지긴 했으나 어린 여자아이였다.

제압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흑표범의 힘을 모두 물려받은 첫째 아들이라면 더더욱.

* * *

“오, 페세움이 개방되었다고?”

“예, 흑표범 측에서 페세움의 규칙을 지정한 뒤, 온 시장에 뿌렸더군요.”

“……이미 페세움은 개장되었고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다고 합니다.”

역시 어떤 이슈를 덮는 데엔 그보다 강한 이슈를 일으키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

예로부터 스포츠는 만인이 즐기는 오락거리였으며, 게다가 그냥 스포츠도 아니고 격투기.

아무래도 동물적 본능이 남아 있는 수인들에겐 아드레날린이 치솟는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이 속도라면 시장이 비는 것도 시간문제일 듯하군요.”

레바이와 곰치 수인 드렉스가 차례대로 바깥의 분위기를 설명했다.

한국으로 치면 월드컵이 개최되는 느낌일까. 아직 레바이와 처음에 나가 본 이후로 외출하지 않아서 잘 모르겠다만.

“어쨌거나 성공적이란 소리네.”

덕분에 나도 아빠를 본 지 좀 되었다는 게 아쉬운 일이지만.

“예, 도전자들을 토너먼트식으로 배치해서 피에르 님이 첫날처럼 수많은 도전자를 상대하는 식으로는 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끈단 소리네?”

“예.”

레바이가 끄덕였다.

계획대로 페세움은 열렸다.

그리고 아빠가 거기서 맹수들을 상대하게 되었고.

아마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더 사람들이 몰릴 거란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왜 그놈들 쪽에서 시간을 끌려는 걸까?”

나는 턱을 잡은 채 고민했다.

움직이긴 좋아졌지만 조금 찝찝했던 것이다.

“레바이, 드렉스. 너흰 광장에서 아빠가 싸우는 거 봤지? 상대 수준은 어느 정도야?”

“제가 전투는 못해도 보는 눈은 자부합니다만, 솔직히 말해서.”

“피라미들입니다…….”

드렉스의 말에 레바이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하듯이.

“맞아, 근데 제아무리 송사리라도 수가 많으면 성가신 법이지. 체력 낭비라거나.”

그 피에르 아콰시아델인걸. 승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아빠를 기어이 서쪽 구석에 주저앉힌 불치병.

그 병이 마음에 걸릴 뿐.

“블러핑일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좋아, 시간이 넉넉지 않은 건 피차 마찬가지라는 소리지.”

“재료 쪽은 수월하게 움직인 탓에 이미 목표치의 팔 할을 채웠습니다.”

레바이와 드렉스가 서로를 보며 끄덕였다.

“하루 정도만 더 있으면 됩니다.”

“그래.”

재료 쪽은 시장 조사에 가깝다. 용의 도시에 수많은 재료가 모이는 만큼 그 재료들의 원산지를 알 수 있을 테고.

“2년. 2년이야, 레바이.”

“……알고 있습니다.”

레바이는 떨떠름한 표정을 하면서도 끄덕였다.

“외람된 이야기지만 공녀님은……. 아뇨, 아닙니다.”

“뭔데?”

“그냥, 조금 무례한 이야기입니다만, 사람을 어디까지 쥐어짜야 딱 그 사람의 한계치인지 아시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어쭈, 이것 봐라. 내가 자기 굴린다고 시위하는 거지?

나는 발끈하는 대신 씩 웃었다.

“그만큼 그 사람을 좋아하면 잘 보여.”

“만난 지 얼마 안 된 사람도 말입니까?”

“만난 시간이 중요한가? 그 시간의 질이 중요한 거지.”

“…….”

“뭐야, 그 표정은?”

“……말만 들어서는 공녀님께서 꼬시지 못할 이성이 없겠다 싶습니다, 아주. 공녀님의 나이를 잠시 잊을 것 같군요.”

“내가 애늙은이 같단 소리를 잘도 한다?”

“제가 언제 그렇게 말했습니까!”

억울해 보이는 레바이가 뭔가 더 말할 듯이 입술을 움찔거렸으나 나는 손을 올려 막았다.

사담은 여기까지 하고. 손을 내저었다.

“하루만 더 있으면 된다니 다행이네. 그럼 그거 얼른 해결하고 다음 일 좀 해 봐.”

“어떤 일 말입니까?”

나는 손가락을 두 개 펼쳤다.

현재 아틀란은 남몰래 이 성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지리를 파악하고 있었다.

에키온의 도움도 받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갇혀 있던 세월이 컸던 탓에 그리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레바이 넌 아틀란이 돌아오는 대로 들어가는 길과 도주로를 같이 의논해 보고.”

“혹시 공녀님은 안 계시는 겁니까?”

“응. 왜?”

“아틀란 님은, 너무 시끄럽습니다.”

“아아, 내가 있으면 입을 좀 다문다?”

나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안 돼, 나 바빠. 아틀란이 필요 이상으로 투덜거리면 내가 시켰다고 해.”

“예.”

레바이도 큰 기대는 없었던 듯 더는 말하지 않았다.

“드렉스, 네 탐지 능력은 꽤 뛰어난 것 같던데. 너 싸움도 좀 해?”

“……못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나는 휙, 휘파람을 불었다.

싸움에 자신만만한 애들은 늘 맘에 든단 말이지.

“좋아, 그럼 너는 사람 하나만 찾아와 줘.”

“누굴, 찾아오면 되겠습니까?”

“팔라야 판테리온.”

“…….”

잠이 오는 듯 반쯤 감겨 있던 드렉스의 눈은 물론이고 함께 있던 레바이도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판테리온 가문의 둘째 아닙니까?”

“얼레, 넌 어떻게 알았냐?”

“이런 정보쯤은 기본 사항 아닙니까?”

누가 우리 책사님 아니랄까 봐, 예쁜 짓도 하셨네. 나는 씩 미소했다.

“그래, 맞아. 드렉스, 그놈을 찾아서 내 말을 전해.”

“……예.”

나는 드렉스에게 전언을 남겼다.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레바이가 살짝 손을 들어 올렸다.

“어째서 팔라야 판테리온을 만나시려는 겁니까?”

“너, 흑표범놈들이 다 순혈이라고 생각해?”

“예?”

“아, 수중 동물 수인은 그나마 좀 덜 따지니 모르나.”

수중 동물 수인들도 서로 다른 종끼리 결혼해 태어난 수인을 불완전 수인이라 칭하며 쉬쉬하긴 하지만.

육지 동물 수인들만큼은 아니다. 이놈들의 차별은 더 했다.

아주 차별하는 데 독보적인 놈들이다.

“흑표범네 둘째는 흑표범 사이에서 나온 놈이 아니야. 첫째랑 엄마가 달라.”

“처음 듣는 얘기군요.”

당연하지. 이건 원작 소설에서도 흑표범네의 비밀로 유지되던 일이었으니까.

그 탓에 상처가 많고 방황하는 둘째 오빠를 보듬어 주는 것이 바로 릴리였다.

“그 둘째의 모친은 뱀 수인이지.”

뱀 수인들은 육지 동물들 사이에서 조금 묘한 위치에 있었다.

중앙에 굳이 나서지 않는 자들이랄까?

“아무튼 여기까지만 알고 있어. 팔라야 판테리온은 써먹을 데가 있으니까.”

“네, 알겠습니다.”

“예, 그럼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인사를 하고 막 응접실을 나가려던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에 두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다. 나는 응접실에서 고개를 갸웃했다.

‘찾아올 사람이 있던가?’

아빠가 자릴 비운 참이었다.

나는 흘끗 옆방을 보았다.

저 방엔 들켜선 안 될 사람이 둘이나 있었다.

“너흰 잠시 옆방에 가 있어.”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휘파람. 불면 달려오기나 해.”

“예.”

“레바이 넌 애들이 절대 밖에 나오지 못하도록 해 주고.”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이 옆방으로 가고 나는 표정을 바꾸고는 달려가서 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용의 신부님.”

문밖에 서 있는 자들은 시종 옷을 입은 자와 기사 둘이었다.

그리고 응접실 앞에는 범고래 측 기사들도 서 있었는데, 군기가 바짝 든 표정이었다.

“아빠는 여기 없는데?”

“예, 피에르 아콰시아델 님은 페세움에 계시겠지요.”

“그래, 맞아. 일행의 결정권자는 여기 없다는 소리야.”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을 거냐는 내 얼굴에, 시종은 조금 놀란 표정을 했다.

“……듣던 대로 아주 영특하신 분이시군요. 용의 성에 귀인이 오셨습니다.”

귀인은 무슨, 사자 코딱지 같은 소릴 하고 있어.

너희 모두가 용의 신부를 한낱 제물 취급하는 걸 누가 몰라.

“하지만 저희가 찾아온 분은 다름 아니라 용의 신부님입니다.”

“나를?”

“예, 용의 신부를 찾는 분이 계십니다.”

“날 찾는 사람이 누군데?”

“이동하면서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대답하지 않자, 시종은 조금 난감한 얼굴을 했다.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자의 얼굴이었다.

곧 시종이 주변을 슬쩍 보더니 허리를 숙여 내게 작게 속삭였다.

마치 은밀한 비밀을 속삭이듯이.

“신부님을 찾으시는 분은…… 바로 용 공작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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